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산후조리원에서의 일이 기억난다. 아기에게 분유를 다 먹였는데 갑자기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에 수건도 덮어주고 등을 토닥여주기도 하면서 딸꾹질을 멈춰 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딸꾹질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딸꾹질을 너무 오래 해서 아기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불안감이 나를 사로잡았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다가 멈추지 않아 최후의 수단으로 산후조리원에 있는 간호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기가 딸꾹질을 계속해서 그런데 어떻게 해야 멈출 수 있을까요?" 그때 문득 간호사들의 표정을 봤는데, 아직도 그 표정들이 잊히지 않는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얼굴에서는 '왜 잘 모르지?' 하는 의아한 얼굴들이었다. 결국 아기의 딸꾹질이 그쳐 안심했지만, 아기를 안고 내 방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그 표정들이 잊히지 않았고 내가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조리원에 있으면서 항상 마음에 걸렸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거의 6개월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아기를 돌보면서 수없이 들었던 생각은 '내가 아기를 낳기 전에 미리 준비하고 공부를 해놨어야 했나? 내가 아기를 키우는 데 있어서 너무 무지한가?'라는 자책감이었다. 임신했을 때 내게 아기가 생겼다는 사실은 인지했지만, 내가 엄마가 된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했다. 임신은 앞으로 내가 한 아이를 책임지고 오롯이 키워내야 하는 엄마가 된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지만, 그 당시의 나는 임신과 부모가 되는 것을 완전 별개의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엄마가 될 준비를 미처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자책감의 근간이 되었고 '내가 엄마가 될 자격이 있을까?'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왜 나는 내가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 '앞으로 잘 배워나가야지'라는 마음이 아니라 '왜 난 이러한 것들을 미리 알지 못했을까?'라는 자책감이 더욱 강했을까. 그것은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모성애'라는 틀에 가둬두었기 때문인 듯하다. 내가 아기에 대해 몰랐던 사실들은 모성애라는 이름 하에 아기를 가진 엄마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들로만 여겨졌다. 아기에 대한 나의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아기가 신생아였던 시절, 아기를 돌본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신생아가 어떠한지에 대한 자각이 없었던 나는 달래기 어렵고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수시로 깨는 아기에게 짜증이 나있었다.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지 못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신체 리듬이 완전히 망가져버려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이는 아기를 키우는 엄마라면 당연히 겪어야 하는 일이고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에 나온 어린 아기에게 짜증을 내면 안 된다는 이성은 남아있었지만, 잠을 푹 자지 못해 정상적인 사고가 이뤄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계속 우는 아기를 보면서 우울증이 올 것만 같았고, 내가 엄마가 되는 것을 너무 섵부르게 생각했구나 하는 마음이 자꾸 들었다. 그 당시의 나는 모성애를 가진 진정한 엄마가 되기에는 한참 먼 듯했고 내 아기가 귀엽고 예쁘긴 했지만 그 마음이 늘 한결같지는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모성애가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엄마에게 바로 주어지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겪으면서 느낀 '모성애'는 아기를 키우면서 생겨나는 일종의 학습된 감정에 가깝다는 것이다. 제왕절개를 할 때, 아기를 보고 마취를 할 것인가 아니면 아기를 보지 않고 처음부터 마취를 할 것이냐 선택의 기로에 놓였던 순간이 있었는데 수술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것에 공포를 느꼈던 나는 아기를 보지 않고 처음부터 마취하는 것을 선택했다. 어머니는 내게 아기가 태어났을 때 바로 보지 못해 아기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덜 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정말 이것 때문에 내게 모성애가 제대로 생기지 않는 것인가 고민했었다. 이런 고민도 잠시였고 나중에 시간이 지날수록 아기와 내가 함께 하는 순간들이 쌓여가면서 아기에 대한 나의 감정은 놀랍도록 깊어졌고, 결국에 이러한 감정들은 서로에게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본능적인 사랑' 이것이 바로 모성애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이다. 물론 처음부터 내가 아기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기를 정말로 사랑했지만 무수한 대중매체에서 수없이 강조해왔던 '목숨까지 걸 수 있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아기와 나 사이에 감정적인 유대 관계, 즉 애착을 쌓아가는 것이 필요했다. 본능적인 사랑이라고 하지만, 머릿속에서만 떠오른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정말로 한치의 망설임 없이 몸이 먼저 나가버리는 '모성애'가 되기 위해서 아기뿐만 아니라 내게도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아기를 키우면서 내가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분명 내 아기의 엄마이지만, 내 아기를 키운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내가 모르는 영역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아기를 키우면서 항상 배워 나가야 할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나니 스스로에 대해 자책하는 마음들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모성애라는 단어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 분명하지만(아니 이 모성애가 숭고하다는 말에도 지나친 가치 판단이 들어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단어에는 아기를 키우는 엄마들을 억압하고 제재하는 힘이 숨겨져 있다. "엄마가 돼서 이런 것도 몰라?" "당신이 엄마니까 아기를 잘 돌봐야지!" "엄마니까 당연히 자기 아기에 대해서 제일 잘 알아야지." "엄마니까 당연히 참고 무조건 아기를 사랑해줘야지." 모성애라는 미명 하에 타인 혹은 본인 스스로를 비난하는 모든 말들은 엄마가 된 지 얼마 안 된 이들을 공격하기 위한 것일 뿐 실제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모성애라는 단어가 엄마들에게 죄책감을 만들어내는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모성애가 엄마 자격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마지막으로 엄마들에게도 아기와 애착이 쌓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엄마가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아직 아기가 사랑스럽지 않다고 해서 본인이 제대로 된 엄마가 아니라고 자책하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힘들지만 하루하루 아기와 함께하는 순간들이 쌓여나간다면 그 어떤 아기보다도 사랑스럽고 예쁘고 소중해지는 때가 자연스럽게 올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