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넷> 단평
※ 이 리뷰는 <햄넷>의 엔딩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클로이 자오 감독이 <이터널스> 이후 4년 만에 <햄넷>으로 돌아왔다. <햄넷>은 이름에서 쉽게 연상되듯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하지만 영화는 [햄릿]과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상상력으로 [햄릿]을 그려낸 매기 오패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을 다른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왔던 아녜스는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윌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윌과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으며 행복하게 사는 듯했지만, 자신의 아버지와 부딪히며 괴로워하는 윌을 보면서 결국 그를 런던으로 보내준다. 런던에서 돈을 벌기 위해 윌이 집을 비우던 어느 날, 아녜스의 쌍둥이 중 주디스가 큰 병에 걸려 생사를 오간다.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던 어느 밤, 햄넷이 주디스 곁에 있다가 병에 걸려 목숨을 잃고 만다. 아녜스는 아들이 죽는 동안 집에 없었던 윌을 원망하고, 윌 역시 아들의 죽음 앞에서 절망한다. 시간이 흐른 뒤, 아녜스는 윌이 자신의 아들의 이름으로 연극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그 연극을 직접 보러 갈 결심을 하게 된다.
영화의 원작 소설은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햄릿]의 제목에 대한 가설로부터 출발하였다. 셰익스피어에게는 11살에 일찍 죽은 아들 햄넷이 있었고 그의 죽음 이후 [햄릿] 소설이 출간되었다는 점, ‘햄넷과 햄릿이 사실은 같은 이름이며 16세기말에서 17세기 초 기록 문서에서 혼용되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그 간극을 상상력을 발휘하여 쓴 소설이다.
영화는 사랑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한편으로는 늘 죽음의 이미지를 비춰준다. 아녜스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점, 아녜스가 낳은 첫째 딸 수재나를 윌이 안았을 때 나무뿌리 아래의 동굴을 쳐다보는 장면, 윌이 런던으로 갔을 때 그곳에서 흑사병이 돌아 죽은 사람들을 옮기고 있는 장면 등. 영화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에조차 죽음의 이미지를 같이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이미지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죽음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영화 속에서 가장 큰 사건인 햄넷의 죽음에도 죽음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이때 영화는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죽음 그 자체의 시선으로 이를 보여준다. 햄넷은 자신의 쌍둥이 주디스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의 곁에 누워 자신을 대신 데려가 달라고 말하며, 아버지가 말했던 “용감해져라”라는 말을 중얼거린다. 그때 햄넷은 자신의 머리 위쪽을 바라보며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듯 이야기하는데, 이는 명백히 죽음의 시선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영화는 생명의 순간에서부터 죽음의 실제로 드러나는 순간까지 죽음의 이미지를 늘 동행시킨다. 이를 드러내는 이유는 윌의 어머니 메리의 이야기에서부터 드러난다. 다른 많은 자식들을 잃어봤던 메리는 자신에게 자식을 잃어봤냐고 묻는 손녀 수재나에게 이러한 대사를 한다. “네 엄마는 아이를 살리려 최선을 다하고 있어. 하지만 실패할 거야. 우리에게 주어진 건 언제든 빼앗길 수 있단다.“ 영화는 이 대사를 통해 늘 우리가 살고 있는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삶을 드러내는 진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이것이라고만 한다면, 그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 된다. 한 인간이 겪는 상처는 단순히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인물들에게 치유의 시간을 부여한다. 윌은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딴 [햄릿]이라는 연극을 올린다. 아녜스는 처음에는 죽은 아들의 이름이 이상하게 쓰인 것에 대해 분노하지만, 연극 속에서 아들과 아버지의 위치가 뒤바뀌어 아버지인 윌이 유령으로 등장하고 아들이 살아 있는 존재로 재현되는 장면을 보며 점차 분노를 내려놓는다. 극이 전개되면서 연극 속 햄릿도 죽음의 순간에 가까워지고, 몸속의 독으로 괴로워하며 어딘가로 손을 뻗는다. 그 손을 향해 아녜스도 함께 손을 내민다. 그리고 이내 극장 안의 모든 사람이 햄릿을 향해 손을 내민다. 이 장면은 영화 속에서 가장 큰 울림을 주는 순간이다. 현실에서 아들 햄넷은 이미 죽었지만, 아녜스는 그를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투영된 존재에게 손을 내밀어 죽는 순간 미처 해주지 못했던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극장 안에서 다른 관람객들이 동시에 햄릿을 향해 손을 내미는 장면을 보며, 자신의 아픔이 타인에게 공유되고 위로받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영화 속 햄릿 연극은 동시에 아버지인 윌이 얼마나 자신의 아들을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윌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학대받던 윌은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그 안에서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하지만 뜻하지 않았던 비극으로 인해 그는 아내와도 멀어지고, 자신의 마음속 상처도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다. 그러한 그가 햄릿 연극을 만든 것은 자신이 사랑했던 아들의 전 생애에 걸쳐 미처 다 주지 못했던 사랑을 주는 것이자 동시에 아들의 이름이 다른 이들에게 영원히 불리며 이 세상에 불멸로 남기를 바랐던 궁극적인 의미의 사랑인 것이다.
연극이 끝나가면서 동시에 아녜스와 윌도 마음속에서 죽은 아들을 진정으로 떠나보낸다. 처음 햄넷이 죽었을 때 환상과도 같이 보인 장면에서 햄넷은 어딘가로 떠나려 하기 전 굉장히 불안하고 걱정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햄릿 연극이 상영되고 무대 중앙에는 숲 속의 나무 밑의 어두운 동굴처럼 숲을 그림으로 하는 배경 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연극이 끝난 뒤 부모님이 마음에 남은 듯 서성이고 있던 햄넷은 마치 그 연극 무대 위 컴컴한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망설이지 않고 들어간다. 그리고 윌과 아녜스는 그 비극적인 연극의 끝에서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햄넷>은 상실과 슬픔, 그리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우리가 시대극을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은 때로는 잔인하기도 하고 녹록지 않음을 이야기하면서도 궁극적으로 그것을 따스하게 감싸고 치유하는 순간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윌과 아녜스는 윌이 쓴 [햄릿]이라는 승화된 예술을 통해 치유받았다. 그와 동시에 영화는 영화 밖에 있는 관객들을 윌과 아녜스의 자리에 위치시키며, 예술을 통해 삶에서 주어진 고통을 치유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클로이 자오 감독의 차기작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