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퍼 무비의 참맛을 알려주는 <로건 럭키>
※ 본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하고 작성되었습니다.
※ 본 리뷰에는 <로건 럭키>의 반전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주 오래 간만에 받았던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 초청 메일. 그 속에서 <로건 럭키>를 보았고, <로건 럭키>의 감독이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잠깐 망설였었다. 사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하면 영화 홍보사 시절 홍보했던 <헤이와이어> 만 생각났다. 영화의 참맛(?)을 알기 전, 본 시리즈에만 익숙해져 있던 나는 느리고 둔탁한 배우들의 액션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그 영화가 지루하게만 느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로건 럭키>를 통해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작품을 다시 만났다. 그의 영화는 여전히 최근 트렌드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리듬과 자신만의 박자로 나아간다. 느린 호흡과 건조한 템포에도 불구하고 <로건 럭키>는 상당히 재미있는 영화이다. 이는 그의 영화에 대한 나의 시선이 달라진 것일 수도 있지만, 정말 순수한 의미에서 엔터테인먼트적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로건 럭키>의 스토리는 <오션스 일레븐>과 거의 유사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오션스 일레븐>의 주 대상은 카지노이며, 그 금액은 무려 1억 5천만 달러이다. 즉, 크게 한탕을 쳐서 단번에 돈을 쉽게 벌고자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 범죄에 가담하게 된다는 스토리이다. <로건 럭키>의 금액은 정확하게 등장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카지노보다는 소소한 금액(?)이다. 이뿐만 아니라 ‘오션스 시리즈’와 <로건 럭키>의 가장 큰 차이점은 범죄를 실행하는 캐릭터들이다. ‘오션스 시리즈’의 캐릭터들은 멀끔하고 완벽한 착장을 갖춰 입은 범죄자들이다. 이들의 모습은 얼핏 보기에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로건 럭키>의 캐릭터들은 ‘오션스 시리즈’ 캐릭터들의 모습과 정반대이다. 그들은 중산층이라기보다는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것이 바쁜 일반 소시민들의 모습에 가깝다. 그들이 범죄를 모의하게 되는 계기도 단순히 돈을 많이 벌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들의 힘든 삶에서 탈피하기 위한 생계형 범죄에 가깝다. 결정적으로 이 모든 일을 시작한 ‘로건 형제’들은 그 외양부터 평범하지 않다. 범죄를 계획한 형 지미는 한쪽 다리가 성치 않고, 그의 동생 클라이드는 이라크 전쟁에서 팔을 잃었다. 일반적으로 상업 영화에서 이런 장애가 있는 주인공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장애를 얻는 순간, 그것은 절망 혹은 고난으로 비치기 마련이다. <로건 럭키>에서 이들이 갖고 있는 장애는 그들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비칠지언정, 그들의 삶을 뒤흔들 만큼 치명적인 것들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 이들의 모습은 이 캐릭터들이 갖고 있는 특징 중의 하나로만 비칠 뿐이다.
<로건 럭키>는 케이퍼 무비의 정석을 따르지만, 호흡이나 전개는 상당히 느리다. 그 속에서도 <로건 럭키>가 캐릭터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상당히 냉소적이고 건조하다. 마치 휘황찬란하고 화려하고 빠르게 전개되는 것이 정석이라고 여겨지는 케이퍼 무비를 한 컷 한 컷씩 들어내서 현미경으로 세세하게 해부하는 느낌이다. 이러한 느린 호흡은 이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서 더욱 빛을 발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느리게 보여주다가 마지막 반전이 드러나는 순간 안심하고 있던 관객들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반전을 마주하며 더욱 큰 즐거움을 얻는다. 정말 말 그대로 기분을 즐겁게 하는 '오락'과도 같다. 영화는 로건 형제의 징크스와 어수룩한 로건 형제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강조하며 이들보다는 오히려 조 뱅이 어떤 기가 막힌 수로 범죄를 성공할지 기대감을 갖게 하고 관객들의 관심을 계속 다른 곳으로 돌린다.
이런 모든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나름의 설계를 쌓아가던 영화는 언뜻 빗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을 등장시킨다. 지미의 딸인 새디가 장기자랑에서 리한나의 노래가 아닌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를 부르는 장면은 완벽한 케이퍼 무비를 향해 벽돌을 쌓아가던 영화가 잠시 노선을 바꾸는 순간인데, 문득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진짜 보여주고 싶었던 장면이 이 장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카지노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오션스’ 시리즈에서 수년의 시간이 흐른 뒤 <로건 럭키>와 같이 하층민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변화한 미국인들의 모습에 대한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나름의 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명망 있고, 화려한 것들을 쫓았던 ‘오션스 시리즈’ 속 미국인들은 이제 현실적인 문제에 안착했다. 실업률은 낮아지고 있지만 임금 상승률은 오히려 정체 중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경기 불황 속에서 그들은 안착할 수 있는 ‘집’을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집이란 자신이 원래 살았던 고향일 수도 있고, 불안 요소가 제거된 안정된 상황이나 배경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로건 형제가 레이싱 대회에서 돈을 훔치는 것도 인생 역전을 위한 한방이 아닌, 어느 정도 먹고살만한 수준의 돈을 터는 것이 주목적이었을 것이며, 뚜렷하게 갈 곳이 없는 그들의 인생 속에서 나름의 생기를 띄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영화 내내 냉소적인 시선으로 로건 형제를 따라가던 영화는 이 잉여와도 같은 순간에서만큼은 애틋한 시선으로 이 캐릭터들을 포용해준다.
다시 본 스토리로 돌아와서,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영화의 반전이 여태껏 영화 역사상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뛰어난 반전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참신한 면모를 보였던 이유는 영화가 공들여 보여준 캐릭터들에 대한 묘사 때문이다. 매사에 헐렁해 보이는 지미, 어딘가 어눌해 보이는 클라이드, 거기에 그저 구색을 맞추기 위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멜리까지. 이들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 누구보다도 빛나는 팀워크를 보인다. 조 뱅 형제들을 자신의 계획에 가담시키기 위해 이들은 어설프고 어눌한 면모를 계속해서 보여주고 이들에게 상기시킨다. 두 형제는 조 뱅에게서 "너네들 멍청함이 정말 소문 대로구나"라는 말을 듣는데, 이 장면에서는 조 뱅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이들의 캐릭터가 지략가가 아닌 웃기는 캐릭터라고 생각하며 안심한다. 영화 내내 이러한 방식으로 소모되는 로건 형제 캐릭터들은 지미의 열 번째 규칙처럼 욕심을 부리지 않고 모든 돈들을 트렁크에 그대로 두고 사라지면서 정점을 찍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의 한 탕이 단순한 해프닝에서 그치는 것으로 보이는 순간, 영화는 지미에게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이야기를 드러내며 그 속에 가려져 있던 반전을 보여준다. 처음 형제들이 조 뱅에게 면회를 갔을 때, 조 뱅이 감옥에 들어오기 전 저지른 범죄에서 얻은 돈을 앞마당에 묻었다가 다른 이에게 빼앗겼다는 대사는 영화 엔딩에서 그대로 되돌아온다. 단순한 대사로 스쳐 지나갔던 것들이 영화의 엔딩 즈음에 번쩍이는 순간 관객들도 함께 짜릿함을 만끽한다. 이것은 단순히 반전을 위한 반전이 아닌, 정말 정석에 충실하면서도 정확하게 대사, 장면과 같은 영화적인 요소들을 충분히 활용한 뒤에 얻을 수 있는 순수한 짜릿함이다. 이야기를 위해서 캐릭터들뿐만 아니라, 관객들까지 속이는 것, 바로 이 지점이 <로건 럭키>에서 가장 번뜩이는 순간이고, 이 영화를 완벽한 케이퍼 무비로 만들어준다.
스티븐 소더버그는 이처럼 이야기를 영리하게 활용할 뿐만 아니라 배우들을 활용하는 지점에 있어서도 뛰어난 감독이다. 근육질 캐릭터로 주로 등장하는 채닝 테이텀에게 지략가 지미 역을 준 것뿐만 아니라, 모든 캐릭터들 하나하나가 재치 넘치고 위트 있게 살아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맡은 조 뱅이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이 역을 맡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라울 정도로 그는 이 양아치(?) 같은 캐릭터에 완벽하게 몰입한다. 그의 대표적인 필모그래피로 손꼽히는 007 캐릭터, 이 영화 속에서는 그런 지적이면서도 냉철한 스파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말투에서부터 행동 하나하나까지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되어 조 뱅을 연기한다. 특히, 경기장 지하에 잠입해서 젤리, 수정펜 등과 같이 상상도 못 한 재료로 폭발물을 만들어 낼 때, 조 뱅이라는 캐릭터와 다니엘 크레이그는 예상치 못했던 시너지로 관객들에게 큰 즐거움을 불어넣는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한 배우로부터 파생되는 이미지에 국한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시키면서 스토리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 엔터테인먼트 무비로 완성시킨다.
빠르고 정신없이 지나가는 할리우드 상업 영화 흐름에 이미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로건 럭키>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영화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착실하게 영화적인 요소와 스토리를 쌓아가면서 나중에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 "빵"하고 터뜨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영화의 참 맛이 아닐까. 모든 것이 빠르게 전개되는 이 시대 속에서 여전히 자신만의 연출을 고집하는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이제 더 이상 은퇴를 이야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영화를 제작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