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심할 수 없는 관찰자의 향

펜할리곤스 미스터 톰슨

by 송희운


처음 이 향을 맡은 건 작년 가을쯤이었다. 지인의 선물을 사기 위해, 평소 궁금했지만 한 번도 사보지는 못했던 펜할리곤스 매장을 찾았다. 펜할리곤스에서 가장 유명한 포트레이트 시리즈를 하나씩 맡아보던 중 가장 특이한 병 모양의 향을 맡아보게 되었다. 처음 향을 맡은 순간 그 향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 향수의 이름은 바로 ‘미스터 톰슨’. 그 당시에는 내 선물이 아닌 지인의 선물을 사기 위해 갔던지라 마음속으로만 그 이름을 새겨놓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던 중 친구와 함께 다시 찾아간 매장에서 이제 그 향수가 완전히 단종되어 버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니치 향수인 만큼 가격대가 있다 보니 고민을 했지만, 마침 생일 기간이 다가온지라 과감하게 미스터 톰슨을 들이기로 했다.


왼쪽 이미지 출처 : 펜할리곤스 공식 스마트 스토어


포트레이트 시리즈는 향수병마다 저마다의 캐릭터가 부여되어 있는데, 미스터 톰슨의 상징은 코끼리이고 그 정체는 스파이이다. 포트레이트 시리즈의 복잡한 가계도 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포트레이트 향수에는 각 향수마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는데, 미스터 톰슨 박스의 뒷면에도 그의 숨겨진 이야기가 적혀 있다.


전지전능한 미스터 톰슨
-혹은 염탐의 기술에 대하여-

덧없이 스쳐 가는 그림자 같지만 할아버지 시계처럼 믿음직한 존재.
톰슨은 염탐이라는 어두운 예술의 대가다. 그는 이를 ‘은밀한 관찰’이라 부르길 선호하지만.

정보를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그의 직업의 핵심이다.
그는 마치 목동이 하늘을 읽듯 가족 내의 드라마를 읽어낸다.

여섯 번째 감각으로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비가 오기 전에 대비하라.”
그의 좌우명이다.

영국 귀족 사회는 솔직한 대화로 명성을 얻은 적이 없고
그래서 늘 그 불길한 짐승, ‘방 안의 코끼리’가 존재한다.

톰슨은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예견하거나, 혹은 때로는 모른 척해야 한다.
그는 사회적 암호를 해독하는 대가 중의 대가다.

그가 없다면 모든 것은 먼지처럼 무너져 내릴 것이다.
알다시피, 어떤 벽들은 끔찍할 만큼 얇으니까.”



코끼리 모양으로 조각된 뚜껑을 열고 착향 해보면 가장 먼저 바닐라가 느껴진다. 하지만 이 바닐라는 우리가 평소에 먹던 바닐라 아이스크림에서 느껴지던 마냥 달달한 바닐라가 아니다. 달콤함보다는 바닐라 빈의 쌉쌀함이 결합된 부드러움에 가까운 느낌이다. 이 바닐라가 조금 더 특별한 이유는 바닐라와 같이 결합되는 향들 때문이다. 탑 노트에 있는 라벤더, 미들 노트에 있는 오리스(아이리스 뿌리로 만든 원료)와 결합하여 파우더리 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을 준다. 라벤더는 사실 날카로우면서도 차가운 느낌을 줄 때도 있는데, 바닐라와 라벤더가 결합하면서 서로의 향을 더욱 우아하게 만들어준다.


여기서 미스터 톰슨의 향이 끝난다면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스터 톰슨이 갖고 있는 정체성인 스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핑크 페퍼와 블랙 페퍼가 살짝 올라오면서 어딘가 모르게 방심할 수 없는 비밀스럽게 톡 쏘는 느낌을 준다. 분명 우아하고 성숙한 향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차분하고 절제된 향 구성은 아닌 듯하다. 스파이가 갖고 있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면이 미스터 톰슨 한 병에 담겨 있다.



미스터 톰슨의 향 구성에서도 가장 독특한 향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참깨이다. 향수에서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이 참깨가 베이스 노트에서 은근하게 느껴지며 고소함으로 복잡 미묘한 향을 단정하게 마무리해 준다.


1870년대 런던에서부터 시작된 펜할리곤스는 영국 왕실 조향사를 지낸 브랜드이다. 그래서 그런지 향에서도 우아한 귀족의 느낌을 자아낸다. 흥미로운 지점은 단순히 귀족의 우아함만이 아닌 귀족 사회 내부에서 여러 가지 다채로운 모습들을 인간적으로 풀어낸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펜할리곤스의 향들은 우아하지만 전형적인 틀을 따라가지 않는다.


2023년 발매된 이 향수는 이제 곧 단종의 길로 들어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른 얼굴로 위장했던 스파이가 이제는 정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 향수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굉장히 아쉽지만, 나의 장식장과 기억 속 보관소에서만큼은 절대로 사라지지 못할 강렬한 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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