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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Oct 10. 2022

핍박의 역사를 다루는 또 다른 방식

<RRR> 단평

※ <RRR>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올해 6월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RRR>은 한국 관객들에게는 다소 낯선 인도 영화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나마 알려져 있는 인도 영화인 <세 얼간이>, <당갈>, <블랙> 등이 대부분 동시대 인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RRR>과는 더욱 거리감이 있어 보이는 듯하다. <RRR>은 1920년대로 우리가 잘 배우지 않았던 인도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냥 낯선 느낌만 받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친숙한 느낌마저 들 수도 있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인도의 1920년대는 우리가 일제강점기 식민 통치를 당했던 것처럼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RRR>은 영국에 저항했던 실존 인물인 빔과 라주를 다루고 있지만, 이 영화는 사실 판타지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두 인물이 영화 속에서처럼 서로 우정을 쌓는 것이 아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도를 지독하게 억압해왔던 영국 총독을 처단하는 엔딩이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특히 이 실존인물인 코마람 빔과 시타라마 라주는 사실 조국의 독립조차 보지 못하고 영국군에게 살해당했다. 이러한 슬픈 역사를 토대로 하고 있지만, <RRR>이 역사를 되짚어서 다루는 방식은 진지하기보다는 호쾌하다. 물론 영화가 슬픈 역사를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 인도인들이 영국인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핍박받았는지를 보고 있노라면 피가 거꾸로 솟을 수밖에 없다. 영화 초반 모든 사건의 시작이 된 영국 총독 부인이 말리를 일방적으로 데려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영국인이 만든 총으로 인도인을 쏘는 것은 아깝다고 말하는 영국군의 장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차별적으로 채찍질하라고 명령하는 영국 총독까지 이들의 악행을 보고 있노라면 비슷한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더욱 공감할 수밖에 없다.(영화가 재현하는 영국인들의 모습에는 영화적 과장이 섞였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나라가 실제로 겪었던 끔찍한 일처럼 모두 없었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 속에서 하나씩 쌓여가는 영국인들의 무례함, 악행과 더불어 액션이 동반되는 빔과 라주의 뜨거운 우정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더욱 절정에 달한다. 특히 빔과 라주가 선보이는 액션씬들은 영화적으로 상당히 과장되어 있는데, 이러한 과장은 영화를 보는데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화를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영화는 인물들을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고 이것이 당연하다고 믿게끔 거침없이 밀고 나가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는 빔과 라주가 처음 만나 강에 떨어진 아이를 구하는 순간도 이러한 묘사가 화끈하게 이뤄지지만, 이것이 정점에 달하는 순간은 빔이 갇혀있는 라주를 구해내 탈출한 뒤 자신들을 추격하는 영국군들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다. 각각 활과 창을 사용하여 자신들을 뒤쫓는 영국군을 처단하는 빔과 라주의 모습은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 순간마다 공들인 것이 눈에 보인다. 그중에서도 라주가 빔을 향해 던지는 "언제까지 앞잡이들만 사냥할 건가? 이제 사자를 사냥하러 가자고!" 대사는 단순히 영화적 카타르시스만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억압받고 있었던 인도인들이 모두 한 마음으로 외치고 싶었지만 실제로 이루지 못했던 염원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빔과 라주라는 실존인물을 토대로 하여 판타지적으로 새롭게 재현된 새로운 '역사'는 보는 이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한다. 마치 <바스터즈>의 엔딩에서 히틀러를 무차별적으로 난사해버리는 장면처럼 말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바스터즈>의 엔딩과 <RRR>의 엔딩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나라를 빼앗긴 설욕의 역사 위에 새롭게 만들어진 역사는 단순히 통쾌하다는 말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경험을 가졌던 이들을 환상 속에서나마 위로하는 치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RRR>은 우리와 다른 정서를 갖고 있는 인도에서 제작된 영화이지만, 비슷한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이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핍박의 역사에 공감하게 하면서도 또 다른 한 가지를 시사하고 있는데 슬픔과 고통의 역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재현하는 방식마저 꼭 슬플 이유는 없다는 사실이다. 핍박의 역사 속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다는 점은 같지만, 이를 현대 미디어로 가져왔을 때 단순히 슬픔과 아픔만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들이 모두 즐길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 역사의 아픔을 잠시나마 위로하게 하는 것. 영화를 꺼버린다면 사라져 버릴 환상이지만 그 환상을 통해 아픔을 치유받고 다시 살아갈 힘을 받는 것. 과장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의 아픈 역사도 이러한 기조를 기반으로 우리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재현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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