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테이블> 속 우리가 만난 다양한 감정들에 대하여
※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하고 작성되었습니다.
※ 본 리뷰에는 <더 테이블>의 자세한 스토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다. 나의 내면 속에 어떤 것이 있는지 나 자신이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뻔뻔스럽게도 내 속을 휘젓다가 나중에 가서야 나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게 만든다. 정작 감정의 주인인 나는 가끔 그 느낌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겉으로 표출하고는 한다.
여기, 각자 다른 네 가지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감정에 대해서 정확하게 정의 내리지 않지만,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그것이 각자 어떤 감정이고 그 감정으로 인해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들의 입이 아닌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통해 드러난다. 그만큼 섬세하게 인물들의 감정을 다루는 이 영화는 바로 김종관 감독님의 <더 테이블>이다.
아주 오래전 한 단편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폴라로이드를 들고 마음에 담아 둔 사람을 찍기 위해 머뭇머뭇하던 소녀. 그 소녀의 감정을 세심하게 장면 하나하나마다 꾹꾹 눌러 담는 화면들. 이후 그 영화가 김종관 감독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수줍어하던 소녀는 바로 배우 정유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폴라로이드 작동법>이라는 단편 영화를 통해 김종관 감독님의 이름은 이내 내 뇌리 속에서 오래 남아 잊히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본 단편과 서른 살이 넘은 지금 다시 조우하게 된 감독님의 장편 영화. 네 가지 이야기를 하나의 영화 속에 담은 옴니버스 단편 영화 모음집이었지만, 십 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조우한 감독님의 영화는 내가 그때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감정의 층위들을 더욱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더 테이블>에는 네 가지 이야기가 존재하고, 네 가지 감정이 존재한다. 각 에피소드들은 테이블 하나를 놓고 두 명의 인물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감정들을 섬세하게 포착해낸다. 맨 처음 오프닝 화면에서 한 잔의 물컵 속에 어떤 물질들이 둥둥 떠다니는 모습들이 등장하는데, 이 조그만 흔적과도 같은 물질들이 부유하는 모습들은 마치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시각화한 것 같다. 영화는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네 가지 에피소드를 보여주고 한 카페의 한 테이블에서 오고 가는 감정들을 보여준다. 처음 등장한 에피소드들부터 그 감정을 이야기한다면 미련, 망설임, 슬픔, 아쉬움 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스타 배우가 된 유진과 그녀의 전 남자 친구 창석의 이야기이다. 스타 배우가 된 유진은 자신의 전 남자 친구 창석과 만나기로 하고 약속을 잡았다. 헤어지고 만난 그들의 대화는 상당히 어색하기만 하고, 갈피를 못 잡고 둥둥 떠다니기만 한다. 유진은 시간이 다 되어 일어나려고 하지만 창석은 그녀에게 연예계와 관련된 찌라시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하는데, 결국 그는 그녀에게 말로 상처를 주고 자신의 직장 동료들까지 불러 모아서 자신의 전 애인이 연예인이라는 사실을 과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그에게 화를 내지 못하고 그저 웃는 얼굴로만 대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불현듯 떠오른 감정은 바로 ‘미련’이다. 그것은 헤어진 뒤 이 사람을 잊지 못해서 오는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이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 행복했던 시간을 그리워하는 미련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노출되기 쉬운 창가 자리에도 묵묵히 앉아있었고,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는 요구에도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하룻밤을 함께 보낸 뒤 만난 경진과 진호의 이야기이다.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난 뒤, 진호는 훌쩍 여행을 떠나버렸고 그 뒤로 몇 개월이 지난 뒤 둘은 카페에서 재회한다. 서로에게 마음과 호감은 분명히 있지만 서로에게 어떤 터치나 간섭도 하기 어려운 애매한 상태. 그 둘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감정은 '망설임'이다. 서로에게 계속 정확하게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머뭇머뭇하게 되는 상태. ‘상대가 나를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 내가 이렇게 하면 상대는 어떻게 반응할까?’ 이런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의 마음속에 망설임만 남아서 그들은 서로를 향해 제대로 진전하지 못하다가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서로를 향해 한 발 더 다가선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결혼 사기로 만난 은희와 숙자이다. 진짜 결혼은 아닌, 가짜로 하는 결혼을 위해 만난 두 사람. 처음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계기는 가짜였지만, 대화를 진전시켜 나가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비밀을 하나씩 드러내면서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가짜로 만났지만 서로 진짜 같은 관계가 되어가는 그들. 이들 사이를 이어주는 감정은 '슬픔'이다. 딸을 잃은 엄마 숙자,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지만 진짜 부모님을 모시고 결혼할 수 없는 은희. 가장 친밀하다고 여겨지는 무언가를 잃은 그들은 서로 슬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지만 각자 다른 슬픔을 안고 있던 두 사람이 만나는 순간, 슬픔은 더 이상 슬픔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서로를 따스하게 감싸 안아주는 연결고리가 되어준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밤늦은 시간, 결혼을 앞둔 혜경이 자신의 전 남자 친구 운철을 만나는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결혼을 약속했지만, 자신의 전 애인을 만나 결혼하기 전까지만 만남을 이어가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혜경. 그런 혜경의 부탁을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제대로 거절하지도 못하는 운철. 서로 이미 끝난 관계이기 때문에 이 관계를 다시 시작하려고 하는 순간 그들은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서로 알고 있다. 이 두 사람 사이를 둥둥 떠다니며 서로를 향한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하는 감정은 바로 '아쉬움'이다. 이 아쉬움은 첫 번째 에피소드와 비슷하게 보이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지점이 있는데, 그것은 상대방 모두 완전히 이별의 순간이 왔음을 직감하는 어른의 연애로 끝난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네 개의 이야기가 시간 순대로 보이는 <더 테이블> 속 공통점은 인물들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테이블’과 그 위에 놓인 꽃이 있는 물컵뿐만 아니라 여자 캐릭터들을 비추는 아주 특별한 장면이다. 그 장면은 바로 그들의 뒷모습이다. 각 에피소드가 시작될 때마다 꼭 보였던 장면인데, 얼굴 정면이 아닌 바스트 샷 정도의 크기를 여성 캐릭터들의 뒷모습으로 보여준 뒤 그들의 얼굴과 제대로 된 이야기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때로는 사람의 얼굴 표정보다 그들의 뒷모습이 더욱 많은 감정을 보여주고는 한다. 얼굴은 눈, 입술, 미간, 눈썹 등 다양한 부위에서 정보를 얻기 때문에 그 감정을 오롯이 느끼기 힘든 경우가 있는데 오히려 뒷모습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감정을 더욱 직관적으로 전달할 때가 있다고 해야 할까. 그렇기 때문에 각 에피소드가 시작될 때마다 보이는 그녀들의 뒷모습은 그 에피소드를 대표할 만한 감정들을 드러내 보인다.
에피소드들 속 인물들이 차마 말로 정의 내리지 못하고 본인과 타인 사이에서 떠다니거나 침전하는 감정들은 그들이 시킨 음료를 통해 보이기도 한다. 종류가 완전히 다른 에스프레소와 맥주를 시키고, 서로를 마주 보고 어색해진 상태에서 초콜릿 무스 케이크를 자른다든지, 서로 같은 종류의 라떼를 시켰지만 한 사람은 설탕을 넣고 한 사람은 설탕을 넣지 않는다든지, 이미 내려져있는 커피와 메뉴가 나온 뒤 우려내야 하는 홍차를 시키는 등등등 각각의 메뉴들은 각 인물들의 성향을 드러내면서도 그 인물들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그 인물의 상태가 어떤지 인물들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대신 전해준다. 예전 감독님의 단편 영화 속에서 폴라로이드를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렸던 소녀가 어느새 커버려서 여러 가지 삶의 다양한 층위들을 겪고 난 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느낌이랄까. 감독님의 폴라로이드는 더욱더 많은 세계에서 더욱더 많은 감정을 갖고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네 편의 에피소드가 끝이 나면 여러 이야기가 오갔던 카페도 문을 닫는다. 이들의 이야기는 이미 끝났지만, 우리가 느꼈던 이들의 감정들은 그들의 있던 공간에, 그들이 있던 그 자리에 잔잔하게 남아있다. 글의 첫 부분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감정이라는 것은 때로 사람의 마음을 막 휘저어 놓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의 마음에 조용히 남아 그 감정의 온기를 느끼게 하기도 한다. <더 테이블>은 여러 사람들의 짧은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그들의 감정을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금방 지나쳐버리고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감정의 여러 얼굴들을 보여주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너무 바쁘게 돌아가고 빨리빨리 정리해야 하고 순간적인 재미만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가끔은 카페에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 마음속에서 둥둥 떠다니거나 침전하는 감정들을 느껴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참으로 김종관 감독님의 영화는 여전히 따뜻한 동시에 더욱더 깊고 진해졌다.
+ 덧,
한국영화에서 오래간만에 오프닝에 투자 크레딧 없이 봐서 너무 좋았다. 투자한 사람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영화를 직접 만든 사람들의 크레딧이 더 중요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 덧 2,
김혜옥 배우님의 클로즈업이 개인적으로 너무 좋았다. 한국영화에서 이렇게 중년 여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준 적이 언제였을까. 기억나는 건 박찬욱 감독님의 <박쥐>에서 김해숙 배우님의 클로즈업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