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캐릭터의 얼굴로 인생을 드러내는 <원더 휠>
※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하고 작성되었습니다.
※ 본 리뷰에는 <원더 휠>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최근 들어서 '인생이란 무엇일까?'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아직 여러 풍파를 겪지 않은 젊은 나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나이. 누군가에게는 젊기도, 누군가에게는 많게도 느껴지는 나이. 나이라는 것이 언제나 상대적이라고 하지만, 요즘 들어서 내 나이로 산다는 것이, 인생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많이 고민하게 된다. 어떤 노래 가사 속에서는 이러한 인생에 대해 오르락내리락 반복한다고, 기쁨과 슬픔이 반복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노랫말 가사처럼 인생에서는 올라가는 순간도 있고, 내려가는 순간도 분명 존재한다. 흔히 들어온 오르락내리락하는 인생의 수많은 순간들에 대해서 우디 앨런 감독은 이를 거대한 대관람차로 묘사한다.
코니 아일랜드라는 아름다운 놀이공원. 영화는 놀이공원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다룬다. 누군가에게 이 코니 아일랜드는 잠시 들려서 행복함과 즐거움을 만끽하는 꿈같은 곳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그저 매일매일 소음이 들리는 지긋지긋한 삶의 현장일 뿐이다. 특히 주인공인 지니가 사는 곳은 아무리 해도 조용한 평안을 누릴 수 없는 게임 총소리로 인해 늘 불안과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는 곳이다. 겉표면은 누구나 즐기고 싶고, 거기서 떠나고 싶지 않은 환상 같은 코니 아일랜드는 그곳에서 발을 붙이고 사는 순간 현실의 지독한 일면을 떠오르게 하는 신기루와도 마찬가지인 장소이다.
이런 환상의 현실 속에서 지니는 또 다른 환상을 꿈꾼다. 과거 유랑하면서 배우의 삶을 살았던 그녀는 언젠가 이곳을 벗어나고 말겠다고 생각한다. 항상 남자에게 기대어 사느라 자신이 스스로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그녀는 믹키를 통해 자신의 또 다른 환상을 채우고자 한다. <원더 휠>의 흥미로운 지점은 환상을 자아내는 곳에서 또 다른 환상을 키워낸다는 점이다. 놀이동산이라는 판타지로 가득한 세계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거기서 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또 다른 환상을 심어준다. 지니에게 놀이동산은 어떻게 보면 환상이 아니라 지독한 현실을 불러일으키는 끔찍한 공간이다. 지끈지끈한 두통을 이기고 일해야 하는 직장이고, 자신에게 의존되어 있는 남편뿐만 아니라 매일 불을 지르며 사고만 일으키는 아들, 자신의 위치마저 위협하는 남편의 딸까지. 코니 아일랜드에서는 온통 그녀의 머리를 휘젓는 것들 뿐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녀의 유일한 위안은 젊고 매력적인 믹키였다. 마치 동화 속 주인공처럼 그녀는 믹키가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 상상한다. 그렇지만 믹키가 그녀와의 관계에서 바랬던 것은 진심 어린 사랑이 아닌, 지루하고 무료한 여름 동안 잠시나마 즐길 수 있는 짧은 유통기한의 유희였을 뿐이다.
환상 속에서 만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현실과 마주하게 된 순간, 모든 인물들은 절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 우디 앨런 감독은 이러한 인물들의 모습을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이끌어낸다. 지니는 자신의 남편의 딸인 캐롤라이나가 믹키와 잘되어가는 듯한 징조를 보이자 질투심에 눈이 멀어버린다. 그녀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깨닫고 처음에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급하게 전화를 걸러가지만, 이내 그 전화를 내려놓고 만다. 사실 지니의 행동은 그 행동만 놓고 봤을 때는 어떤 죄를 판단할 수 있을 만큼 큰 무게를 지니지는 않는다. 그녀의 행동이 큰 무게를 짊어지게 되는 순간, 그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끔찍한 결과는 그녀의 인생을 향해 덮쳐오기 시작한다. 지니가 전화를 내려놓는 장면이 다른 장면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그녀가 처음으로 코니 아일랜드에서 연기를 하지 않은 순간이라는 점이다. 영화 속에서 지니는 자신은 정말 웨이트리스가 아닌, ‘웨이트리스’ 역을 맡았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녀의 대사처럼, 그녀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기하던 시절의 물건들을 어루만지며 과거의 자신을 불러낸다. 지독한 현실을 연기하는 무대에서 내려가면 그 무대 뒷면에서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연기를 하던 지니. 그녀가 자신의 질투로 눈이 멀어 잔인한 행동을 저지를 때는 비로소 연극 무대에서 내려온다. 그것은 자신이 계속 연기를 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실제 삶의 행동이었다.
<원더 휠>이라는 영화가 빛나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인생의 비극성과 그 비극성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잔혹성이 만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캐롤라이나는 위험을 감지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그녀는 되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우디 앨런 감독이 캐롤라이나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여주지 않는 것은 아마 관객들의 상상을 더욱 자극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비극의 순간들은 인물들이 서로 부딪힐 때 영화적으로는 가장 아름다운 화면으로 묘사된다. 이 영화 속에서 가장 공을 들여 묘사된 장면이라면 지니와 믹키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원더 휠> 중에서도 특히 지니가 살고 있는 집에서 보이는 대화 장면들은 유난히 연극적으로 연출된다. 이러한 인상이 강회 되는 것은 바로 조명이 인물들의 얼굴을 비출 때이다. 영화의 수많은 장치가 인물들의 심리를 처절하게 극대화하여 드러냈던 것처럼, 조명도 인물들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자신의 끔찍한 치부가 드러나고, 믹키에게 칼을 주며 자신을 심판하라고 이야기할 때, 강한 핀라이트 조명이 그녀의 얼굴에 내리 꽂힌다. 이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너무 강한 조명이 내리쬐서 그녀의 얼굴에서는 경계가 사라진다. 눈부시게 빛나는 그녀의 모습은 바로 이 <원더 휠>의 클라이맥스이자 그녀의 인생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골목길에 다다랐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이후 그녀의 얼굴에서 조명이 점점 사라지고, 빛을 잃은 그녀의 얼굴은 마치 생명이 꺼져버린 것처럼 죽은 얼굴이 되어버린다. 마치 그리스 비극의 한 장면처럼 비극은 상상 이상으로 그녀의 얼굴 속에서 극대화되어 숨 막히는 아름다운 비극 미로 장식되고 사라진다.
산다는 것은 그저, 사는 것이다.
인생의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래프를 어떻게 예측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높고 낮음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원더 휠> 속 지니는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이 현실이 인생에서 가장 낮은 지점이라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살인자가 되고 나서야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이 그토록 빠져나오고 싶어 했던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높은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디 앨런 감독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인생의 씁쓸한 순간을 오랜 시간 동안 숙성된 지혜를 통해 담아낸다. 인생에서는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인생 속에서 내가 어디를 최고로 설정할 것인가는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모든 무대의 불빛이 꺼져버린 뒤, 연극 무대가 곧 현실이 되어버린 지니의 얼굴에 비친 허무함이 그렇게도 와 닿는 것은 언젠가 우리가 갖게 될 또 다른 나 자신의 얼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
+덧 : 이처럼 자신이 나름대로 쌓아온 인생의 성찰을 영화적으로 훌륭하게 이뤄내는 우디 앨런 감독이 영화에서만 인생의 진리를 설파하지 않고 영화 밖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돌아보는 감독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