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과 허무 그 사이 피어난 상실 <고스트 스토리>
※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하고 작성되었습니다.
※ 본 리뷰에는 <고스트 스토리>의 결말에 대한 내용과 주관적인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 ‘이별’이 갖는 의미란 무엇일까. 사랑하던 존재와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사람은 그 이별 속에서 엄청난 고통과 아픔을 경험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에게 '이별'은 현실의 어느 한 귀퉁이에 존재하지만 실상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아주 공포스러운 것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우리가 보통 마주하는 영화들은 대부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 뒤, 그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공간 속에서 인물들에게 주어진 애도의 시간을 다룬다. 여기 그 ‘이별’을 아주 다른 입장에서 다룬 한 영화가 있다. 영화는 이별의 아픔을 독특하게도 인간의 시점이 아닌 ‘영혼’의 시점으로 다룬다.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영혼’의 시점으로 다뤄진 이별의 이야기는 어떠한 톤을 갖고 있을까?
<고스트 스토리>는 참으로 단순하다. 서로 마음 깊이 사랑했던 두 남녀. 어느 날 자동차 사고가 발생하고, 그 사고 로 인해 남자는 목숨을 잃는다. 여자는 흰 가운이 덮여 있는 남자의 시체 앞에서 한참을 절망스럽게 가만히 서 있다가 이내 걸음을 옮긴다. 보통의 영화였다면 카메라는 곧장 여자를 향해 따라가며 그녀의 감정이 헤아릴 수 없이 얼마나 슬프고 깊은 것인지 다뤘을 것이다. <고스트 스토리>는 그녀를 따라가지 않고, 묵묵히 시체 앞에서 있다. 흰 가운이 덮인 시체를 한동안 바라보던 카메라.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른 뒤, 흰 천에 덮여있던 시체가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실 처음 이 장면을 마주했을 때 관객들의 당혹감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현실을 정교하고 치밀하게 세공해내는 컴퓨터 그래픽이 난무하는 21세기에서 흰 천으로 표현되는 유령이라니. 스태프의 실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황스러운 연출은 뻔뻔해 보일 정도로 당당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영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아 관객들이 수긍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유령의 형태에 수긍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영화 속에서 천천히 드러나는데, 유령이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발견했을 때 관객들은 이 형태에 대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자신의 집에 머물던 유령은 우연히 옆집에 살고 있는 자신과 똑같은 유령을 발견한다. 옆집의 유령도 똑같이 천을 덮어쓰고 눈이 있을 곳이 커다란 두 개의 구멍이 뚫려있지만, 서로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천의 종류이다.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 유령은 흰 색의 천을 덮고 있다. 이와 달리 옆집의 유령은 꽃무늬가 그려져 있는 천을 덮어쓰고 있다. 두 천의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떤 공간에서 죽음을 맞이 했는가?’이다. 남자는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했기에 그의 위로 덮여 있던 흰색 천을 뒤집어 쓰고 있다. 이와 달리 여자(라 추청되는 유령)은 아마도 자신의 집, 침대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두 유령의 외양이 달라지는 것이다. 유령의 외양이 달라진다는 것은 이 유령들이 단순히 시각적으로 보이는 ‘유령’이 아니라 다른 의미로 읽힐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옆집에 있던 유령은 자신이 살던 집이 무너지고 자신이 기다리는 사람이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을 깨달은 순간 사라진다. 이러한 유령의 모습들은 언어 그대로 ‘죽은 사람의 혼령’이 아닌, 사람들이 생전에 두고 간 감정으로 읽을 수도 있다. 유령들은 계속해서 자신이 사랑했던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고, 특히 우리가 계속 따라가는 유령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에 누군가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며 분노를 아낌없이 쏟아낸다. 또한 유령이 딱 한가지 집착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여자가 집을 떠나기 전 남기고 간 쪽지이다. 이러한 기다림, 분노, 집착과 같은 다양한 유령의 모습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퍼부을 때 보이는 모습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며, 이러한 지점들로 인해 ‘유령’은 아직 해소되지 못한 채 남은 감정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처음 이 ‘유령'이 등장하는 장면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이 ‘유령’이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여자가 떠난 뒤, 유령이 등장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에는 상당한 텀이 존재한다. 사건과 사건 사이의 여백은 관객들을 계속 그 장면을 주목하게 만든다. 그 주목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건과 사건 사이 텅 비어 있는 시간의 여백은 그 여백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이 영화에는 수많은 ‘여백’들이 존재한다. 맨 처음 유령이 등장하는 장면도 그러하고,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서 단 한 마디 대사도 하지 않은 채 파이를 먹는 장면도 그러하다.
이러한 내러티브 속에서 불필요한 여백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설명할때 누락된 여백들도 존재한다. 가령 ‘유령’이 여자가 떠난 집에서 여자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그 시간대를 물리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시간대를 훌쩍 뛰어넘는다. 여자가 떠난지 얼마 되지 않은 집안에 갑자기 아무도 없던 빈 공간에서 아이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잔뜩 흥이 난 사람들이 모여들기도 한다. 또한 설명의 여백은 하루 이틀과 같은 짧은 시간에서 갑자기 몇 세기를 뛰어넘기도 한다. 유령이 물질 문명 속에서 견디지 못하고 뛰어내린 뒤, 시간을 거슬러서 그들이 살았던 곳의 과거를 만날 때에도, 갑자기 습격 당해 죽음을 맞이한 어린 소녀는 순식간에 시간을 뛰어 넘어 시체로 변모한다. 이러한 수많은 여백들은 유령이 느끼는 시간에 대한 감각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유령, 즉 죽은 남자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를 제외한 모든 것에 무감각하다. 그렇기에 이 수많은 여백들이 존재하고, 그 여백 속에서도 변치 않고 그녀를 지켜보는 유령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이 만들어 주었던 음악을 듣고 바닥에 누워있을 때 유령은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킨다. 영화 속에서 수많은 시간과 공간들이 파편화되는 순간에도 유령은 사랑하는 여자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여자가 집을 떠나고 그 집을 방해하려는 인물들에게 분노를 퍼부어도 유령은 계속 그 자리를 지킨다. 그러한 유령에게 큰 변화가 다가오는데, 여자와 함께 살았던 집이 무너지고 그곳에 거대한 건물들을 들어서는 순간이다. 유령은 그 자리를 지키지만, 그 자리에 계속 머무르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변해버린다. 시간을 뛰어넘어 그 집이 생기기도 전, 아주 먼 과거를 지나 유령은 자신이 살아있었던 가까운 과거로 되돌아간다. 영화는 맨 처음 오프닝에서 보여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두 연인이 잠들어있던 조용한 집에 갑자기 쾅 하고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린다. 두 연인은 화들짝 놀라 밖으로 나가지만,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유령이 수 세기를 건너온 뒤, 자신이 살아있었던 과거로 돌아왔을 때 관객들은 그 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유령'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유령은 살아있던 자기 자신이 결국 사랑하는 여자의 소원인 이 집을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는 사실을 듣고 화를 낸다. 영원히 이 집에 머물고자 했던 유령은 그 말로 인해 결국 살아있는 자기 자신이 죽음을 피할 수없다는 것과 앞을 벌어질 일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다시 그렇게 다가오고, 유령은 드디어 자신이 그토록 애타게 보고 싶어했던 쪽지의 내용을 보게 된다. 그 쪽지의 내용을 관객들은 끝까지 알 수 없다. 그 쪽지의 내용조차 여백이 되어 사라지고 여인이 사라졌던 것처럼, 유령도 곧 기다림을 끝내고 사라진다.
이 유령을 따라 영화 속에서 수없이 긴 시간을 따라 흘러오면서 ‘감정’에게도 이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어떤 인물과 이별할 때, 더 이상 만날 수 없음을 직감하고 그 사람과 함께 나누었던 시간, 공간, 기억들을 모두 정리한다. 정리한다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가슴 속에 묻어버리는 것도 아니다. 단지 생생한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현재와 미래가 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감정을 이어나가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감정이 멈춘다고 해서 그 모든 기억과 순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감정을 정리하듯, 감정에게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떠한 일에 대해 일어나는 나의 마음이나 느끼는 기분을 차분히 내려놓는 것. 우리에게 갑작스러운 이별이 잔인한 것처럼, 나도 모르게 피어나는 감정을 어떻게 억지로 막을 수 있을까. 그렇기에 유령으로 대변되는 그 감정은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기까지 수많은 시간을 지나온 것이 아닐까. 더 이상 기다릴 이유가 없어지면 떠났던 옆집 유령의 모습처럼 유령은 사랑했던 사람의 모든 순간을 자신의 안에 소중히 담고 미련과 집착을 버린 채 홀연히 사라진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한 때 서로 사랑했던 순간들은 여전히 이 세상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읽지 못했던 쪽지 속 메시지처럼 영원히 그 의미를 안고 세상 속에서 살아 숨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