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 <미씽> 속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한 그녀들에 대하여
※ 본문에 <화차>, <미씽: 사라진 여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름이 되면서 수없이 많은 블록버스터들이 개봉하고, 이 시기를 겨냥한 한국 영화 대작들도 속속들이 개봉하기 시작했다. 그 수많은 한국 영화들 중에서도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들은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악녀>를 제외하고) 이는 비단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한국 영화 속에서 여자들의 얼굴은 항상 이야기의 주변부에만 머물러 있거나, 누군가(주로 남성 주인공들)를 보조하기 위한 역할에 불과했다. 그나마 가장 빈번하게 여자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작품이라면 박찬욱 감독의 영화 속 여성들이랄까. 수없이 많은 여성들의 얼굴은 내러티브 속에서 너무나 쉽게 묻혀버렸기에 우리는 그녀들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할 수 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한국영화 속에서는 ‘그녀’들의 모습이 자주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들의 모습이 어떤 평범한 삶속에서 드러나는 일상적인 것들이 아닌,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채 드러났다는 점에서 독특한 지점을 지니지만 (이들의 모습과 얼굴이 주로 스릴러를 통해 나타난다는 건 그만큼 한국 사회 속에서 여성들이 살아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반증이 아닐까) 대중 영화 속에서 여성이 전면에 나섰다는 점에서 살펴보고 싶은 영화 두 편이 있다. <화차>, <미씽: 사라진 여자>이다. 이 두 편의 영화 속에서 드러난 그녀들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그 속에서 그들은 어떠한 표정을 지었는지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화차>, <미씽: 사라진 여자>의 공통점은 ‘평범한 삶에서 벗어난 여성 캐릭터’들이라는 점이다. <화차> 속 차경선은 자신의 이름으로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어서 다른 이의 삶을 강탈했다. <미씽: 사라진 여자>의 한매는 자신의 딸을 잃고 다른 이의 딸을 납치하기까지 이른다. 이 두 영화 속에서 여성 캐릭터들의 모습은 우리의 고정관념 속에 담겨있는 여성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녀들은 흔히 이야기하는 ‘어머니=성녀’나 ‘팜므파탈=악녀’로 분류되는 여성 캐릭터의 이분법화에서 벗어나 자신의 원하는 바를 강렬하게 주장하고 있으며, 주류 사회의 관습 속에 녹아드는 것을 거부한다. 이들은 극단적인 외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모습은 마치 ‘악녀’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악녀’가 처음부터 끝까지 누군가를 파멸시키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이들에게는 뚜렷한 목적이 없다. 이들에게 목적성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사는 것’뿐이다. 그녀들은 누군가를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닌, 자신만의 삶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화차> 속 경선은 평범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 다른 이를 살인하는 계획까지 세웠고, <미씽: 사라진 여자>의 한매는 자신의 딸을 위해 몸을 팔고 장기까지 팔고 결국에는 청부 살인까지 의뢰한다. 사실 그녀들의 모든 행동은 자신이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에 가깝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이들을 무조건 악녀라고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녀들의 모든 행동에는 단순히 쾌락만을 위한 것이 아닌,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는 이들의 행동을 비난할 수 있지만, 감성적으로는 이들의 행동에 감정이 동화된다.
그런 의미에서 두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은 마치 <월하의 공동묘지> 속 월향과 <하녀>의 이름없는 하녀가 합쳐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월하의 공동묘지>에서처럼 죽은 자를 통해 억압되었던 사회적 욕망들이 귀환했다면, 현대로 넘어온 뒤에는 억압되었던 그녀들이 유령으로 귀환하지 않고 자신의 몸에 생명을 부여받는다. 평범한 삶을 사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이제 그녀들은 남성들에게 받은 피해를 자신의 안으로 체화시키지 않고, 그것들을 외부로 분출하여 폭주하는 것이다. 마치 <하녀>의 ‘이름없는 하녀’가 온전한 가정의 울타리를 해체하고 균열을 일으켰던 것처럼, <화차>의 경선과 <미씽: 사라진 여자>의 한매는 기존의 사회에 커다란 금을 내버린다.
두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이라면 각 캐릭터들이 끔찍한 순간 도달했을 때 보이는 그녀들의 얼굴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세상 속으로 내던져 진거나 마찬가지였던 그녀들의 표정과 모든 일들을 겪고 난 뒤 변화된 그녀들의 표정은 이들의 삶이 얼마나 지옥 같았는지 짐작하게 한다. <화차>의 경선과 <미씽: 사라진 여자>의 한매가 일련의 일을 겪기 전에 지었던 표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함이다. 그녀들의 표정 속에서는 세상의 어떤 고통이나 끔찍한 현실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난 뒤 그녀들의 표정은 무시무시하게 변화한다.
두 영화 속에서는 이러한 그녀들의 표정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화차>에서는 경선이 살인을 저지르고 난 뒤, <미씽: 사라진 여자>에서는 한매가 자신의 남편을 죽여달라고 이야기할 때이다. ‘선영’이란 이름과 신분을 손에 넣기 위해 경선은 선영과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하고, 여행에서 그녀를 죽이고 남은 잔해들을 처리한다. 처음 살인을 저질렀던 경선의 얼굴은 공포에 가득 차 있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은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변화한다. 속옷만 입은 채 바닥에 널려 있는 피를 닦는 경선의 얼굴을 섬뜩하리만치 아무런 표정이 없다. 어떠한 욕망이나 감정도 읽을 수 없는, 그저 생존의 본능만이 남아있는 경선의 얼굴은 한 사람이 사라진 흔적인 피와 어우러져 섬뜩하면서도 슬픈 감정을 자아낸다. <화차>에서 드러났던 경선의 여러 얼굴 중에서도 이만큼 강렬하고 압도적인 표정은 찾기 힘들 정도로 그녀의 표정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깊숙이 박힌다. <미씽: 사라진 여자>에서는 한매의 표정은 조금 더 다양하게 등장하는데, 이는 한매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드러난다. 아이가 아픔에도 불구하고 병원으로 갈 수 없었던 순간, 딸을 위해 수술했던 순간, 결국 딸을 잃은 순간, 그리고 남편을 죽여달라고 의뢰하는 순간까지.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한 절박함으로 가득했던 한매의 얼굴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나자 냉정하고 독기 어린 얼굴로 변화한다. 남편을 죽여달라고 이야기했던 한매의 얼굴은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의뢰하는 그녀의 싸늘한 말투만큼이나 섬찟하다. 두 영화 속에서는 이런 끔찍한 순간에 그녀들의 얼굴이 모두 클로즈업되어 보이는데, 이 클로즈업은 이들의 얼굴 표정을 더욱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게 만들 뿐만 아니라 심연으로 가라앉은 이들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동화시킨다. 하지만 이때 경선과 한매의 얼굴 표정은 그녀들이 지을 수 있는 다양한 표정중의 하나이다. 이 표정만으로는 이들의 존재를 완전히 다 드러냈다고는 볼 수 없다.
영화 속에서 그녀들의 얼굴은 순수함에서 악함으로 변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서야 이들의 진짜 ‘얼굴’이 드러난다. 약혼자 문호가 먼저 경선을 발견한 뒤, 자신을 사랑했냐고 묻는 질문에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젓는 경선. 배 위에서 궁지 몰린 뒤 아이를 안은 채 절박한 표정을 짓는 한매. 그녀들의 행동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엄연한 ‘죄’로 낙인 찍혀 있지만, 사회가 그녀들을 외면했기에 살기 위해서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최후의 선택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삶을 짓밟은 것처럼 자신도 생존을 위해 남을 짓밟고 일어설 수 밖에 없었던 그녀들의 진짜 얼굴이 드러난 뒤, 이들은 스스로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의 진짜 얼굴이 드러난 순간, 위장된 신분이 아닌 진짜 신분으로는 이 사회의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없기에 그녀들은 더 이상 세상에 거부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삶을 끝내는 것이다.
<화차>와 <미씽: 사라진 여자> 이 두 편의 영화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한국 영화 속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주류 사회에 금을 만들어 냈다. 이들이 만들어낸 균열은 안전해 보이는 보통의 사회에 어떤 흔들림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이야기의 주체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흔들림이 시작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 지금, 두 편의 영화 외에도 다양한 영화 속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쩌면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사회의 규범에 얽매여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여성 캐릭터를 만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