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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Apr 26. 2023

골 때리지만 용기를 주고 싶었던 이야기

<킬링 로맨스> 단평

※ <킬링 로맨스>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통 영화를 보러 갈 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내가 보고 싶은 영화만 보러 가는 편이다. 그런데 정말 가끔 아주 가끔 SNS에서 다른 이들의 반응을 보고 너무 궁금해져서 영화를 보러 갈 때가 있는데, 최근에 관람했던 <킬링 로맨스>가 바로 이런 류의 영화이다. 사실 처음에는 내 타임라인으로 들어온 영화의 예고편을 보고 적잖이 당황하였으나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아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는데, 자꾸만 올라오는 후기들과 영화 속 장면인 듯한 관련 밈들을 보게 되면서 도대체 어떤 영화이길래 SNS에서 반응이 이렇게 뜨거운가 궁금증을 갖게 되었고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킬링 로맨스>를 보러 극장으로 향했다.


올라온 후기에서 너무 웃기다는 평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기에 완전히 대폭소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사실 <킬링 로맨스>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웃긴 영화는 아니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한다면 장면이나 상황으로부터 오는 웃음 포인트가 있는 영화라기보다는 '설마 진짜 이것까지 한다고???'라는 내 기대를 한치도 빗나가지 않고 진짜로 그것(?)을 장면 내에서 해내고 말아 버리는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한 실소가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한국영화에서 거의 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은근한 똘기 어린 광기가 느껴지는 이 영화는 보면 볼수록 어이없음(?)의 연속이지만 자꾸만 영화 속 노래들이 생각나고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게 되는 묘한 평양냉면 같은 중독성을 갖고 있다.


굉장히 독특해 보이는 외양과 다르게 <킬링 로맨스>의 서사는 단순하다. '여래이즘'을 이끌어낼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잘 나가던 스타 여래는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온 스타 생활에 지친 나머지 휴식을 취하기 위해 머나먼 나라로 떠난다. 그곳에서 모든 것을 다 잃고 빈털터리가 될 위기에 처했을 때, 우연히 그 근처를 지나던 조나단을 만나 위기를 모면하고 그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그 뒤로 그녀는 연예계를 은퇴하여 행복하게 사는 듯 보였으나, 사실 조나단은 그녀의 연예계 복귀를 반대하며 그녀가 자신의 옆에서 자신을 빛내주는 인형에만 머무르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한국으로 들어와 연예계 복귀를 꿈꾸던 그녀는 자신의 복귀 시도가 남편으로 인해 무산되자 좌절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자신의 옆집에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팬이었던 범우가 사는 것을 알게 되고, 범우의 제안에 따라 함께 조나단을 없앨 계획을 세우게 된다.


영화의 외양은 굉장히 키치해보이고 심지어 가벼워 보이기까지 하지만, 사실 영화가 담아내는 이야기 자체가 가볍게 넘길만한 것은 아니다. 영화는 '가스라이팅'이라는 주제를 색다른 방식으로 풀어낸 우화에 가깝다. 이는 영화의 초반 누군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연출에서부터 드러난다. 조나단이 여래를 대하는 방식은 그녀의 자율성을 존중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체중 변화에까지 예민하게 반응하며 그녀를 통제하고 그녀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무시하며 오로지 자신의 옆에서 자신만을 빛내주는 부수적인 존재가 되기만을 바라는 폭력적인 방식이다. 조나단은 여래가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자 급기야 그녀를 거대한 벽 구석에 몰아세워 자신의 분이 풀릴 때까지 귤을 던지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사실 겉으로 보기에 폭력에 대한 수위가 높지 않아 잔인해 보이지 않지만, 공포에 질린 채 저항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여래의 모습을 통해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 순간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영화는 이렇게 조나단이라는 존재의 악함을 단순히 행동만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조나단 캐릭터의 줄임말을 JOHN NA(!)라고 지칭하며 일말의 여지없이 가스라이팅하는 존재가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대놓고 드러내기도 한다. (물론 영화 외적으로는 웃음을 주는 마케팅 포인트로서 사용했지만 말이다.)


단 한 번도 자신의 남편에게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여래는 자신의 팬이라고 말하는 범우를 통해 용기를 내어 조나단을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여기에 등장한 범우라는 캐릭터는 상당히 흥미로운 존재이다. 여래가 자신의 남편에게 당한 모습을 본 범우는 먼저 여래에게 범우를 죽일 것을 제안하고 그녀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막상 조나단을 죽여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는 오히려 망설이는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 캐릭터이다. 범우의 존재는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현실에 대해 타인에게 고백했을 때, 가해자가 이러한 일을 벌였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주변인들의 반응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나쁘다고 말은 하지만, 막상 그들을 처벌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라고 반문한다. 물론 가벼운 톤으로 다뤄지고 있긴 하지만 영화 속에서 이뤄지는 것처럼 잘못을 저지른 이라고 해도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현실에서 당연히 이뤄져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범우라는 캐릭터가 가스라이팅하는 가해자에게 보이는 반응은 겨우 가스라이팅 당해왔던 과거를 고백하고 잘못된 것들을 고쳐나가려고 하는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것과 다름없다.


영화는 범우의 도움을 받아 여래가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극복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지만, 사실 영화의 이야기에서 범우라는 존재는 참으로 애매한 존재이다. 여래가 직접 사건을 해결하거나 혹은 범우가 곤경에 빠져 오히려 여래가 도움을 주러 나서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범우의 역할은 딱 여래가 망설이고 있을 때 앞으로 한 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등을 밀어주는 역할이다. 조나단을 죽이고 자신의 삶을 되찾으려 했던 여래의 꿈은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나, 여래는 한국을 떠나기 직전 자신을 찾아온 범우를 통해 다시 한번 더 힘을 얻는다. 여래는 범우와 함께 자기를 찾아온 팬들의 응원에 힘입어 조나단과 노래 배틀(?)을 벌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조나단과 여래가 각각 부르는 노래도 참으로 상징적으로 느껴진다. 조나단이 부르는 '행복'은 조나단의 시점에서 여래와의 행복한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가 처한 상황은 현실적으로 보지 못하고 오직 그녀만을 탓하고 있는 노래에 가깝다. 반면에 여래가 부르는 '여래이즘'은 자아도취적인 가사이나 사실 자신을 오랜 시간 동안 억압해 왔던 조나단을 향해 던지는 가사이다. 'bad girl'이 되겠다는 가사는 이제 더 이상 조나단의 말을 따르지 않고 거절하겠다는 그녀의 의지 표명이기도 하다. 이러한 노래 배틀이 벌어지는 와중에 조나단이 조나단 월드에서 쏴 죽였던 타조의 친구인 다른 타조가 나타나 조나단을 끌고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조나단이 사라진 이후 여래는 그토록 자신이 꿈꿔왔던 연예계로 다시 복귀하게 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모든 악의 원흉이었던 조나단을 다소 엉뚱한(?) 존재가 나타나 해결해 주면서 영화는 여래가 주체적으로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듯한다. 하지만 사실 여래는 그동안 조나단이란 존재에게 오랜 시간 동안 억압받고 있었기에 자신을 지지해 주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녀에게 있어서 사실 인생에서 가장 큰 용기였을 것이다. 원래 자신이 갖고 있었던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고 타인을 향해 목소리를 내는 것. 그것만으로도 여래는 이미 충분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주체적인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킬링 로맨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영화의 화면이 어떻게 연출될지 단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독특한 영화이다. 영화의 외양 자체가 비록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속된 말로 정말 골 때리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나름의 분명한 메시지를 갖고 있다. 자신을 억압하는 타인에게 지지 말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라는 것. 다소 독특하지만(?) 이원석 감독이 언급한 것처럼 이 영화는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잊지 말라고 용기를 주는 영화임이 분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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