<큐어> 속 인간의 본심을 파헤쳐 드러내는 악에 대하여
※ <큐어>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을 대표하는 작품인 <큐어>가 2022년 7월 국내에 정식으로 개봉하였다. 원래 <큐어>는 1997년 일본에서 개봉한 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걸작으로 손꼽혔지만,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DVD로만 출시된 작품이었다. 약 25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작품이다 보니 영화가 담고 있는 그 당시 시대의 분위기와 지금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큐어>는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작품이다.
<큐어>의 이야기는 대략적으로 아래와 같다. 사람들이 타인의 목에 엑스자를 그어 살해하는 기이한 사건이 연속으로 발생하기 시작한다. 형사 타카베가 이 사건을 추격하던 중 사건과 깊게 연관되어 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마미야를 만나게 된다. 마미야가 다른 이들에게 최면을 걸어 사람들을 살해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갖게 된 타카베는 마미야의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하고 마미야가 살던 곳에서 그가 의대 정신과에서 최면 암시에 대해 연구했던 흔적을 발견한다. 하지만 마미야의 실체에 다가서고 그와 마주할수록 타카베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정신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을 깨닫는다.
<큐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딘가 모르게 불길한 분위기를 풍기는 영화이다. 이 영화가 일본에서 개봉했을 당시의 세기말적인 분위기도 한몫했겠지만, 여기에 가장 일조하고 있는 것은 마미야라는 캐릭터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마미야가 어떠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고 그들이 살인하도록 유도하는지 한 번에 보여주지 않는다. 타카베가 사건을 추적해나가는 과정과 더불어 마미야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최면을 걸고 그들이 살인을 하도록 유도하는지 한 단계씩 천천히 보여준다. 처음 마미야를 바닷가에서 발견하고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왔던 초등학교 교사, 이후 지붕 위에 올라간 마미야를 경찰서로 데리고 온 경관, 그다음 기억을 잃은 그를 진찰하던 의사까지 마미야에 대한 베일이 벗겨질수록 그가 완전한 '악'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마미야 캐릭터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의 실체가 드러날수록 그에 대한 미스터리함이 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에 대한 공포감이 더해진다는 점이다. 마미야는 타인에게 최면을 걸기 위해 내면에 있던 자신이란 존재를 모두 지워버렸다. 그는 텅 비어버린 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내면 깊은 곳에 숨겨놓았던 작은 불만을 감지하는 것이 가능했고, 그것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살인이라는 최악의 방법으로 폭발시켜 버린다. 이것이 명확하게 드러난 장면은 여자 의사가 마미야를 진찰하는 순간이다. 자신에게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도리어 계속 질문을 하며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불만을 감지하던 마미야는 여자 의사의 마음속에 감춰져 있던 '여자 주제에 의사가 되었다'라는 불만을 알아차린다.(관객들은 이미 그전에 여자 의사가 환자들에게 어떤 취급은 받는지 명확하게 본다.) 이 장면에서 그는 이전까지 해왔던 방식인 라이터로 최면을 걸지 않고 물컵으로 최면을 거는데, 마미야가 떨어뜨린 컵에서 흘러나온 물이 여자 의사에게까지 흘러가는 장면은 여자 의사의 마음 깊은 곳 숨겨져 왔던 불만이 마미야를 만나 흘러넘쳤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미야에게 최면에 걸린 여자는 결국 남자화장실에서 남자의 목을 엑스자로 그어 죽이고 그의 얼굴 가죽을 벗긴다.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로 살인을 저지르는 그의 모습은 마미야라는 존재가 얼마나 강력한 최면으로 타인의 마음속 조그맣게 심겨 있던 불만을 악으로 물들일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마미야라는 존재에 대한 공포심을 더한다.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서 타카베는 병원에서 도망친 마미야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 이때 마미야는 타카베의 목에 엑스자를 긋고, 타카베는 마미야에게 총구를 들이미어 쏜다. 이 장면은 여태까지 악한 일을 행해왔던 사람들을 처단해온 타카베가 마미야가 행해왔던 악을 넘겨받는 장면이다. 타카베가 마미야를 죽인 뒤 창고에서 오래된 녹음 파일을 듣고 최면에 걸린 듯 보이지만, 마미야의 피 묻은 손과 타카베의 총구가 같은 화면 내에 등장하는 장면은 타카베가 '살인'이라는 매개를 통해 마미야가 갖고 있던 악을 넘겨받는 것처럼 연출되어 있다. 이후 등장하는 타카베의 아내가 병원에서 목에 엑스자가 그어진 채 살해당한 시체로 나오는 장면은 오랫동안 아픈 아내를 돌보는데 지쳐있던 타카베가 마미야의 최면에 걸려 자신의 아내를 죽인 것이 확실해 보이나, 엔딩에서 타카베에게 서빙을 하던 종업원이 갑자기 식칼을 들고 어디론가 향하는 장면을 통해 타카베가 단순히 마미야의 또 다른 희생자가 아니라 그의 악을 이어받은 계승자가 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특히 멀리서 인물들의 행동을 주로 비춰왔던 카메라가 타카베의 얼굴을 가까이서 클로즈업하여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타카베의 평온한 얼굴과 어우러져 불길하고 섬뜩한 뒷맛을 남긴다.
<큐어>가 다루고 있는 사람들 마음속 깊숙이 숨겨져 있던 불만의 폭발은 단순히 1997년대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마음속 어딘가에도 타인에 대한 불만이 숨겨져 있고, 마미야처럼 누군가 불씨를 댕기는 악이 존재한다면 이는 언제든 터져버릴 것이다. 아니 25년이 지난 지금 이 '악'은 우리 사회 속 어딘가에서 교묘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불만을 터뜨려서 타인에게 상상도 못 할 끔찍하고 잔인한 폭력을 가하게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내면은 마미야와 다를 바 없다. 지금 이 시기에 개봉한 <큐어>는 우리에게 우리가 마미야인지, 아니면 이미 그 악을 이어받은 타카베인지 질문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