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 여성 캐릭터라는 새로운 범주

<직장상사 길들이기> 단평

by 송희운

※ 이 리뷰는 <직장상사 길들이기>의 엔딩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샘 레이미 감독이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이후로 4년 만의 신작으로 돌아왔다. 원제는 <Send Help>로 구조 요청을 의미하는 제목이지만, 국내에서는 <직장상사 길들이기>라는 다소 귀여운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는 자칫 직장상사와의 로맨스를 기대하기 쉬워 보인다. 하지만 감독인 샘 레이미의 이름을 잊으면 안 된다. <이블 데드>, <드래그 미 투 헬> 등 B급 호러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만큼, 이번 작품에서도 그의 장기는 단연 돋보인다.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직장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조롱거리로 전락한 린다가 어느 날 새로 취임한 대표인 브래들리와 함께 태국으로 해외 출장을 가던 중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인근 무인도로 추락한다. 아무것도 없이 고립된 무인도에서 린다는 자신이 갖고 있던 생존 지식을 총동원하여 살아남기 시작하고, 다리를 다친 브래들리는 린다의 보살핌을 받는다. 앙금이 있던 두 사람은 무인도 생활을 하면서 서로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인도를 나가고 싶어 하는 브래들리와 무인도를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린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며 두 사람의 관계를 파국을 향해 치달아 가기 시작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아무것도 없이 아름답지만 고립된 무인도에 성인 남녀가 남아 있다는 설정은 자칫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쉽다. 하지만 샘 레이미 감독은 이러한 모든 클리셰를 부숴버린다. 생존에 강하다고 여겨지는 남성이 아닌 린다라는 여성 캐릭터가 생존에 대한 모든 지식을 갖고 있고, 그 지식으로 남녀의 관계성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점이 굉장히 흥미롭다. 린다는 능력 있고 재능도 있지만, 비호감적인 외모와 행동으로 인해 회사 내부에서 제대로 된 취급을 받지 못한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공을 빼앗기고, 심지어 승진조차 하지 못한 채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회사에서 브래들리와 린다는 대표와 부하 직원이라는 명백한 상하 관계에 위치한다. 하지만 회사를 벗어나 생존과 직결된 무인도로 배경이 바뀌자 이들의 관계는 반전된다. 린다의 대사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한평생 ‘복종(Submission)’이라는 관계에 서본 적 없던 브래들리는 린다의 도움 없이는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여전히 관계의 우위를 점하고 싶어 하지만, 무인도에 대한 거의 모든 생존 지식을 갖고 있는 린다에게는 당해낼 수 없다.



이 영화의 묘미는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역전되는지에도 있지만, 미친 여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레이챌 맥아담스의 연기를 보는 데에도 있다. <노트북>과 <어바웃 타임>, <서약> 등과 같이 로맨틱 코미디, 멜로 등에서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여성을 연기해 온 레이챌 맥아담스는 이전 영화에서 봐왔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광기 어린 모습 그 자체이다.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 슬픔을 가진 광기 어린 여성이라는 스칼렛 위치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묘사해 낸 샘 레이미 감독은 레이챌 맥아담스라는 배우를 통해서 광기 어린 여성의 또 다른 범주를 보여준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 여성이 멈추지 않고 끝까지 갔을 때의 모습을 B급 호러의 정서에서 녹여낸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움을 주로 연기했던 배우가 피분수를 뿜어내며 멧돼지를 잡는 데 성공하고, 남성의 얼굴에 구토를 해대고, 이 남성에게 두피가 벗겨지고 눈이 파이는 공격을 받으며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모습은 신선함을 넘어선 충격에 가깝다. 이미 과거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서 레지나 조지를 연기한 바 있던 레이챌 맥아담스는 광기 어린 여성의 욕망을 처절하면서도 매력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과거 <드래그 미 투 헬>에서 한 젊은 여성이 어떻게 피해를 입고 그 피해로 인해 지옥에까지 이르는지를 보여줬던 것을 전복해서 보여주는 듯하다. 자신에게 닥친 저주를 벗어나기 위해 도망만 치고 애쓰는 여성의 모습이 아닌, 스스로 재앙처럼 변모하여 자신을 억압했던 것들을 모두 처리해 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며 종국에는 원하는 모든 것을 쟁취하는 여성 캐릭터의 모습. 특히 마지막 엔딩에서 린다의 모든 행동을 알고 있는 관객들과 린다의 의미심장한 눈빛이 마주칠 때 관객들은 윤리적 규범을 벗어난 그녀의 악행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가 진정한 ‘생존자’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국내에서는 15세 관람가를 받았지만 해외에서는 R등급을 받은 만큼 과격하고 다소 더러운 묘사는 관람하기 쉽지 않을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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