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희운 Nov 15. 2022

나와 타인을 이어주는 가능성이라는 우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단평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닌 또 다른 다중우주가 실제로 존재한다면?'이라는 마블 영화에서만 존재할 것 같은 황당무계한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초반부터 정신없이 몰아치는 영화는 판타지의 외양으로 우리의 현재 삶과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보다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다.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지만 세무조사에 시달리며 생활고를 겪고 있던 에블린은 아버지, 남편과 함께 세무당국의 조사를 받으러 가던 중 남편이 갑자기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이상한 지령을 내리는 것을 듣는다. 알고 보니 자신에게 이상한 지령을 내리던 웨이먼드는 진짜 자신의 남편이 아니라 다른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웨이먼드였으며 수많은 우주를 넘나들며 세계를 파괴하려는 악당 조부 투바키를 유일하게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지금 세계에 있는 에블린이기 때문에 그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이 세계로 넘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른 우주에 있는 에블린의 지나친 욕심을 인해 모든 윤리 감각을 잃어버리고 악당이 된 조부 투바키는 영화가 전개되는 현시점에서는 바로 에블린의 딸 조이이다. 영화 속에서 조이는 10대가 아닌 이제 막 20대에 들어선 것처럼 보이지만, 조이가 에블린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사춘기 딸의 모습에 더욱 가까워 보인다. 그는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어머니가 자신의 모습을 거부하자 방황하기 시작한다. 여러 차원의 다중우주를 넘나들며 타인을 마음껏 헤치고 흉폭하게 구는 조부 투바키의 모습은 자신의 모습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화를 내며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 조부 투바키가 만들어낸 위험한 물건인 '베이글'은 어린아이를 지나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자신이 처음으로 마주한 세상이 밝고 좋은 것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데서 오는 혼란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 '혼란'을 마주한 에블린은 처음에는 그 '혼란'을 없애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조부 투바키와 조금씩 대화를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혼란에 동조된다. 어른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온 에블린이 이러한 혼란에 동조되는 모습은 의아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블린도 조이와 마찬가지로 혼란의 시절을 지나왔다. 자신도 아버지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했고, 어른이 되었지만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삶에 대해 불평불만하며 회피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기 때문에 에블린도 조부 투바키의 '베이글'에 동화된 것이다. 그렇기에 에블린은 어떤 세계에서는 웨이먼드가 건넨 이혼 서류에 사인을 하기도 하고, 어떤 세계에서는 웨이먼드에게 칼을 찌르기도 하는 등 에블린이란 이름을 갖고 존재하고 있는 많은 우주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도 무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결국 에블린은 그 베이글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 벗어난다. 그가 이 혼돈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남편 웨이먼드의 다정함 덕분이었다. 그전까지 에블린은 웨이먼드의 다정함을 답답한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무능력한 것으로 규정되었던 웨이먼드의 다정함은 현실 세계 속에서는 돈이 되지 않는 쓸모없고 필요 없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모든 세계를 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열쇠였다. 그 다정함을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살았다가 다시 한번 마음 깊이 깨달은 에블린은 자신의 길을 가로막고 자신을 방해하던 사람들을 물리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소원을 이뤄주는 것이다. 다른 우주 속에서 보이는 그들의 소망은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마음속 깊숙한 곳에 감춰왔던 그들의 진짜 욕망이다. 거대하거나 추악한 것이 아닌 현실에서는 타인들의 시선으로 인해 드러내지 못했던 욕망을 에블린은 공격하거나 비난하거나 무찌르려고 하지 않고 그들을 감싸 안고 이해한다. 이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과정은 불필요한 것처럼 보여도 모두 자신의 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연결된다. 


무수히 수많은 공간을 넘나들던 조부 투바키와 에블린은 움직일 수 조차 없고 아무런 생명체조차 느껴지지 않은 드넓은 공간에서 돌이 된다. 조부 투바키는 에블린에게 '마침내 여기까지 왔네'라고 말하며 오랜 시간 동안 외로이 있어왔다는 것을 내비친다. 모든 우주를 넘나들면서 자신이 마주한 세상이 다 부질없다고 느낀 조부 투바키의 모습은 자신이 마주한 세상이 오히려 자기 자신의 존재를 더욱 힘들고 아프게 했다는 것을 막 깨달은 사춘기 소녀의 모습과 겹쳐진다. 부모님과 함께 하던 세계 속에서는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자신이 이제 막 발을 내디딘 현실은 자신의 부모님처럼 다정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을 다치게까지 만든다. 그런 세상에서 부질없음을 느끼게 되고, 오히려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해줬던 부모님과도 거리가 생기면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에블린은 자신이 마주했던 타인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던 것처럼 자신의 딸을 위해서도 기꺼이 그의 고통을 위해 뛰어든다.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타인보다 자신이 직접 낳은 딸을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더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영화 초반에 에블린은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딸이 데리고 온 애인을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그저 친구라고만 소개하며 딸에게 상처를 주었다. 조부 투바키를 물리치기 위해 여러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자신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되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에블린'이 되면서 에블린은 자신 안에 있는 '가능성'을 깨닫고 자신과는 다른 타인을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얻었고, 자기와는 완전히 남인 타인들이 숨겨왔던 욕망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받아들이면서 지금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곳으로 떠나버린 딸을 이해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고 비로소 자신의 딸을 붙잡는다.


조이 : 전부 부질없어. 그나마 상식이 통하는 건 한 줌의 시간뿐이야.
에블린 : 그럼 그 한 줌의 시간을 소중히 할 거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우리 곁에 있는 평범해 보이는 타인에게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가능성의 우주들이 숨겨져 있으며, 그 수많은 우주를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드디어 타인과 조금씩이나마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타인은 단순히 낯선 사람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까지 범위에 들어간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우리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가족이라도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오만한 생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가족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말은 아니다. 오히려 나와 다른 타인임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그들과 내가 진정으로 서로의 존재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허무맹랑하고 다소 정신없어 보이는 외양으로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들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비유와 은유들을 통해서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이를 위해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엔딩에서 여전히 다중 우주를 여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에블린의 얼굴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비록 지금의 우리의 삶이 보잘것없고 하찮아 보일지라도 우리 안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우주는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고 귀중한 것이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핍박의 역사를 다루는 또 다른 방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