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鄕愁)를 불러일으키는 향수(香水)

Jasmins Marzipane Lancôme

by 송희운


지금까지 이야기한 향수와 관련된 대부분의 기억들은 나 스스로 몰랐던 나와 맞는 향을 찾게 되거나, 생각하지 못했던 향의 영역을 발견했을 때와 같은 좋은 기억들이다. ‘향’을 통해 나는 주로 기분이 전환되는 것을 많이 느껴왔기에 앞서 말한 향수들을 떠올릴 때는 대부분 기분 좋은 감정들이 함께 떠오른다. 그렇지만 내게 있어 유일하게 왠지 모를 서글픔을 불러일으키는 향수가 있는데, 랑콤의 자스민 마지팬 향수이다.



이 향수는 메종 랑콤 오뜨 퍼퓨머리 파리 컬렉션으로 2017년에 출시되었다. 투명한 유리병 한쪽에는 자스민 마지팬 오드 퍼퓸의 시그니처 성분이 유리 세공 기법으로 새겨져 있어서 바틀에서부터 고급스러움이 느껴진다. 이 향의 경우 우디 화이트 플로럴 계열로 분류되지만 우디의 느낌은 거의 느껴지지 않고 향수 이름에 전면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자스민 향이 가장 강하게 느껴진다. 바닐라 우드 노트, 삼박 자스민, 그랜디 플로럴 자스민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내게는 주로 구어망드의 달큰함과 자스민의 매혹적인 향이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포근하면서도 화려한 향이다 보니 봄이나 여름 같은 가벼운 계절보다는 가을, 겨울과 같은 쌀쌀해지는 계절에 따뜻한 느낌을 주며 뿌리는 것이 잘 어울리는 향이다.


이 향수도 아버지가 사다 주신 수많은 향수 중 하나이다. 이 향수가 내게 좀 더 특별하고 애틋한 이유는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사 오셨던 향수이기도 하고, 그 시기가 우리 집의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던 무렵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잠깐 힘든 시기는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풍족한 집안에서 부족함을 모르고 살아온 외동딸이었다. 그러던 중 이 선물을 받은 시기에 집안의 사정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랑콤의 이 향수는 한 병에 거의 20만 원 정도인 다소 값비싼 향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 그 향수를 사 오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향수는 전국 백화점 20개 매장에서만 판매되는 한정판이었다. 집안이 풍족했던 시절에는 20만 원이 그리 큰 금액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어려워진 환경에서 그 금액은 대체 얼마나 큰 금액이었던 것일까.


중성적인 향을 선호하는 나에게 우아하면서도 달콤함이 가득한 이 랑콤의 자스민 마지팬 향수는 사실 크게 매혹적인 향은 아니다. 게다가 발매된 지 8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보니 처음 선물 받았을 때의 향과 지금 내가 맡는 향은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향수의 유통기한이 지나고 어떠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쉽게 버리지 못할 것이다. 환경이 변해 우리 가족의 모든 사정이 달라져버렸고 예전과 같은 상황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지만 이 향수에 담긴 아버지의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달달하면서도 우아한 매력을 갖고 있는 이 향수(香水)가 내게는 서글픔과 애틋함이 뒤섞인 묘한 향수(鄕愁)를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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