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서 또 다른 취미가 하나 생겼다. 그것은 바로 하늘을 보는 것. 원래부터 하늘을 보는 것을 워낙 좋아하기는 했지만, 요즘처럼 하늘 보는 것만큼 날 설레고 기쁘게 하는 것도 없는 것 같다. 하늘의 수많은 얼굴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표정은 바로 노을이 지는 풍경이다.
이전에는 노을이 지는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서 좋아했다면 (물론 지금도 그 아름다움을 이루 말할 수 없이 경이롭지만) 지금은 좋아하는 범위가 더 넓어졌다. 그중의 하나는 노을빛이 닿는 건물 벽이다. 밝았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면 혹은 어두웠던 하늘이 점점 밝아지면서 빛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무채색이었던 건물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노을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게 시작한다. 딱딱하고 무미건조했던 도시의 풍경은 어느새 노을빛 하나만으로 풍성하고 황홀한 풍경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이것은 노을빛만이 갖는 마법 같다.
왜 이렇게 건물 벽에 노을빛이 닿는 순간이 좋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지만 쉽사리 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살면서 수많은 감정들을 느끼고 살았지만, 그 대부분의 감정들은 어떤 살아있는 생명체(특히 사람)들과의 활동에서 벌어지는 것들이었지 이렇게 찰나의 순간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을 독해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그 순간이 좋고 아름다울까… 다시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어릴 적 기억이 하나 문득 떠올랐다. 어린 시절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버스의 좌석 중에서도 맨 앞 좌석을 좋아했다. 그 자리를 타면 여행을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 창 밖의 풍경을 마음껏 내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교회를 갔다가 버스를 타고 오던 때였다. 그 날도 맨 앞자리에 앉아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해가 지고 있었다. 쭉 뻗은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위로 노을빛이 닿자 딱딱했던 아스팔트는 금세 생명을 얻은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바다 위에 반짝거리는 햇빛같이 예뻐서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어쩌면 벽에 노을빛이 닿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일지도 모른다. 그 모습은 내가 느끼던 느끼지 않았던 꾸준히 존재해왔을 텐데, 이제야 그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분명 내 마음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보니 노을이란 새로운 시작을 하기 전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늘은 밤이 되기 전에 가장 밝은 순간이 찾아오고, 아침이 올 때가 되면 가장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는 했던 것이다.
우리의 삶도 이런 모습이 아닐까. 이제 끝에 다다르고 더 이상 떨어질 절망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돌이켜 보면 동이 트기 전 가장 어두운 순간과도 같다. 반대로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시절도 보이지 않은 어둠이 오기 직전일 수도 있다. 그 전환점이 바로 인생의 절정이 되는 것이다. 삶이란 늘 그렇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항상 같은 패턴으로 제자리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이전보단 몇 걸음 더 떨어져 있는 내가 있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다시 보이는 순간, 그리고 그 순간에서 얻을 수 있는 찰나의 기쁨. 가장 절망적이고 아픈 순간에도 하나씩 얻어나가는 깨달음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내가 되고, 하나의 삶이 된다. 언젠가 행복은 환경이나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 것이라 들은 적이 있다. 나의 행복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고 그 어느 누구도 내게서 가져갈 수 없다. 인생의 모든 단 맛, 쓴 맛들을 아우르고 그것을 통해 하나의 ‘나’를 완성시켜나가는 것. 내가 ‘하늘의 절정’인 노을빛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이거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