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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으로 정해지는가

인간 너머의 그 심연 속으로 <세 번째 살인>

by 송희운

※ 본 리뷰는 스페셜 관객 평론 시사회를 통해 관람하고 작성되었습니다.

※ 본 리뷰에는 <세 번째 살인>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세 번째 살인>은 매우 기대되는 작품 중 하나였다. 감독 작품의 모든 것을 보지는 않았지만, 사람에 대한 따스함과 이따금씩 작품 속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이 공존하는 것으로 보며 남다른 감정을 느끼고는 했다. 예를 들면 <아무도 모른다>에서 화면은 마냥 따뜻하고 예쁜 햇빛으로 가득 차 있는데, 방 한 켠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동생의 시체가 숨겨져 있다든지, <걸어도 걸어도>에서 시어머니가 자신의 며느리를 향해 무심한 듯 내뱉는 진심이라든지 그것은 전반적인 영화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일상의 평범함을 가장한 죽음과도 같은 서늘함이었다. 이렇게 일상 속에서 그 서늘함을 보여주던 감독이 이전의 자신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돌아왔다. 그것도 ‘살인사건’을 다루는 이야기로. 그랬기에 감독의 작품이 유난히 기대가 되었고, 설레는 마음으로 관람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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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한다면 <세 번째 살인>은 내가 올해 봤던 영화 중 1,2위를 다투는 작품이 되었다. <세 번째 살인>은 이따금 내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 속에서 마주했던 ‘서늘함’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이다. 이전의 작품들이 일상 속에서 본모습을 감추고 이따금씩 모습을 비추던 미세한 ‘악’이라면 <세 번째 살인>은 여태껏 보지 못했던 ‘악’의 진정한 모습을 마주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일전의 작품들이 인간들의 내면 속에 잠들어있던 ‘악’을 꺼내 보였다면, 이번 작품은 악을 마주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해야 할까. <세 번째 살인>에서 ‘악’은 바로 미스미이다. 영화는 내내 이 미스 미라는 인물에 대해서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이 영화 자체가 어느 하나 명확하지 않은 모호함으로 가득한 이야기이다. 명확하지 않은 이야기들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어떻게 명확할 수 있을까. 인간의 내면 속에서는 정의 내릴 수 없는 수많은 모호함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 불확실성과 모호함 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이어지며 관객들은 이런 불쾌감을 따라 멈출 수 없는 끝을 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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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본론으로 돌아간다면 ‘미스미’라는 인물은 이야기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는 인물이자, 이 영화의 주제를 몸소 드러내고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처음 이야기의 시작은 이미 살인을 인정하고 난 뒤 마주하는 미스미의 이야기이다. 관객들은 처음에 미스미가 어떤 인물을 죽이는 모습을 본다. 미스미가 사람을 죽인 뒤, 시체에 불을 붙여 태우는 모습에서 어떠한 큰 감정의 동요나 그런 것들이 비치지 않는다. 이후, 접견실에서 계속 자신의 진술을 번복하며 사람들을 희롱하는 미스미의 모습에서는 다양한 감정이 비친다. 자신의 혐의를 부인할 때 드러내 보이는 격한 슬픔, 분노, 혹은 자신이 어떤 식으로 죽였는지에 대해 진술을 번복할 때 내비치는 순진한 듯한 얼굴. 시게모리는 미스미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면모를 계속해서 그에게서 발견한다. 미스미는 사실 ‘악’ 그 자체이다. 그 악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해 탄생한 악마라는 뜻과 동일하긴 하지만, <세 번째 살인>에서 악이라고 하는 것은 굳이 인간을 타락시키거나 파멸시키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세 번째 살인>에서 드러나는 악의 특징은 바로 모호함이다. 모호함이 절대적으로 악이 될 수는 없지만, 악은 모호함이 될 수 있다. 악은 때로는 선한 얼굴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악한 얼굴을 하기도 한다. 이 혼란스럽고 모호함은 인간을 타락시키지는 않지만 인간이 기존에 갖고 있는 가치관이나 신념들을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미스미의 악은 완전무결하게 순수하다. 선이 끼어들 여지가 없이 완전무결하게 순수한 악으로만 이뤄진 존재라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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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사건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던 시게모리는 점점 자신이 ‘악’에게 휘말리는 것을 느낀다. <세 번째 살인>에서는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인간은 그릇이다.” 인간 안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 살인자가 될 수도 있고, 성인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지만, 이 말을 다른 의미로 해석할 여지가 존재한다. 미스미와 같이 절대적인 악을 마주했을 때, 인간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미스미의 진술이 번복됨에 따라 미스미에 대한 시게모리의 감정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처음에는 귀찮았던 살인범에서 점점 흥미를 느끼고, 사키에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말에 경외감을 느끼고, 살인이 확정된 뒤 그와 마주한 장면에서는 혼란을 느낀다. 인간은 원래 그 속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성질이 존재한다. 하지만 환경에 따라 어떤 것이 꺼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번 정해진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지만, 다 성장한 뒤 무엇을 마주 하느냐에 따라 인간은 다시 한번 변화를 맞이한다. 즉,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존재이고,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그릇이라는 대사는 이 영화가 인간을 단순히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닌, 능동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는 지점으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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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스스로의 성질을 선택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십자가가 보이는 장면들은 모두 ‘악’이 드러날 때이다. 십자가가 등장하는 장면은 거의 미스미와 연관되어 있다. 맨 처음 미스미가 시체를 태울 때 그 불태우는 모습을 강 건너편에서 보여주는데, 일렁이는 불빛으로 인해 그 모습이 마치 십자가처럼 보인다. 뿐만 아니라 강바닥에 있는 시체의 흔적은 십자가 모양이고, 눈밭에 세 사람이 누워있는 환상 속에서 세 사람은 모두 십자가 모양으로 누워있다. 이러한 십자가의 흔적들은 악과 대조되는 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는 영화의 엔딩에서 드러나는데, 그 장면은 바로 미스미와 마지막 면회를 마친 뒤 시게모리가 두 길이 엇갈린 도로 위에서 가만히 서 있는 장면이다. 오블리크 샷으로 보이는 시게모리의 모습은 말 그래도 혼돈에 휩싸인 모습이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내가 믿는 것이 정말 진실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를 때, 비로소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것은 성경 속에서 등장하는 십자가가 아닌, 여러 방향으로 갈라져 있는 교차로이다. 교차로는 네 방향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인간이 어디를 가느냐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간은 선해질 수 있고, 악해질 수도 있다. 그릇이라는 것도 바로 이 교차로와 일맥상통한다. 환경에 의해 인간 내면 속에 무엇이 담기느냐가 결정되는 것이 아닌, 인간이 그 환경 속에서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인간이 결정된다. 선과 악 그 사이를 계속해서 오가던 미스미의 진실과 직면한 시게모리는 이미 자신의 내면 속에서 처리할 수 있었던 정보의 양을 넘어버렸고, 그의 무너져버린 가치관과 정신을 대변하는 것이 마지막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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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제목 또한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세 번째 살인>이라는 것은 물리적인 횟수가 아닌, 각각 다른 세 사람에 의해 재구성되는 세 가지 살인으로 읽을 수도 있다. 시게모리가 받아들이는 미스미의 살인, 사키에 가 받아들이는 미스미의 살인, 마지막으로 미스미 본인이 받아들이는 자신의 살인. 이렇게 서로 각자 다르게 받아들이는 살인은 영화 속에서 내내 의미가 달라진다. 시게모리에게 있어 미스미의 살인은 말 그대로 안갯속에서 헤매는 혼란스러움이고, 사키에에게 미스미의 살인은 자신을 대신하여 누명을 쓴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신성한 행위이다. 그렇다면 미스미에게 자신의 살인은 무엇이었을까? 영화 속에서 정확하게 답을 내려주지는 않지만 그의 대사를 통해 유추해본다면 ‘살인’ 그 자체를 위한 살인이었을 것이다. 살인에 어떤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존재. 그의 살인이 더욱 섬뜩해지는 이유는 아무런 원인이 없다는 것보다 그가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너무나도 평범하고 선해 보이는 모습과 대조되어 과연 완전한 악이란 무엇인가 혼란에 휩싸이게 만드는 데서 오는 섬뜩함이다. 이러한 인물을 야쿠쇼 코지가 연기한다는 것이 참으로 인상 깊은데, 그는 이미 이와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큐어>라는 영화에서 이러한 악 자체를 마주한 적이 있다. 그때는 그가 경험을 하는 시게모리와 같은 역이었다면, <세 번째 살인>에서는 순수한 악 그 자체로 변모한다. <큐어>에서는 가장 심연 속에 잠들어있던 인간의 악을 꺼내왔다면, <세 번째 살인>은 악의 경로가 아닌, 악의 본질을 심도 깊게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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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악’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시게모리와 미스미의 얼굴이 겹쳐지는 마지막 접견실 장면이다. 왜 미스미가 결백하다고 주장했는지에 대해 계속 고민하던 시게모리는 결국 사키에를 위한 것이라 결론을 내리고 미스미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미스미는 그 말을 듣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되묻는다. 이내 자신은 단순한 살인자일 뿐이라고 답한다. 앞서 인간은 자신의 방향성을 스스로 정한다고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자신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고, 타인을 향해서 그 방향성대로 가도록 조종하기도 한다. 시게모리는 처음에 미스미를 단순한 범인으로, 무언가 비밀을 가진 살인자로 여겼다. 사키에라는 또 다른 요인으로 인해 미스미를 사연이 있는 살인자로 여기게 된다. 선과 악, 그것은 어떻게 구분하느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의해 결정될 수도 있다. 미스미는 완벽한 악이었지만 영화의 내리 티브 속에서 선과 악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해왔다. 물론 그것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행해진 것들이었다. 이는 접견실에서 미스미의 등 뒤로 비치는 눈부신 빛을 통해 다시 한번 그가 신의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텅 빈 그릇, 장님들이 만진 코끼리 영화 속에서 수없이 보인 메타포들은 이 접견실 장면에서 하나로 겹쳐진다. 무엇을 담을 것인가의 문제, 그것을 통해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라는 답. 내가 마주한 것이 진실인가 내가 인지하고 있는 것이 진실인가? 수많은 질문들이 포개지는 동안, 미스미의 얼굴과 시게모리의 얼굴 이하나로 겹쳐진다. 혼란스러워하는 시게모리의 얼굴 위로 미스미의 악마 같은 웃음이 겹쳐지고 이내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악을 마주하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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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으로 정해지는가, 인간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사람들이 수없이 이야기하는 성선설, 성악설에 대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자신만의 대답을 내놓았다. 인간은 어떤 외부의 수많은 요소들로 인해 성질이 결정되는 것이 아닌, 자의에 의해 스스로 만들어지는 존재라고.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이냐 어떤 방향으로 선택할 것 이느냐에 따라 인간은 결정된다 걸. 어떻게 보면 이 답은 가장 비관론적인 방법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희망이 남아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한 것일지도 모른다. 혼란스럽고 절망적인 엔딩에서 그것을 얼마나 잡아낼 수 있을지는 짐작도 할 수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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