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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룰 수 없기에 아름다운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니다.

<시인의 사랑> 속 꿈 같은 ‘시인’의 사랑에 대하여

by 송희운

※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하고 작성되었습니다.

※ 본 리뷰에는 <시인의 사랑>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꿈이란 무엇일까. 가끔 꿈이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이룰 수 없기에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한다. 하지만 꿈을 더 이상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그 꿈을 계속 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 일평생 자신의 제대로 된 욕망조차 만나지 못했던 한 시인이 있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시인은 이따금 자신의 시를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거나 아니면 아이를 갖고 싶다는 아내의 욕망(?)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게 전부이다. 그러던 시인에게 어느 날 한 가지 꿈이 생긴다. 우연히 한 입 먹고 완전히 반해버린 도넛 가게의 소년이 바로 그의 꿈이자 욕망의 대상이다. 진짜 시를 쓰는 것이 무엇일까 매일 고민하던 그에게 소년은 영감이 되어주고, 그의 삶에 생동력을 불어넣는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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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꿈은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사랑은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것이고 그의 열망이 더해져 갈수록 그는 가장으로서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에 짓눌리게 된다. 사실 <시인의 사랑>을 보면서 처음 느꼈던 감정은 남성으로서 시인으로서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는 그에 대한 측은함이 아닌 분노였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항상 스스로 움직여서 선택을 할 수 없는 위치였다. 그가 인생 속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던 선택지는 아마도 ‘시인’이라는 직업이 유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의이거나 타의이거나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삶의 궤도에 오르는 순간, 그 삶을 계속해서 살아나갈 책임이 생긴다. 자신의 좋던 싫든 간에 그 삶에 대해 책임이 생기는 것이다. 만일, 그 삶을 정말 거부하고 달아나고자 했다면 어떠한 결과를 감수하고서라도 또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어른’이란 존재에 대한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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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인은 그러하질 못했다. 항상 나 자신의 욕구보다는 다른 이의 욕구에 충실해야만 했고, 자신이 제일 좋아하고 원하던 세계 속에서는 진정한 시인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아직도 자신의 껍질을 깨지 못한 풋내기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처음으로 열망했던 존재에 대해 누구보다도 강학 애착과 강렬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큰 의문점이 들었다. 왜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을 온전히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애썼는지. ‘재능도, 돈도, 심지어 정자마저 없다’는 시놉시스의 문구처럼 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중년 남성으로서 그가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받을 때는 자신의 아내와 관계를 맺을 때이지만 그마저도 신통치 않다. 이런 그가 다른 어떤 테두리나 굴레도 쓰지 않고 온전한 자신의 존재로 만날 수 있는 것이 ‘소년’이다. 아직 어리고, 세상의 수많은 이해관계에 귀속되지 않는 소년의 순수함은 그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름다운 피사체의 모습에 시인은 매료되었고 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싶고, 그에게 더욱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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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용인받는 것을 떠나서 나는 시인의 ‘나태함’에 화가 났다. 영화 속에서 이런 대사가 있다. 시가 왜 필요하느냐는 질문에 “시인은 세상의 슬픔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이때 아이는 이렇게 묻는다. “그럼 시인이 슬플 때는 어떻게 해요?” 시인이란 것은 세상의 슬픔을 시로 대신 울어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슬픔을 시를 통해 흘려보낸다. 하지만 정작 ‘시인’은 어떠했는가. 스스로의 감정과 상황의 굴레에 갇혀 그는 자신의 슬픔을 온전히 직면하는 것을 포기했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감정을 배출해냈다. 결국 그는 시로 울지 못했고, 아무런 껍데기도 걸치지 않은 자신의 본질을 마주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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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감정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깨달은 시인은 자신이 안주하고 있던 현재에서 벗어나 조금 더 깊은 차원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정말로 사랑했던 소년이었기에 소년이 자신의 엄마에게조차 부정당할 때 그를 위해 나서 주고, 그를 위해 대신 슬픔과 분노를 표현해준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스스로가 이야기했던 진짜 ‘시인’이 된 것이다. 스스로조차 초라하다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을 직면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를 의지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지만 어찌 되었던 그의 사랑은 그를 한층 더 성숙시킨다. 처음으로 자신이 선택했지만, 그 선택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시인은 자신의 사랑과 슬픔과 욕망을 흘려보낸다. 그는 세상의 현실 속에서 아내와 함께 아이를 낳는 데 성공하고, 그토록 계속 꿈꿔왔던 시인으로서의 성공도 이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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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차례의 사랑은 그를 조금 더 깊은 세상 속으로 끌고 들어온다. 사랑이라는 방패 속으로 자신의 몸을 숨겼지만, 그 사랑이 자신을 숨겨줄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 그 앞에서 시인은 자신의 슬픔을 시로 표현하는 대신, 자기 안으로 삼키는 법을 배운다. 영화의 마지막 무렵 즈음에서 시인은 아이의 잠든 모습을 보고 행복해하면서 아이의 얼굴에 뽀뽀를 한다. 하지만, 다시 자리에 앉은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의 슬픔은 햇빛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평화로운 영화 속 화면과 어울려 미묘한 부조화를 자아낸다. 화면 속에서 내내 부유하며 자리를 찾지 못하고 떠돌던 감정들은 엔딩에 이르러서야 안착한다. 한 때 시인과 소년이 서로의 마음을 나누었던 아무도 찾지 않는 텅 빈 수영장. 두 사람은 대화를 하고 있지만, 두 사람의 감정은 서로에게 흡수되지 못한다. 사랑하지만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관계. 서로 상충되던 감정은 서로를 향해 폭발하게 되고, 서로의 관계 끝에 이르러서야 각자 안으로 온전히 흡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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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룰 수 없던 꿈에서 깨어난 순간, 사람들은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어떤 이들은 그 꿈에서 깨는 순간 그것이 죽음이라고들 이야기하고, 어떤 이들은 그 꿈에 깨어나는 순간 이전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다고들 이야기한다. 시인에게 꿈은 무엇이었을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에게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하게 했던 것이었을까, 이제 그만 철이 들어야 한다는 ‘호접지몽’이었을까. 내가 시인에 느꼈던 감정이 다른 사람들이 느꼈던 감정과 달랐던 것처럼, 시인의 꿈에 대한 감상은 받아들이는 이들 모두가 각기 다른 종류의 감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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