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웨일> 단평
※ <더 웨일>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극장에서 가장 처음 본 영화가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극장에서 영화를 본 가장 오래된 경험은 기억난다. <미이라>라는 제목의 영화를 가족들과 이모의 가족들이 같이 보러 갔었는데, 영화가 무섭기도 하면서도 흥미진진하기도 해서 보는 내내 빠져서 봤던 기억이 있다. 이때 영화를 본 기억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고 선명하게 기억나고는 한다. 그중에서도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남자 배우가 참으로 멋있어 보여 브렌든 프레이저라는 어린 시절에는 다소 발음하기 어려운 배우의 이름을 몇 번이나 되뇌며 외우고는 했었다. 이후에도 그가 나오는 영화를 이따금 종종 챙겨보고 그가 주연인 <미이라> 시리즈를 너무 좋아해서 레이첼 와이즈가 하차하고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미이라 3>까지 극장 가서 챙겨봤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그가 출연하는 영화를 거의 볼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에 대한 내 관심도 자연스럽게 사그라들었다. 온라인을 통해 문득 드문 드문 그의 소식을 전해 듣고는 있었는데, 마침 내가 좋아하는 감독의 신작을 통해 복귀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더 웨일>이라는 신작 포스터에 붙어있는 카피는 바로 이것이었다. '인생에 단 한번 해 낼 수 있는 연기' 액션 영화 스타로서 메소드 연기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그에게 붙은 이 문구가 참으로 궁금해졌고, 그렇게 아주 오래간만에 그가 나온 작품을 보러 가기 위해 극장으로 향했다.
<더 웨일>의 이야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단순 명료해 보인다. 272kg의 거구 찰리는 세상과 거의 단절된 채 온라인을 통해 강의를 하며 돈을 벌고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계속해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증상이 나타나고 간호사인 친구 리즈로부터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 소식에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자신의 딸 엘리를 집으로 초대해 글 한편을 써달라고 말한다. 자신을 계속 거부하고 분노하며 화를 내는 딸을 붙잡기 위해 찰리는 엘리에게 글 한편을 써주면 자신이 갖고 있는 전 재산을 주겠다고 말하고 그 이후부터 엘리는 찰리의 집을 계속 찾아오게 된다.
사실 영화가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마주한 찰리를 연기한 브렌든 프레이저의 모습은 사뭇 충격적이었다. <미이라>가 개봉한 지 약 24년이란 시간이 흐르기도 했고 그 사이 브렌든 프레이저는 50대가 다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모습이 달라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272kg이란 거구가 되어 나타난 그의 비주얼은 그전에는 미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모습으로 극에 녹아들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가 연기한 '찰리'라는 캐릭터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해 자신의 육체를 도피처로 삼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서 극에 조금씩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부분이 두드러지는 지점은 찰리가 어떠한 스트레스 상황을 마주 하였을 때, 광적으로 음식을 몰아넣는 것을 보는 순간이었다.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인해 충격을 받은 찰리는 그 사건의 원인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학대하기 위해 '음식'을 택한 것이었다.
스스로를 죽음과 가까운 순간까지 몰아넣은 찰리에게 유일한 구원은 바로 자신의 딸 엘리였다. 영화 속에서 그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순간에 그를 진정시키게 만드는 어떤 글 한 편이 있었다. 처음에는 이 글의 주인공이 찰리가 사랑했던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비로소 이 글이 딸이 썼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찰리는 영화 내내 자신의 딸에게 "너는 무엇보다도 완벽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야."라고 계속 이야기한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충격을 가진 상처받은 10대 소녀 엘리에게는 이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 듯 하지만, 그래도 찰리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딸에게 이 이야기를 계속해준다. 영화가 전개될수록 찰리가 엘리에게 해주는 이 말은 사실, 자기 자신이 누군가에게 제일 듣고 싶었던 말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된다. 대학교 강사 시절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과 눈이 맞아버려 가정을 버리고 도망갔던 그는 애인과 행복한 삶을 얼마 살지도 못하고 애인의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려 애쓴다. 자신의 살 속으로 존엄성을 지워버린 그는 세상 속에서 자신이 어떤 대접을 받을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항상 시켜 먹던 피자집 아르바이트생이 배달을 올 때조차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의 말미에서 드러나지만 처음으로 그의 정체를 본 아르바이트생은 충격을 받고 이 부분으로 인해 찰리는 또다시 상처받는다.) 그나마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친구인 리즈가 있지만, 리즈는 자신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이지 자신의 영혼을 완전히 구원해 주는 존재는 되지 못한다.
찰리의 외양이 이렇게 사람들이 혐오할만한 모습으로 설정된 부분은 사뭇 상징적이다. 보통 '구원'을 이야기하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의 외양은 어떻게 보면 이 정도로 혐오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찰리의 외양은 상당히 극단적이다. 찰리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등에는 갈색 반점이 엉덩이에는 욕창이 생겼고, 찰리는 움직일 때 혼자 스스로 걷지 못하고 다른 기구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그는 생계를 위해 온라인에서 강의를 하고 있지만 카메라를 항상 꺼놓고 학생들에게 강의를 한다. 거기다가 찰리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잘못을 저지른 인물이다. 자신의 아내와 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람과 눈이 맞아 자신의 가정을 버렸다. 특히 자신의 성정체성까지 숨기고 결혼했다는 점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그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에 완전히 동조하기는 더욱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웨일>이 인상 깊은 점은 이렇게 모든 이들이 회피할 수밖에 없고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역겨워 할 수도 있는 외양과 내면을 갖고 있는 인간이 설사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죽기 전에 단 한번 회복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전처에게 "내가 죽기 전에 잘한 일이 하나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어, "라고 말하며 절규하던 찰리는 영화의 말미에 죽음에 다다러서야 구원받는다. 항상 비가 내리고 있던 그의 방 밖은 그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개어 맑은 햇빛이 비치고 자신을 항상 거절하고 힐난하던 그의 딸이 드디어 그를 향해 손을 내밀어준다. 집안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보행보조기가 필요했던 찰리는 자신의 딸이 문 앞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라고 했을 때 걸어가지 못했던 실패를 극복하고 자신의 집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발로 걸어간다. 항상 실패만 하는 것처럼 보이고 인생에서 좋은 일 혹은 성공한 일이 단 하나도 없어 보이는 찰리가 자신의 잘못과 과거의 실패를 극복하고 한 걸음씩 내딛는 모습은 사뭇 엄숙해 보이기도 한다. 자신이 걸어갈 때 지금의 딸이 읽어주는 어린 시절의 딸이 썼던 [모비딕]에 대한 에세이는 찰리의 모습과 연결된다. 즉, 찰리는 영화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스스로에 대한 혐오 속에서 헤엄치며 부유하던 한 마리의 고래였으나 마지막 자신의 딸이 내밀어준 손을 통해 그리고 그러한 딸의 반응을 이끌어낸 스스로를 통해 삶 속에서의 무게를 벗어던진다. 사람들을 통해 상처받았고,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었으나 결국 사람은 사람을 통해 구원받은 것이다. 거구였던 찰리의 발이 하늘로 떠오른 순간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그가 비로소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및 타인을 통해 구원받은 캐릭터를 브렌든 프레이저가 연기했다는 점이 참으로 기구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미이라>를 통해 전 세계적인 스타로 떠올랐지만, 영화를 찍으면서 스턴트 없이 직접 촬영하느라 몸이 많이 망가지게 되었고 그 뒤로 겪은 이혼 이후의 커리어 하락 및 어마어마한 위자료 등으로 하락세를 걷고 사람들에게 잊혀진 배우. 호감도 높은 액션 배우라고만 생각했었던 브렌든 프레이저를 누가 이렇게 거대한 몸집을 갖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혐오할 법한 캐릭터가 되어 돌아오리라고 상상할 수 있었을까. 이 역할을 선택하기까지 많은 고민이 필요했을지도 모르지만, 브렌든 프레이저는 <더 웨일>에서 말 그대로 살아있는 찰리가 되어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맨 처음 홀로 꺼진 화면 속에서 자신을 감추고만 살아왔던 찰리가 학생들이 진실된 글을 써오자 꺼져있던 화면을 켜고 자신의 거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던 것처럼 <더 웨일>의 찰리는 연기한 브렌든 프레이저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이들의 수군거림을 마주하고 대중 앞으로 나선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추억의 액션 스타의 귀환'이라고만 하기에는 다소 가벼워 보인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지만, <더 웨일>은 브렌든 프레이저 연기 인생의 정점을 찍은 커리어 최고의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