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속 가네코 후미코에 대하여
※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하고 작성되었습니다.
때로는 영화를 보다 보면 영화 전체가 기억에 남기보다는 영화 속 한 캐릭터가 더 기억에 남을 때가 있다. <박열>이 내게는 그런 영화였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를 떠나서 영화보다 오히려 영화 속 캐릭터가 더 강렬하게 뇌리에 기억되는 영화. 주인공인 ‘박열’이란 이름을 영화의 제목으로 한만큼, 이 영화는 주인공 ‘박열’에게 더욱 집중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게 더욱 강렬하게 남은 캐릭터는 ‘박열’이 아닌 ‘후미코’라는 인물이었다.
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박열>은 감독의 전작 <동주>처럼 한 개인의 삶을 올곧게 보여주려는 성향이 강한 영화이다. <동주>가 험난한 시대 속에서 개인이 겪어야만 했던 아픔과 슬픔을 담았다면, <박열>은 그 시대의 아픔에 굴복하지 않고 부조리함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영화이다. 내게 <박열>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한 독립투사의 영화라기보다는 한 편의 로맨스 영화 같다는 느낌이 더욱 강했다. 그 이유는 세상을 대하는 ‘박열’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갖고 있는 낭만성뿐만 아니라, 박열과 후미코 간의 뜨거운 사랑,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것까지 두려워하지 않았던 신념까지, 영화 러닝 타임 내내 스크린에 가득했던 뜨거운 열정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후미코는 유난히 빛이 났다.
영화의 첫 오프닝에서부터 후미코는 박열이란 존재보다 더욱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박열이 쓴 시 ‘개새끼’를 읽고 한 번에 매료된 후미코는 그에게 자신을 당차게 소개한다. 오프닝 장면을 보자마자 들었던 생각은 이 영화가 박열을 위한 영화인 동시에 후미코를 위한 영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주저하지 않고 다가가는 그녀의 당당한 모습만큼, <박열>이란 영화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킨다.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 정부의 모함으로 감옥에 있을 때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나, 재판관 앞에서도 일본의 제국주의의 만행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아끼지 않는 모습 등. 그녀의 모습이 이토록 강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이유를 그녀가 박열이라는 존재를 사랑한 동시에 자기 자신이 믿는 신념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후미코는 감옥에 갇히기 이전부터 이미 자신의 인생에서 모진 시련과 풍파를 겪어온 인물이다. 부모에게서 버림받고 자신의 나라에서 제대로 살지 못했던 그녀는 '무적자'라는 이유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도 못했다. 조선에서 3.1 운동을 목격한 뒤,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확인하고 이에 동감하게 된 후미코. 이러한 그녀에 대해 일본인들은 일본에서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했기에, 조선을 동정하는 것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일본이 아닌 조선에 있었기에 제국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고, 그로써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박열과 그녀를 칭하는 단어인 ‘아나키스트’라는 뜻에 걸맞게 모든 제도화된 정치조직,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는 인물이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았던 만큼, 그 부정은 부정을 위한 맹목적인 부정이 아닌, 자신 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향한 끊임없는 구애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후미코는 박열이라는 인간 자체도 사랑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랑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자기 자신이 가진 신념이다. 자신의 신념을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어떤 형체를 가진 대상이 아닌,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갖고 있는 신념에 대해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인물이었는데, 이것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이다. 박열이 대역사건의 배후로 지목되고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그녀도 박열을 따라나서 같이 재판을 받게 된다. 맨 처음 재판을 받을 때 그녀는 바로 이와 같은 대사를 한다. “나는 박열을 알고 있다. 박열을 사랑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결점과 과실을 넘어서 박열을 사랑한다” 박열에 대한 후미코의 절절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지만, 이런 대사를 법정에서 했다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이 없는 한, 나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는 이런 고백을 할 수 없게 마련이다. 자신이 다시 살 수 없게 될지라도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것. 결국 자기 자신의 신념과 믿음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서 자신이란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 먹고살고 눈 앞의 독립에 더욱 투쟁해야 하는 이 힘든 시기 속에서 이보다 더 큰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이 어디 있을까. 그렇기에 감옥에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족적을 남기고, 자신을 조롱하는 교도관 앞에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옷을 벗을 수 있었다. 외부의 어떤 위협이 오더라도 자신의 존재는 절대로 훼손되지 않기에.
그렇기에, 영화 속에서 후미코가 무덤에 묻힌 장면은 유난히 슬플 수밖에 없었다. 화면이 쭉 아래로 내려가면서 그녀의 이름이 비치고, 그 뒤쪽의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불령사 일원들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의 무덤을 향해 다가온다. 그토록 당당했던 그녀는 이제 온기를 잃고 생명을 잃은 채 차가운 땅바닥에 묻혀 있다. 그녀가 비록 살아생전 당당한 아름다움으로 훼손되지 않는 존재로서 있었지만, 그녀의 그러한 아름다움을 이제 볼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후미코를 무덤에서 꺼내서 옷을 덮어주는 장면보다 무덤을 향해 불령사 인원들이 다가오는 장면이 개인적으로 더욱 뭉클했는데, 그것은 실존했던 인물이자 사랑했던 캐릭터를 떠나보내야 하는 어렴풋한 슬픔 같은 것이었으리라.
사람들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라는 인물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이들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이룩한 업적은 없는데, 어떻게 이를 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냐고.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곧 결과가 수반되어야 하는 일이지만, 때로는 예기치 못한 사건들로 인해 그 결과를 이룩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없는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똑같은 것일까. 지금까지 우리가 살면서 결과를 보지 못했던 수많은 행동들은 정녕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박열>이란 영화를 보고 나면, 그리고 영화 속 박열과 후미코를 만나고 나면 그것은 틀린 생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남들과는 차원이 다른 열정으로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그들의 삶이 누구보다도 찬란한 생의 흔적이라는 것을. 박열뿐만 아니라 가네코 후미코, 그녀는 진정 자신의 신념과 삶과 자신을 사랑한 이 시대의 최고의 로맨티스트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