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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Jan 31. 2023

인생이라는 코트 위, 트라우마 극복기

<더 퍼스트 슬램덩크>  단상


1990년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만화가 있다. "뜨거운 코트를 가르며~"라고 시작하는 주제가로 방영하는 날마다 대부분 아이들의 엉덩이를 TV 앞으로 붙이게 만든 만화 [슬램덩크]. 이 [슬램덩크]가 무려 30년 만에 새로운 극장판으로 찾아왔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아바타: 물의 길>이 지배했던 극장가를 휘어잡으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거의 200만에 가까운 관객들을 동원하고 있다. 사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그저 일본 애니메이션이라 치부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존재한다. [슬램덩크]를 보고 자란 세대들은 누구나 핸드폰을 갖고 있는 지금의 세대와는 다르게 보고 즐길거리가 많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은 너나할 거 없이 [슬램덩크]를 보러 자랐기에 새롭게 개봉한 극장판을 보러 가는 관객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 봤던 애니메이션에 대한 추억이 있는 어른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장르는 다른 의미에서의 '성인용 애니메이션'에 가깝다. 


그렇다면 거의 30년이나 지난 애니메이션에 관객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히 어린 시절 보았던 '추억' 때문일 것일까? 물론 이러한 이유들도 관객들을 극장가로 불러 모으는데 한몫을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달라진 시점으로 바라보는 익숙한 이야기 때문에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만화판은 주인공인 강백호에 맞춰 진행되고 있고, 서브남(?) 서태웅과의 라이벌 구도를 기반으로 하여 다른 캐릭터들과의 관계성까지 넓혀가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인공은 강백호도, 서태웅도, 채치수도, 정대만도 아닌 바로 송태섭이다. 영화 속에서 진행되는 송태섭의 이야기는 매우 낯설다. 단편으로만 연재되었던 송태섭의 과거 이야기는 기존 만화 분위기에선 상상하지도 못했던 우울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아버지, 그리고 형 마저 어린 시절에 잃었던 송태섭에게 있어서 농구는 거대한 벽과도 같았다. 나름 농구를 잘하기는 했지만 자신보다 농구를 잘했던 형과 늘 비교되기 일쑤였고, 그것이 송태섭을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이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들을 거의 같은 시기에 잃어야만 했던 어머니는 마음의 상처로 인해 아들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주지 못한다. 송태섭의 과거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던 관객들은 사실 이러한 이야기에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중간중간 코믹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전체적으로 '소년 만화'라는 장르 안에서 농구에 대한 열정을 이야기하던 만화 속에 이러한 비극적인 이야기가 있으리라고는 쉽게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송태섭의 이야기는 단순히 만화 속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의 이야기를 끌고 오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 뒤 마주하는 산왕전은 송태섭의 이야기와 그대로 겹쳐진다. 초반 경기를 나름대로 잘 이끌어가는 듯했지만, 북산은 산왕의 실력에 조금씩 움츠러들기 시작한다. 특히 송태섭은 산왕의 압도적인 수비에 압박받으며 더욱 고전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였던 송태섭의 과거와 현실의 경기가 겹쳐지기 시작한다. 코트 밖 자신의 현실에서도 가정이라는 환경으로 인해 압박받는 상황이고, 코트 안의 경기 속에서도 팀원들은 모두 지친 상황이고 자신마저도 마음껏 기량을 펼치지 못해 점점 힘들어지고 있는 상황. 이 순간 "뚫어! 송태섭!"이라고 외치는 한나의 목소리는 송태섭이 경기에서 주저앉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갈 힘을 얻게 한다. 이때 비로소 송태섭의 이야기와 산왕전의 경기가 하나로 합쳐지며 '인생은 마치 코트 위의 경기와 같다'는 다소 뻔한 말이 그 어떤 것보다도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설득력을 얻게 된다. 숨 막히는 정적으로 가득한 경기의 마지막 승리가 확정된 뒤, 송태섭이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은 그야말로 슬픔으로 가득했던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고 그 과거를 비로소 극복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명장면이다.


앞서 관객들이 왜 이 영화에 매료되었는지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송태섭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과거를 극복하는 방식에 관객들이 매료된 부분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누구에게나 방황하는 시절은 존재한다. 이러한 과거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할 것인가에 따라 사람은 다른 방향성을 살게 되는데, 송태섭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농구'로 극복해 낸 케이스이다. 물론 송태섭이 농구를 하는 순간에도 어려움은 존재했다. 어머니에게는 늘 환영받지 못하는 자식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야만 했고, 정대만 패거리들에게는 구타를 당하고 오토바이 사고도 당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순간에도 송태섭은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농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로서 자신을 오랜 시간 동안 괴롭혀 왔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그 트라우마를 넘어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폭력성이 영화 속에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열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농구를 통해 아주 건강한 방식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로지 정당한 대결로 냉정하게 서로의 실력을 판단하는 세계. 그렇기에 북산과 산왕의 한판 승부는 단순히 영화 속 산왕전을 관람하는 관객들만이 아닌, 스크린 밖 현실 세계에서의 관객들에게까지 전율을 일으키는 경기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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