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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어떻게 무기를 들기 시작하는가?

<원더 우먼>, 그리고 <악녀> 속 싸우는 여자들

by 송희운

※ <원더 우먼>과 <악녀>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한국 영화 속 여성이 살아남는 법’이라는 글을 썼었는데, 그때는 때마침 <악녀>가 개봉하기 직전의 타이밍이었다. <화차>와 <미씽: 사라진 여자> 두 영화에 대한 프리뷰를 쓸 때쯤, 참으로 미묘한 시점에 <원더 우먼>과 <악녀>가 당도했다. <원더 우먼>은 주인공인 다이애나를 맡은 갤 가돗이 시오니스트 논란에 휩싸이고, <악녀>는 영화 자체에 대한 평이 좋지 않은 편이지만 두 영화가 비슷한 시기에 무기를 들고 싸우는 여성 캐릭터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같이 이야기할 만한 지점들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이 ‘여자’ 들은 어떻게 무기를 들고 싸우게 되었을까.




영화 속에서 주로 여성의 육체라 하면, 여성의 아름다운 굴곡 (수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S라인과 같은)들이 전시되는 경우들이 많았다. 여성이 어떤 행동을 취하고, 어떤 태도를 갖는지에 대해서 비추는 것이 아닌, 여성의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엉덩이까지 여성의 신체는 단순한 이미지로 소비되는 것에 그치는 때가 더욱 많았던 것이다. <원더 우먼>과 <악녀>에서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바로 이런 여성의 신체를 다루는 방식이다. 두 영화에서 여성의 신체는 눈요기 거리를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 두 영화 속 여성의 신체는 영화 속에서 남성의 신체와 동등하게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구르고 다치고 움직인다.



이번에 처음으로 영화화된 <원더 우먼>은 우선 그 코스튬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여성의 신체를 강조했던 TV시리즈 속 코스튬과 달리 말 그대로 싸움을 위해 최적화된 코스튬이다. 깡마르고 가슴과 엉덩이가 강조되고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TV시리즈 속 린다 카터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영화 속 갤 가돗의 탄탄한 육체와 함께 갑옷처럼 자연스럽게 몸에 맞는 옷과 손목과 발목을 감싸는 건틀릿과 부츠, 나를 공격하는 이들을 막고 대항해 싸우기 위한 칼과 방패까지 원더 우먼의 코스튬은 말 그대로 싸우기 위한 완벽한 복장이다. 다이애나가 자신이 살던 곳에서 나와 현대 사회로 넘어왔을 때, 그녀는 여인들의 몸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존재하는 코르셋을 걸치는 것을 거부한다. 더 나아가 그녀는 여성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던 재판장이나 회의실까지 들어가서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피력한다. 여성을 억압하는 복장을 거부하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뛰어든 여자. 원더 우먼의 이런 강인한 육체는 남자의 등 뒤에서 보호받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남성을 지키는 위치로까지 역전된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 뒷골목에서 저격당할 뻔했던 스티브를 다이애나가 구하는 장면이다. 스티브가 헛발질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날아오는 총알을 모두 막아내고 그를 구해낸다. 다수의 영화 속에서 보이던 보호받는 여성을 보호해주는 여성으로 완벽하게 역전되는 순간이다.



그녀의 갑옷과 무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은 바로 전장에 나갔을 때이다.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는 마을을 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는 스티브를 뒤로 하고 그녀는 자신의 무기를 모두 갖춘 채 전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빗발치는 모든 총알을 자신의 방패와 신체를 활용하여 막아낸다. 기적과도 같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망설였던 남성들도 그녀를 선두로 하여 전쟁에 뛰어든다. 이 장면 같은 경우 <원더 우먼> 영화 속 백미라 할 수 있는데, 다이애나가 건물에 들어가서 여러 군인들과 격투를 하는 장면에서 특히 카메라가 그녀의 신체를 단순히 전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주먹으로 군인을 제압하고 상대의 무기를 부러뜨려 버리는 그녀의 신체는 더 이상 관음증적인 시선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싸워나가는 여성의 신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악녀> 속 드러나는 숙희의 몸도 마찬가지이다. 맨 처음 영화의 오프닝은 아예 그녀의 신체가 보이지 않고, 오직 그녀의 시점으로 시작된다. 마치 슈팅 게임의 일부가 된 것처럼 그녀가 한 조직을 괴멸시키는 장면을 관객들은 그대로 따라가고 받아들이게 된다. 연습실 같은 공간으로 들어간 뒤, 카메라가 한발 비켜서면서 비로소 그녀의 신체가 보이는데 그때 그녀의 신체도 전시되기 위해 비치는 것이 아닌, 누군가를 죽이고 살아남기 위한 그녀의 움직임에 더욱 집중한다. 주변에 있는 도구들을 십분 활용하여 죽이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에 관객들은 넋을 잃고 빠져들게 된다.



그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누군가를 죽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악녀>에서는 <원더 우먼> 속 여성의 옷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습을 비껴나가는데, 웨딩드레스를 입고 총을 겨누는 일종의 판타지처럼 보이는 장면에서 ‘숙희’가 누구보다도 빠른 속도로 총을 꺼내어 조립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판타지와는 거리가 있는, 그녀가 움직이는 행동 자체에 포커스를 맞춰 보여준다. <악녀>에서 숙희는 다른 누구보다도 무기를 탁월하게 다루는데, <원더 우먼> 속 무기들은 주로 방어하는 것들이 주를 이뤘다면, <악녀> 속 무기들은 대부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원더 우먼>에서는 지키기 위한 싸움이지만, <악녀> 속에서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여야만 하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권총부터 시작해서 장검, 단도, 기관총, 도끼 그리고 심지어는 주변에 있는 밧줄까지 무기로 활용하며 자기 자신의 몸을 도구화하지 않고 먼저 움직이는 주체와도 같은 모습을 보인다. ('모성' 그리고 사랑과 연관된 그녀의 모습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잠시 접어두도록 하자)



<악녀>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들은 단연 신체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액션씬들이다. 맨 처음 숙희가 일당들을 괴멸시키는 오프닝부터 시작해 감옥과도 같은 곳에서 살벌하게 미션을 수행하는 장면, 마지막으로 중상 일당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들의 아지트로 들어가는 장면들까지. 그 장면에서 숙희는 절대로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않는다.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적에게 공격받아 어깨를 칼에 찔리고, 버스가 전복되었을 때에도 그녀는 자신의 복수를 이뤄내기 위해서 절대로 자신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또한, 공격하기 위해 그녀는 과감한 행동들도 서슴없이 하는데 차를 몰아서 건물 안으로 뛰어든다든지, 차 앞에 매달려서 한 손으로 운전한다든지, 버스에 뛰어들어서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 등 등 등. 이렇게 신체의 극한을 끌어올리는 액션을 보여주고 있는 캐릭터를 보고 있노라면 액션에 대한 쾌감과 더불어 액션을 소화하는 데 있어서 캐릭터의 성별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원더 우먼>과 <악녀>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지점이 존재한다. 스토리의 진행 방식상 두 영화는 엄연히 다른 지점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두 영화 모두 여성 캐릭터가 어떤 식으로 변모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스토리의 최종 목적이라 할 수 있는데, 한 영화는 캐릭터의 새로운 시작을 보여주고 한 영화는 캐릭터의 파멸을 보여준다. <원더 우먼>에서 다이애나가 무기를 들고 싸우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스티브의 만남이다. 스티브를 통해 세계가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세상을 위험에 몰아넣는 아레스를 무찌르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살고 있던 안전한 세계에서 빠져나온다. <악녀>에서 숙희가 무기를 들고 싸우는 이유는 자신의 복수를 이루기 위해서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한꺼번에 잃은 숙희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라 믿었던 중상을 죽이기 위해 무기를 들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기 시작한다. 한쪽은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 한쪽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앙갚음을 갚기 위해 싸우는 것으로 싸우게 된 계기는 모두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누군가에게 의존하기 위한 것이 아닌 스스로를 싸움의 한복판에 위치시킨다. 우리가 보통 영화 속에서 만났던 수많은 여성 캐릭터들의 모습은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보호받아야만 하는 연약한 대상에 불과했다. 지난번 언급했던 <화차>와 <미씽: 사라진 여자> 속 여성 캐릭터들은 보호받기 위한 대상은 아니었지만, 자신들을 외면하는 세상에 절망하며 자신과 그 주변을 파멸하는 쪽을 택했다. <악녀> 속 숙희도 이들과 비슷한 파멸이라는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협하는 세상에 굴복하는 대신, 그 세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길을 선택했다.




흔히들 ‘남자는 여자의 눈물에 약하다’고 이야기한다. 사회에서 이미 수많은 남성들이 자신들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았기에 이런 이야기들이 나왔으리라. 이제 여자가 눈물만 흘리고 있는 시대는 지났다. 여자들도 자신의 무기로 싸울 수 있는 시대이다.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도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무기를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우리는 얼마나 더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만나볼 수 있을까? 또한 이를 넘어서 여성과 남성을 굳이 구분하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나 매력적일 수 있는 그런 캐릭터들도 꼭 만나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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