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단평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10월 1일 국내 개봉하였다. <리코리쉬 피자> 이후 3년 만에 개봉하는 신작으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답게 러닝 타임이 무려 162분에 달해 보기 전부터 다소 걱정을 하긴 했었다. 긴 러닝 타임에 큰 마음을 먹고 갔으나 압도적인 몰입감으로 러닝타임이 1시간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고 역시 할리우드의 천재 감독이라는 명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프렌치 75라는 반정부 단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소 과격한 대장 퍼피디아와 그를 따르는 폭탄 전문가 팻 칼훈. 이민자들이 갇혀 있는 시설을 습격하는 것부터 시작해 이들은 이민자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과감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던 중 서로 사귀는 사이였던 퍼피디아와 팻 사이에 아기가 태어나고 화목했던 그들의 사이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다. 퍼피디아는 아기를 돌보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위해 밖으로 뛰어나가기를 원했으나 팻은 태어난 딸을 위해서 퍼피디아가 가정에 집중하기를 원하면서 서로 부딪힌다. 결국 퍼피디아는 자금 마련을 위해 은행을 털던 중 한 명을 사살하고 경찰에 붙잡혀 동료들의 정보를 불게 된다. 이로 인해 밥은 자신의 딸 샬린과 새로운 신분을 얻어 다른 곳으로 도망친다. 16년이 지난 뒤 샬린은 윌라라는 어엿한 소녀로 성장하고 팻은 밥이라는 이름으로 마약과 술에 쩌들어 살던 중, 갑자기 프렌치 75를 숙청한 록조 대위가 자신의 딸을 납치했다는 것을 깨닫고 딸을 찾기 위해 옛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다. 내러티브가 상당히 직관적이고, 스크린에서는 호쾌한 액션들이 가득해 그야말로 러닝 타임 내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단순히 재미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민자들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정면으로 아니, 그보다 더욱 과격하게 돌파하는 '프렌치 75'의 모습은 어떻게든 이민자들을 추방하려고 애쓰고 있는 트럼프 정부에 대한 과감한 도전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단순히 집단에 대한 묘사뿐만 아니라, 영화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16년 뒤 딸을 찾기 위해 밥이 세르지오에게 도움을 받으러 갈 때, 도시를 쥐 잡듯이 뒤지러 온 록조 대위가 이민자 집단과 대치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딸을 찾기 위해 무너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도망가는 밥의 모습과 화염병을 들고 군인들과 대치하는 이민자들의 모습은 (트럼프가 다시 재선을 한) 지금 이 시대에서도 ‘혁명’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밥이라는 캐릭터의 내러티브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면서도 그 배경 속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이며 영화를 더욱 다층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영화적 배경은 윌라(본명은 샬린)라는 캐릭터와도 연결된다. 윌라는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이다. 그러던 중 록조 대위가 백인 우월주의 비밀 클럽인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에 가입하기 위해 자신의 딸일지도 모르는 흑인 혼혈 윌라를 뒤쫓기 시작하면서부터 윌라의 인생은 송두리째 뒤바뀐다. 그저 평범한 10대였던 윌라는 갑자기 자신의 목숨을 위협받고, 프렌치 75 다른 동지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도망친 수녀원에서는 록조 대위에게 붙잡혀 밥이 자신을 낳아준 친아버지가 아니라 오늘 처음 본 록조 대위가 자신의 친아버지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에 암살자에게 살해당할 위기에서 겨우 도망치고, 차를 타고 도망치던 와중에 록조 대위를 총으로 쏴버린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 인물에게 추격당하기 시작한다. 물론 윌라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 묘사를 통해 드러나지만 윌라가 겪은 일들은 10대의 평범한 나날에서는 단 한 번도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다. 윌라는 이 일련의 일들을 통해 자신이 가진 피가 무엇이고 깨닫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눈을 뜬다. 윌라가 겪었던 일들을 극복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모든 일이 끝난 뒤 윌라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정체성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자신의 부모님처럼 또 다른 혁명을 이루러 떠난다.
이 영화는 윌라의 '성장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밥의 우당탕탕(!) 정체성 다시 찾기'이기도 하다.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된 이후 밥은 술과 마약에 빠져 흥청망청 살고 있었다. 그는 록조 대위의 급습에서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프렌치 75의 암호를 대부분 잊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잊기 전 만들어 놓았던 비밀 통로 덕분이었다. 이렇듯 밥은 오래전 프렌치 75의 일원으로 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모두 잊어버렸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딸인 윌라보다도 자신의 앞에 닥친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고 거의 무능력한 것처럼 보인다. 세르지오의 도움을 받아 도망가다가도 젊은이들을 따라가지 못해 건물에서 떨어져 경찰에 잡히고, 다시 세르지오의 도움을 받아 윌라를 쫓아가던 중 경찰의 추격을 받자 세르지오가 차에서 떨어지라고 하는 타이밍에 맞춰 떨어지지 못하고 세르지오가 차를 꺾어 흔들고 나서야 떨어진다. 수녀원 근처에 도착해서 때마침 윌라를 데리고 떠나는 록조를 발견하지만 록조를 총으로 단 한 발도 맞히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타겟이 되어 총격받는다. 이렇듯 러닝 타임 내내 밥은 무능력한 백인 남성을 대변하는 캐릭터로 비친다. 특히 밥은 록조 대위와 가장 대비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록조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다. 백인 우월주의 비밀 클럽인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오점인지도 모르는 윌라를 찾아내려고 자신의 모든 군대를 동원하고 고등학교까지 급습한다. 두 남자의 캐릭터성은 상당히 대비되어 밥을 더욱 무능력한 캐릭터처럼 보이게 만드나, 오히려 밥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웃음을 유발하고 캐릭터를 통해 이야기를 집중하게 만들어 몰입감을 높여준다.
이 밥 캐릭터가 가장 중요해지는 순간은 윌라와 밥이 다시 만나는 순간이다. 쫓기던 윌라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을 뒤쫓던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 일원을 해치우지만 손에 총을 쥐고 여전히 긴장 상태로 있는다. 마침내 밥이 윌라의 차량을 따라잡아 차에서 내리고, 밥은 자신의 동지들을 구분할 수 있는 식별장치를 들고 윌라를 찾는다. 영화 속에서 식별장치는 해당 장치를 갖고 있는 사람이 같은 프렌치 75 동지임을 구분하게 해주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밥과 윌라의 관계를 정의해 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두 기계의 주파수가 일치하면 하나의 멜로디가 형성되는 이 식별 장치는 윌라와 밥이 혈연이 아닌 엄연한 남이지만, 이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가족이 맞다는 것을 드러낸다. 숨 막힐 듯이 질주하던 영화는 이 장면에서만큼은 잠시 숨을 고르고 두 가족이 재회하는 장면을 서정적으로 아름답게 그려낸다. 뛰어난 기지를 발휘해서 윌라는 목숨을 건지는 데 성공했지만, 사실 그는 아직 다 크지 못한 미성년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아버지인 밥을 보고도 그를 믿지 못해 암호 구호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 언제든 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밥은 자신의 딸을 보면서 이제 그런 절차는 중요하지 않고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고 간절히 호소한다. 그때서야 윌라는 무장을 해제하고 아버지의 품에 들어가 안긴다. 밥은 프렌치 75 대원이었던 시절만큼 뛰어난 동지가 아니고 딸을 찾는 모든 과정에서 실패를 거듭하였지만, 딸이 절망과 혼란에 빠진 순간 비로소 그를 구해준 진정한 의미의 아버지가 되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두 집단인 ‘프렌치 75’와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은 여러모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위치에 있다. 록조 대위로 인해 프렌치 75는 거의 괴멸되다시피 해산되어 음지에서만 활동하게 되었지만,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은 막강한 권력과 부를 이용해서 밥과 윌라를 괴롭혔던 록조 대위마저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 버린다. 윌라는 살아남았지만, 가장 대척점에 있는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에는 어떠한 타격도 주지 못하고 그저 목숨만 건졌다. 어떻게 보면 이는 거대한 권력을 가진 집단을 작은 힘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다는 현실의 일면을 뼈저리게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마지막 엔딩에서 윌라는 자신이 물려받은 피를 통해 투쟁하러 떠난다. 그 투쟁이 어떻게 성공할지 혹은 그 투쟁으로 인해 거대한 조직에 조금이라도 타격을 입힐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여기서 끝이 나지만 영화 속 캐릭터들은 계속해서 또 다른 전투를 준비하며 살아갈 것이다.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전투가 시작된다’는 영화의 제목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