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절된 여성의 신체, 파괴된 ‘여성성’이라는 허상

<리벤지>와 <서브스턴스>

by 송희운

※ <리벤지>와 <서브스턴스>의 결말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2024년, 국내에서 코랄리 파르자 감독의 <서브스턴스>가 개봉하였다. 호러 마니아층에서는 상당히 기대하고 있던 영화였으나, 일반 대중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소재가 아니었기에 흥행 측면에서 크게 기대받던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브스턴스>는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총 관객 56만 명을 기록하면서 역주행의 신화를 이뤄냈다. 한국에서 흥행하기 어려운 바디 호러 장르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수위 높은 묘사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관객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여성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코랄리 파르자 감독의 <서브스턴스>를 논하기 위해서는 감독의 전작인 <리벤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작품은 모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각자 다른 방식으로 여성성의 본질을 파헤친다. 그렇기에 두 영화는 초반에 미디어 속에서 여성이 어떤 식으로 묘사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리벤지>에 등장한 젊고 어린 여성인 '젠'은 애인의 사냥 여행에 따라왔지만, 애인의 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이 일을 애인의 아내에게 말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다가 사막에서 등을 떠밀려 살해당한다. 이 장면이 일어나기 전까지 젠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남성들의 욕망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분절화된 화면 속에서 그녀의 성적 매력을 드러낼 수 있는 엉덩이, 가슴만이 파편화되어 잡힌다.

이러한 맥락은 <서브스턴스>에서도 동일하게 재현된다. 과거 스타로 이름을 떨쳤지만, 나이를 먹고 자신의 쇼에서도 쫓겨난 엘리자베스. 그녀는 다시 젊고 아름다워지기 위해 서브스턴스 약물을 맞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수’가 된다. 수가 처음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 카메라는 그녀의 얼굴을 처음으로 비추는 것이 아니라 수영복이 착 달라붙은 엉덩이를 제일 처음 보여준다. 이뿐만 아니라, 수가 에어로빅 쇼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카메라는 하나의 완성된 신체가 아닌 신체 구간 하나하나를 분절시키고 파편화하여 보여준다. 특히 수의 입술만 클로즈업된 채 TV 화면 여러 개에서 동시에 송출되는 장면은 여성의 신체가 미디어 속에서 얼마나 섹스어필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지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대표 장면이다. 카메라가 절단시킨 여성의 신체는 욕망을 위한 관음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며, 끝없이 소비되는 자본주의의 굴레에 깊게 빠진다.

여성의 신체를 바라보는 시선의 이동

코랄리 파르자 감독은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여성의 신체에 대한 시선을 이동시킨다. <리벤지>에서 복부가 관통하는 치명상에도 불구하고 젠은 살아남는다. 젠은 자신의 배를 뚫은 나뭇가지를 쓰러뜨려 빠져나오고 현장으로 돌아온 애인과 애인 친구들의 눈을 피해 숨는다. 여기서 나뭇가지가 젠의 배를 관통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녀의 배에 뚫린 나뭇가지는 젠을 바라보는 영화 속 남성들의 시선을 대변한다. 젊고 아름다운 젠은 흔히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남성의 액세서리이자, 남성들의 시선을 뺏는 캐릭터로서 초반에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남성들의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하던 젠은 성폭행까지 당한 뒤, 사막 절벽에서 떨어져 밑에 있던 나무에 자신의 몸을 뚫리고 버려진다.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그녀는 결국 그 시선으로 인해 상해를 입었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목숨까지 잃을 뻔한 것이다. 젠의 배에 꽂힌 나뭇가지는 남성들의 시선으로 인해 여성들이 얼마나 크게 위협받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낄 수 있는지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한 명을 처리한 젠은 자신의 배에 뚫린 나뭇가지를 고통스럽게 뽑아내 치료하고 살아남아 남은 두 명에게 복수를 시작한다. 젠이 사냥꾼으로 변화하는 시점부터 영화는 시선을 전환한다. 젠의 모습은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하던 시절과 비슷한 옷차림이지만, 카메라는 더 이상 젠을 관음의 대상으로 비추지 않고, 젠이 어떠한 방식으로 복수를 행하는지 관객들이 지켜보게 만든다. 사실 영화 초반 관객들은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성폭행 사건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는 의도된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 남성들과 동일하게 젠을 바라보던 관객들은 후반부 시선의 전환을 통해 지금까지 미디어에서 재현된 여성의 신체를 바라보는 방식이 얼마나 기괴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젠은 폭력의 객체로만 머무르며 타인의 구원을 바라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 처단자가 된다. 젠이 남성들을 처단하는 모습은 판타지적으로 재현되지 않고, 상당히 처절하게 재현된다. 젠은 매 순간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남성들을 하나씩 처리하고 복수하는데, 이러한 처절한 복수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젠의 모든 순간을 함께하는 목격자가 된다.


시선의 전환은 <서브스턴스>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드러나며, <서브스턴스>의 후반부는 <리벤지>의 후반부보다 훨씬 더 극적이고 장르적이다. 실수로 자신의 본체인 엘리자베스를 죽여버린 수는 새해전야쇼가 시작되기 전 자신의 신체가 붕괴될 위기에 놓이자 엘리자베스처럼 서브스턴스 약물을 주입한다. 그 결과 끔찍한 몬스트로 엘리자수가 탄생한다. 엘리자베스는 미디어의 폭력에서 억압되었던 인물이었다. 한때 잘 나갔던 인물이라는 영광의 휘황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녀는 자신의 젊은 시절 영광을 되찾기 위해 서브스턴스 약물을 주입받고 새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점점 수에게 자신의 실제 삶을 빼앗기자 그녀는 수를 없애버릴 생각까지 하지만, 항상 주목받던 과거의 삶을 잊지 못해 점점 수에게 자신의 삶을 잠식당한다. <리벤지>에서 여성이 어떻게 폭력의 시선에서 벗어나 폭력의 주체가 되는지를 보여준다면, <서브스턴스>는 이러한 폭력의 시선에서 어떻게 여성이 분열되는지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름다운 여성의 몸에서 끔찍한 괴물로 변화하는 모습은 새해전야쇼를 관람하는 관객들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도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여성의 성적인 아름다움만 비추던 시선은 그 시선으로 인해 해체된 여성의 신체가 괴물로 변한 것을 보여주면서 괴물이 된 여성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여성을 대상물로만 비추던 시선이 대상의 형태 변화에 따라 어떻게 태도가 바뀌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이다.

전시되는 공간 혹은 그 전시를 파괴하는 공간


<리벤지>에서 젠이 처음으로 애인과 함께 있었던 고급 하우스는 모든 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진 공간처럼 보이지만, 이 공간은 젠의 신체를 전시하기 위한 공간으로서 기능한다. 젠은 그곳에서 욕망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고 인격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 애인과의 밀회를 즐기는 공간처럼 보였지만, 사실 애인과의 밀회가 아닌 그저 젠의 아름다운 신체만 보이기 위한 공간이었고, 젠은 그곳에서 애인의 친구에게 성폭행까지 당한다. 그 사실을 애인에게 알려도 애인은 젠을 제대로 보호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젠은 고급스러운 통유리창으로 된 전시장에서 전시되면서 남성들에게 상품으로써 소비될 뿐이다.



<리벤지>의 고급 하우스처럼 드넓은 전시 공간은 <서브스턴스>의 엘리자베스가 사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엘리자베스가 사는 고층 아파트에도 통유리창으로 된 거실이 있다. 처음 엘리자베스가 서브스턴스를 맞기 전에 그녀는 그 공간에 홀로 고독히 남아있었지만, 서브스턴스를 맞고 수로 태어난 이후에는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드러내며,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전시한다. 창문 밖 수의 에어로빅쇼를 광고하는 거대 간판은 스스로 전시되는 수의 모습을 거울처럼 반사한다. 아파트의 거실 유리창은 텔레비전의 스크린과도 같은데, 가상의 스크린 속에서 수가 보이지 않는 관객들을 위해 자신만의 쇼에 참여할 때마다 수의 신체는 끊임없이 분절된다.

다시 <리벤지>로 되돌아가보자. 겨우 목숨을 건지고 살아남은 젠은 야생의 황무지에 버려졌다. 하지만 오히려 이 공간은 젠이 처음에 있었던 고급 하우스보다 그녀에게 안전해 보인다. 그곳에서는 자신의 신체를 탐하거나 자신을 짓밟는 남성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 황무지에서 젠은 자신을 죽이려고 한 남자,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 자신의 성폭행을 방관했던 남자를 하나씩 차례차례 사냥하여 자신의 복수를 완성한다. 젠은 자신을 대상물로서만 바라보던 시선들을 직접 찾아가 하나씩 처단하면서 그 시선 자체를 완전히 봉쇄해 버리고, 황무지라는 사냥터를 자신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서브스턴스>에서 수가 그토록 고대하며 준비했던 새해전야쇼는 여성의 신체를 전시하는 거대한 전시장이다. 몬스트로 엘리자수의 신체가 파괴되기 전 그녀가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 올라갔던 무대에 서 있던 여성 댄서들은 모두 상의를 탈의한 채 가슴을 드러내고 있다. 관객들은 끔찍하게 변한 괴물을 두려워하지만,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상품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여성 댄서들을 어린 여자 아이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개의치 않는다. 이는 여성의 성상품화를 목격한 어린 여자 아이가 또 다른 희생자가 될 것임을 암시한다. 미디어는 남성들의 돈을 소비하기 위해 여성의 신체를 전시하고 다시 모인 자본으로 여성의 신체를 더욱 노골적이고 자극적으로 전시한다. 이는 기 드보르가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언급한 ‘스펙타클은 하나의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이라는 말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듯하다. 남성들의 돈을 위해 여성들은 객체로 전락하며, 여성의 신체 자체가 거대한 스펙타클이 되어 관객들을 다시 자극한다.

<서브스턴스>에서는 안전한 공간 자체가 없어져버린다. 엘리자베스의 집뿐만 아니라, 방송국, 서브스턴스를 구하는 장소 등 모든 공간에서 엘리자베스는 어떤 시선에 시달린다. 자신의 집에서는 더 이상 자신이 매력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방송국에서는 자신이 메인으로 있었던 쇼에서 쫓겨나고, 서브스턴스를 구하는 장소에서는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까 괴로워한다. 영화가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마지막 순간, 새해전야쇼라는 무대에서 모든 시선의 전시를 파괴해 버린다. 몬스트로 엘리자수의 팔이 절단되고 그 팔에서 피가 뿜어져 나올 때 방송국의 관객들은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에서 객체로 역전된다. 그들이 욕망의 대상을 바라보던 시선은 몬스트로 엘리자수의 피분수에 의해 파괴되며, 몬스트로 엘리자수가 오히려 자신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뒤바뀐다. 그와 동시에 타인의 욕망에 의해 절단되던 수의 신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엘리자베스와 수가 끔찍하게 뒤섞여버린 새로운 신체는 생성과 파괴를 동시에 이뤄낸다. 마치 고깃덩이와도 같이 파편화되었던 신체가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방송국 세트장에 있던 관객들은 스크린 밖에 있는 관객과 동일한 위치에 놓인다. 은밀하게 여성의 신체를 관음 하던 시선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전혀 다른 범주의 괴물에게 시선을 빼앗긴다. 무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분수는 관음증적인 시선을 파괴하며 그 시선을 반사시켜 버린다.

음식물처럼 섭취되고, 스스로 고깃덩이가 되는 여성의 신체

시선과 공간 속에서 소비되던 여성의 신체는 이제 섭취라는 행위로 소비된다. <리벤지>에서 젠이 애인의 친구에게 성폭행당하기 전, 다른 친구가 잠깐 방 앞에 서 있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서 문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자신이 먹던 과자를 입안으로 넣어 씹어 먹는다. 영화는 이 장면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하여 그 남자의 이빨이 찐득한 캐러멜이 들어 있는 초콜릿 과자를 씹어 먹는 장면을 느린 속도로 보여준다. 이 장면 속에서 초콜릿 과자는 남자의 이빨에 무참히 부서지는데, 이는 명백히 젠의 처지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젠은 타인이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고 그렇게 젠은 인격적으로 무참히 짓밟혀 버렸다.


음식으로 표현된 젠의 처지는 <서브스턴스>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하비와 엘리자베스가 식당에서 밥을 먹는 장면에서 여성을 음식으로 표현하는 묘사는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하비가 먹는 새우는 하비의 손에 의해 껍질이 갈가리 찢겨 나가고, 하비는 그 새우를 세상에서 가장 추잡스러운 방식으로 먹는다. 엘리자베스가 ‘50대가 되면 뭐가 끝나냐’고 물어보는 질문에 하비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자신의 손에 있는 새우를 흔든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 엘리자베스의 모든 상황이 설명된다. 50대가 되어 소비될 가치가 없어진 엘리자베스는 하비의 손에 있는 새우처럼 섭취할 수 있는 대상에서 제외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껍질 하나하나 벗겨졌지만, 이제 나이가 먹고 성적인 매력이 감소했다는 이유로 엘리자베스는 그 세계에서 추방당하는 것이다.

<서브스턴스>에서 먹는다는 행위는 여성의 신체를 음식물처럼 치환하여 남성에게 섭취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여성의 신체 그 자체를 고깃덩이와도 같이 만들어버린다. 서브스턴스 약물을 주입받고 극렬한 고통에 시달리던 엘리자베스의 등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새롭고 젊은 육체를 지닌 수가 태어난다. 이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임신과는 정반대의 대척점을 지니는 탄생이다. 여성의 배에서 만들어진 생명과 반대편에 위치한 여성의 등을 통해 태어난 수의 모습은 온전한 상태의 탄생이 아닌, 억지로 만들어진 기괴한 생명임을 시사한다. 이 장면에서 엘리자베스와 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의 몸으로 있는다. 등이 반으로 갈라진 엘리자베스를 뒤로 하고 새롭게 탄생한 수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보고 감탄하는 장면은 남성들이 여성의 신체를 바라보는 시선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며, 미디어에서 버려졌던 자기 자신이 결국은 미디어의 소비세계로 다시 편입될 수 있음을 기뻐하는 것과도 같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과거 영광을 위해서는 다시 미디어 앞의 고깃덩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빛나는 순간을 위해서 폭력의 굴레에 다시 들어가 아름다운 수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수가 아름다워질수록 엘리자베스는 더 늙고 추레해지며, 이는 수와 엘리자베스의 간극을 더욱 좁힐 수 없게 만든다. 수는 엘리자베스의 환상이며 그 환상이 더욱 밝고 선명해질수록 현실 속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더욱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특히 수를 연기한 마가렛 퀄리가 미디어 속에서 묘사되는 여성들의 몸처럼 보이기 위해 가슴보형물을 덧대어 촬영했다는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여성의 몸 자체가 있는 그대로의 몸으로 비치는 것이 아닌 마치 고깃덩이처럼 이리저리 재단되고 소비되는 현실을 영화 바깥에서도 드러내 보인다.

<리벤지>, <서브스턴스> 이 두 영화는 보고, 먹는다는 원초적인 행위를 통해 여성의 신체가 얼마나 저급한 방식으로 미디어와 사회 속에서 소비되는지 드러낸다. 두 영화 모두 결말을 향해 다가가며 여성성을 전복시키는데, 이를 통해 미디어와 사회가 주장해 왔던 여성적이라는 환상은 철저히 파괴되고 해체된다. <리벤지>와 <서브스턴스>는 여성성이라는 허상을 비슷한 방식으로 조망하지만, 완전히 파괴된 여성성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 <리벤지>는 폭력의 대상물로 존재했던 여성을 폭력을 행하는 집행자로 만든다. 남성들은 자신들이 사냥꾼으로서 젠을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믿지만, 젠은 그들을 뛰어넘는 폭력의 수위를 보여주며 성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나약한 여성성이라는 것을 완전히 파괴시켜 버린다.

<서브스턴스>에서 관음의 대상으로 존재하던 여성의 신체는 오히려 더욱 극단적인 방향으로 파괴된다. 엘리자베스가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인 수에서 가장 추악한 괴물인 몬스트로 엘리자수로 다시 태어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몬스트로 엘리자수가 모두의 시선이 주목된 상태에서 입으로 토해내는 가슴 부위는 미디어가 얼마나 가슴 부위를 극단적으로 분절시키는지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이를 끔찍하게 여기고 두려워하는 관객들을 통해 여성 신체를 미디어가 소비하는 방식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몬스트로 엘리자수는 엘리자베스와 수의 잘못된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였지만, 궁극적으로는 미디어가 여성의 신체를 성상품화하여 만들어낸 괴물이었다. 철저히 파괴된 신체는 결국 부서져 버리고, 피범벅이 된 시체에서 엘리자베스의 얼굴 부분만 살아남는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별이 새겨져 있던 바닥 위로 올라가 스노볼 속 반짝이를 맞는 환상 속에서 죽고, 다음 날 그녀가 남아 있던 핏자국은 청소부에 의해 깨끗이 지워진다. 존재 자체로 추한 괴물이 되었던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그토록 꿈꿔왔던 주목받고 모두에게 칭송받는 삶을 자신의 환상과 역전된 형태로 이뤄낸다.



<서브스턴스>는 특히 엘리자베스를 연기한 배우가 데미 무어라는 점에서 더욱 큰 상징성을 지닌다. 할리우드의 간판스타이자 섹시 심벌이었지만, 연기력으로 크게 인정받지 못했고, 젊은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전신 성형으로 몸을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루머에 휩싸였던 데미 무어. 현실에서 그녀의 모습은 엘리자베스와 완전히 동화되어 영화 안팎으로 큰 상징성을 지닌다. 가십거리로 등장했던 배우가 연기하는 엘리자베스를 통해 영화 속 여성의 신체에 대한 성상품화는 철저히 파괴되어 미디어가 그려온 여성성이라는 것은 결국 환상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내 보인다.

코랄리 파르자 감독의 두 영화는 여성의 신체가 타인의 욕망 속에서 얼마나 폭력적으로 소비되는지를 드러내고 이를 극단적으로 뒤집어 보여주면서 미디어가 감춰온 진실을 드러낸다. <리벤지>가 여성을 억압했던 남성의 폭력을 전복시키면서 욕망의 주체를 처단하는 과정에 집중한다면 <서브스턴스>는 성상품화된 여성 신체 자체를 파괴함으로써 여성성이라는 극단적인 무(無)를 드러낸다. 아름다움이라는 명목으로 타인의 시선 아래 전유되었던 여성의 신체는 완전히 해체되고, 서로 다른 전복을 통해 미디어가 생산해 왔던 여성성이 결국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여성성이라는 허상’을 스릴러, 공포 장르의 전형 속에서 폭로한 코랄리 파르자 감독이 앞으로 어떤 장르 속에서 기존의 여성성을 파괴하고 새로운 여성의 모습을 피워낼 것인가? 그 이후의 상상력은 우리의 몫이지만, 분명한 것은 앞으로 관객들은 스크린 속 재현된 여성성이라는 허상에 더 이상 기만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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