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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갈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영화 <하루> 속 극과 극 선택을 하는 두 캐릭터에 대하여

by 송희운

※ 본 리뷰는 6월 13일(화) 진행된 시사회를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 본 리뷰에는 <하루>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갈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 인가? 이 질문은 사소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위험에 닥친 순간, 그 사람의 바닥을 볼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여기 이 질문에 대해 극단적인 답을 내린 두 사람이 있다. 그 주인공은 영화 <하루>의 준영과 민철이다.



준영은 자신의 눈 앞에서 사랑하는 딸을 잃어야만 했고, 민철도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계속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눈 앞에서 잃어야만 하는 시간 속에 갇힌 두 사람은 어떻게든 자신의 사랑하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애를 쓴다. 서로의 하루가 반복된다는 사실을 안 뒤에도 두 사람이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 위한 고군분투는 끝나지 않지만 그들의 행동은 노선을 조금씩 달리 하기 시작한다. 준영은 어떻게든 자신의 딸에게 일어나는 교통사고를 막기 위해 약속 장소를 바꾸는 다소 간접적인 행동을 하고, 민철은 스스로의 머리를 벽돌로 내리쳐서 뺑소니 사고가 난 척하며 택시기사를 막으려고 한다. 이런 행동들에서 두 캐릭터의 특징이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준영은 도덕적으로 뛰어난 의사라는 표면적인 모습 그대로 남들에게 최대한 피해를 입히지 않는 행동으로 딸을 구하려 한다. 구급대원인 민철은 이보다는 좀 더 극적으로 자신의 아내를 구하려 애쓴다. 처음에 민철의 공격적인 행동은 자기 자신을 다치게 하는 선에서 그쳤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두 사람에게 얽힌 과거가 드러나자 두 사람의 행동 또한 극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마치 서로 정반대의 성향에 있는 캐릭터처럼 보였던 준영과 민철은 그들에게 숨겨진 과거가 드러나는 순간, 두사람은 더 이상 대칭점에 있지 않고 서로 하나의 점처럼 겹쳐지게 된다. 자신의 부주의한 실수로 인해 교통사고를 내서 택시기사인 강식과 그의 아들에게 피해를 입혔던 민철. 민철은 이들을 응급실로 데려다주었지만, 처음 사고가 났을 때 그는 공포에 질려 그 자리를 도망치고 말았다. 심장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한 딸로 인해 괴로워하던 준영은 우연히 병원으로 실려온 강식과 그의 아들을 보고 보호자의 동의 없이 수술을 강행한다. 이 두 사람의 과거가 밝혀지는 순간, 관객들은 두 캐릭터에게 감정이입하던 것에서 벗어나 사고를 일으킬 수 밖에 없었던 강식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지옥 같이 반복되는 이들의 하루는 그들의 과거에 저질렀던 죄로부터 이뤄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하루는 이미 강식에게 벌어졌던 끔찍한 현실이었고, 강식은 자신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현실의 고통을 똑같이 되갚아주기 위해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끊임없이 살인을 저지른다.



자신들의 죄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두 사람의 선택은 다시 한번 갈린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용서를 구할 것이냐, 자신의 죄를 외면하고 당장 현실 속의 문제만 해결하려고 할 것이냐.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벽돌로 내리쳤던 민철의 공격성은 이제 외부로 향하기 시작한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해서 경찰서로 들어가 경찰을 공격하고, 강식을 죽여야만 자신의 아내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의 몸에 칼을 찔러 넣고, 앰뷸런스로 그의 차를 향해 돌진한다. 준영은 어떨까? 준영은 강식의 아들인 ‘하루’를 죽게 만든 장본인으로 죄의 경중으로 따진다면 그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범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는 강식이 죽으면 하루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목숨을 부지시키면서 그에게 용서를 빌고 그의 마음을 되돌리려 한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도 준영의 사과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과는 아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서강식에게 표면적인 사과를 하고 있을 뿐이다. 타인을 공격하느냐 아니면 타인을 붙잡아두느냐 성향의 차이만 있을 뿐, 준영과 민철의 행동은 모두 이기심에 의한 행동들일뿐이다.



무한하게 반복될 것 같았던 타임루프는 결국 종료된다. 이 타임루프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준영이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서 교통사고가 나는 순간 자신의 딸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닌, 강식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딸을 구하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그 순간 눈 앞의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원인을 제공하는 이의 목숨을 먼저 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희생이다.(이미 그가 자신의 딸을 위해 한번 목숨을 내던졌던것보다도 더욱 큰 희생이다.) 아내 뱃속에 있던 아이까지 한꺼번에 잃었다는 분노에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던 민철과 달리, 자신의 선한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이타적으로 행동한 준영. 결국 <하루> 속에서 이 타임루프는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벌한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하루>의 결말이 권성징악이라는 다소 뻔하고 익숙해 보이는 것일지언정, <하루>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사뭇 진지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당신이 갈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준영은 사랑하는 이 대신 다른 이를 먼저 구하는 행동까지 서슴치 않았고, 민철은 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만약,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에게 준영과 민철에게 닥친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과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떤 선택까지 할 수 있을까. 인간의 도덕과 윤리를 지킬 수 있을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을 내던져버릴 수 있을까. 당신의 선택은 무엇일지 영화를 본 뒤 판단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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