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을 통해 바라본 멜로 영화의 법칙과 변주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영화를 관람하고 작성하였습니다.
*이 리뷰에는 <불한당>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한당>을 보기 전, 처음 포스터를 봤을 때 들었던 생각은 ‘한 탕을 꿈꾸며 범죄 세계로 들어간 두 명의 남성이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범죄 영화’라는 인상이었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처음 그런 생각을 했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이 영화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두 사람의 찐한 멜로 영화다’는 것이었다. 흔히들 여성향 장르로 소비되는 BL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지점들이 있고, 그렇다고 해도 <무간도>와 같은 처절한 홍콩 느와르라고 하기에도 미묘한 지점들이 있다. <불한당>은 과연 어떤 영화일까. 이 영화는 다른 남성성 강한 영화들과 달리, ‘멜로 영화’로서 읽힐만한 지점들이 많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멜로 영화’라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선남선녀가 나와서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스토리일 것이다. <불한당>은 <무간도>, <신세계>와 비슷한 언더커버 경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그 본질적인 스토리는 사랑의 이야기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불한당>에서 만날 수 있는 멜로 영화의 흔적은 어떤 것이 있고, 그것들은 또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을까?
영화 속에서 재호와 현수가 만나는 공간은 바로 교도소이다. 세상의 작은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교도소에서 신참내기 현수는 내기에서 강인한 힘을 보이며, 재호의 눈도장을 받는다. 재호가 서열에서 밀려 자신의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목숨까지 위험당할 때, 현수는 적극적으로 달려가 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그에게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현수가 교도소에 잠입하여 재호에게 정보는 빼내기 위해서 접근한 것이다. 재호 역시 오랜 시간 동안 살아남기 위해 남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접근에서 미묘한 기류를 발견했고 오히려 이를 역으로 이용해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흔히들 멜로 영화에서 두 남녀가 만난다고 하면, 서로 다른 환경에 놓여있는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의 다른 모습을 보고 끌리는 설정이 주를 이룬다. 흔히 볼 수 있는 패턴은 부잣집과 가난한 집, 서로 만나서는 안 되는 원수의 집안, 국적 등 등 등. 이러한 수많은 남녀의 어긋난 설정 속에서 <불한당>은 멜로의 통속적인 설정에 남자와 남자, 건달과 경찰이라는 것들을 추가한다.
이 두 사람은 언제 서로에게 매료되었을까. 추측하기로는 재호가 현수에게 매료되었던 시점은 교도소 안에서 현수의 멍든 얼굴을 보았을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수의 얼굴에 멍든 자국으로 보고 재호는 “넌 멍도 이쁘게 든다”라고 이야기한다. 현수의 외양은 교도소에서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었고, 거기에 싸움까지 잘하고 패기 넘치는 그의 모습은 재호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멍도 예쁘게 든다니. 참으로 훌륭한 작업 멘트가 아닐 수가 없다. 그렇다면 현수는 언제 재호에게 끌렸을까. 바로 현수가 자신이 진짜 경찰이라고 고백하는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재호는 현수를 자신에게 오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깊은 과거까지 이야기한다. 어머니를 잃고 무너진 현수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다고 믿었던 경찰에게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감시하는 재호에게서 도움을 받자 모든 마음이 열리고 만다.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주는 순간, 구조받은 사람은 자신을 구조해 준 사람에게 마음이 열리게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이 지금은 당장 썩은 동아줄이라는 것을 모른다고 해도 말이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만나고, 시간 차이는 있지만 서로에게 매료되고, 같은 곳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사실 <불한당>이 미묘한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기대하는 것은 범죄 액션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볼수록 관객들이 느끼는 것은 ‘이 두 사람의 관계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점이다. ‘서로 다른 환경 속에 놓인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 엮일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영화를 볼수록 더욱 커져간다. 멜로 영화도 사실 결과보다는 과정과 감정의 흐름이 더욱 중요한 장르이다. <불한당>에서는 과정과 결과(감정의 흐름까지 포함해서) 모두 중요해진다. ‘재호의 비밀은 언제 밝혀질 것인가. 이 두 사람 간의 극복할 수 없는 큰 진실로 인해 이 둘은 어떠한 결말을 맞이할 것인가. 멜로 영화 속에서도 두 주인공은 아직 서로에게 밝힐 수 없는 비밀을 한 가지씩 갖고 있으며, 이 비밀이 영화 속에서 주요한 갈등의 축이 된다. <불한당>에서는 그 비밀이 두 사람의 관계를 뒤엎어버릴 정도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미묘한 관계와 함께 더불어서 더욱 강력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흔히 멜로 영화 속 부잣집 남자 주인공들은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단 한 가지 사랑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와 반대로 여자 주인공들은 모든 것을 다 가지지 못하고 단 하나 아름다운 외모만은 갖고 있거나. (혹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 반대이거나) 이렇게 멜로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는 어딘가 모르게 느껴지는 결핍이 있다. 그 결핍은 두 주인공을 서로 끌어당기게 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불한당>에서 한재호와 조현수의 결핍은 무엇일까? 한재호는 스스로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태생적으로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믿음이 결여된 사람이다. 조현수에게도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로 ‘믿음’이다. 한재호의 믿음과 조현수의 믿음은 살짝 맥락이 다르다. 한재호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한 번도 쌓아온 적이 없는 인물이기 때문에, 본인의 대사처럼 “사람을 믿지 마라! 상황을 믿어야 한다, 상황을!” 오직 상황만을 믿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현수에게 부족한 믿음이란 무엇일까. 현수는 사람을 믿을 줄은 알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은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상황 속에서 천 팀장이 자신을 도와주지 못하자, 현수는 바로 절망하고 만다. 그 순간 재호가 교도소장을 설득하여 밖으로 외출을 할 수 있게 허락해주자 현수는 재호를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기 시작한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랐을 때, 자신의 힘이 아닌 다른 이에게 기대고 의존하여 그 상황을 벗어나는 것. 영화 내내 현수는 단 한순간을 제외하고 혼자 행동하지 않고, 항상 재호와 붙어서 그를 따라가려는 모습을 보인다. 현수가 독립할 때는 이 세상 속에서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믿어야 한다는 진실을 온몸으로 깨닫는 엔딩뿐이다.
믿음의 대상이 다르지만, 두 사람은 모두 ‘믿음’이 기본적으로 결핍된 존재이다. 하지만 ‘멜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서로 간의 신뢰이다. 그렇기에 두 주인공은 서로 갖고 있는 결핍과 장애물들이 아무리 어렵고 험난할 지라도,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해낼 수 있다. <불한당>에서는 어떨까. 사실 <불한당>에서도 두 사람의 신뢰를 뒤흔드는 즉, 이들이 극복해나가야 할 장애물들이 존재한다. 이는 특히 재호의 불신에서 오는 것들이 주를 이루는데, 그중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현수가 민철을 만나고 왔을 때, 재호가 현수를 엘리베이터 벽으로 몰아붙이고 철저히 몸수색을 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사실 표면적으로 본다면 재호가 현수를 믿지 못해서 하는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멜로 영화의 프레임으로 본다면 다른 측면들이 존재한다. 현수가 자신의 곁을 떠나갈까, 다시 경찰로 되돌아갈까 하는 재호의 두려움과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왔다는 질투가 드러난 것이다. 분노로 일그러진 재호의 얼굴 밑면에는 두려움과 질투가 공존해 있다.
<불한당>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믿음으로서 관계를 시작했지만, 재호가 현수를 끌어들이기 위해 저지른 아주 치명적인 잘못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 없게 된다. 재호는 여전히 현수를 사랑하지만, 현수는 더 이상 재호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재호는 자신이 위협당하는 상황에서도 현수를 구하기 위해 애쓰고, 현수는 천 팀장에게 복수를 한 뒤 그 총을 사고당해 쓰러져 있는 재호의 손에 쥐어준다. 서로 소통해야지 완성될 수 있는 멜로의 엔딩은 <불한당>에서는 이뤄지지 못하고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그렇기에 현수가 자신에게 총을 쥐어주었을 때, 튀어나오는 재호의 웃음은(이영화 속에서 재호를 드러내는 트레이드 마크인) 진정한 의미의 웃음이 아닌, 사랑에서 버려진 인간의 눈물과도 같은 것이리라.
영화가 끝난 뒤, 일부 관객들은 이 영화가 남성들의 진한 향기를 풍기는 ‘범죄 액션 영화’가 아니라, 구구절절한 두 남자의 ‘멜로 영화’라는 것에 분노할지도 모른다. <신세계>와 같은 영화일 줄 알고 기대했는데, 뚜껑을 열고 나니 <후회하지 않아> 같은 느낌…? 물론 영화 마케팅을 할 때, 이런 감성들을 배제해야 더욱 많은 관객들을 영화관으로 끌어들여올 수 있으니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저평가될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범죄 영화 속 남성들 간의 관계는 ‘브로맨스’라는 순화된 키워드로 소비되어 왔다. <불한당>은 그런 순화를 거부하고, 멜로 영화로서 온전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새로운 시도는 관객들에게 한 번쯤은 용인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 비록 이번 멜로의 엔딩은 모두가 죽고 마는 파국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