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나를 완전하게 만드는 사랑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
※ 본 리뷰에는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판의 미로>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벌써 개봉한 지 12년이 지난 영화인데도 극장에서 그 영화를 보고 충격에 휩싸였던 것을 잊을 수 없다. 내가 그 영화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던 것은 그 당시 내게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은 구별될 수밖에 없던 시기였는데, 그 영화는 추함과 아름다움이 하나로 공존하는 독특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아름다움=매끄러움으로 연결되는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나와 다른 외양을 가진 이형의 존재가 아름답다는 감정을 갖게 하고, 슬픔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나 자신을 보며 혼란스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듯 슬픈 아름다움을 그려왔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자신의 신작 <셰이프 오브 러브 : 사랑의 모양>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기이함 속의 사랑을 그린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작품 속에서 모든 주인공들은 결핍된 존재였다. <판의 미로>에서 아버지를 잃은 어린 소녀, <퍼시픽 림>에서는 형제를 잃은 남자, <크림슨 피크>에서는 상류사회에 제대로 편입되지 못한 여자, <악마의 등뼈>에서는 전쟁 속 버려진 아이들 등 어딘가 완전하지 못한 주인공들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작품 속에서 늘 존재하는 캐릭터들이었다. <세이프 오브 워터>에서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일라이자가 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농아였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어딘가 결핍하고 부족한 대신, 현실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와 통하는 무언가를 가진다. 즉, 이들의 결핍이 판타지 세계로 통할 수 있는 하나의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그 판타지 세계는 미묘한 지점이 있는데, 이는 이들이 자신의 현실에서 회피하기 위해 그 환상들을 만들어내는 것인지, 현실 세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이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고리를 지니는지는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에서 일라이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낼 수 없었기 때문에 현실 속 사람들에게 배척당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를 자신보다도 낮게 여기며 무시하는 것이 다반사이지만, 종종 그녀에 대해 일그러진 욕망을 지니는 캐릭터도 존재한다. 즉, 하나의 평등한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아닌 나와 다르기 때문에 내가 사는 범주에 속하는 인간이 아닌, 배척과 멸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에 대한 묘사는 그녀가 사는 집에서도 드러난다. 그녀는 한 오래된 극장의 옥상에서 살고 있다. 그녀의 옆방에는 그녀의 가장 절친한 친구 자일스가 살고 있다. 이들이 살고 있는 집의 구조는 굉장히 특이한데, 일라이자와 자일스의 집은 각각 새의 등에서 돋아난 날개와 같이 마주 보고 있으면서도 서로 대각선에 있는 기묘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특히 밖에서 이들의 집을 바라볼 때 독특한 구조가 드러나는데, 그들의 창문은 반원의 반원 모양이다. 원의 4분의 1 부분으로 왼쪽에는 자일스가 살고 있고, 오른쪽에는 일라이자가 살고 있다. 원이 아닌 4분의 1로만 존재하는 이들의 창문은 이들이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멸시당하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일라이자가 절친한 사람들 외에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자일스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직원에게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조차 못하는 것처럼 이들은 정상적인 사회의 범주로 포함될 수 없는 배척된 존재들인 것이다. 이는 일라이자의 대사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괴생명체를 구하려고 자일스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그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며 거절하자 그녀는 정확하고 뚜렷하게 이렇게 말한다. ‘나도 그 사람처럼 입을 뻥끗거리고 소릴 못 내요. 그럼 나도 괴물이에요?’ 일라이자는 남들의 이런 시선과 편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 지 너무나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이렇듯 사회 속에서 안착하지 못하고 배척된 존재인 일라이자는 이 세계와는 동떨어진 존재인 괴생명체에게 관심을 갖고 그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셰이프 오브 러브 : 사랑의 모양>의 일라이자는 마치 <판의 미로> 속 소녀였던 오필리아가 커서 어른이 된 것 같이 느껴지는 캐릭터이다. <판의 미로> 속에서 오필리아는 판의 말을 열심히 따르며 다시 지하세계의 공주가 되기 위해 애쓰지만, 오필리아는 사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어린아이이다. 그녀는 지하 세계의 미션을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위험한 일을 하지만, 그녀는 현실 세계에서는 아무런 영향력도 끼칠 수 없다. <셰이프 오브 러브 : 사랑의 모양> 속 일라이자는 다르다. 그녀는 현실 세계 속에서 발을 디디고 살며 자신의 욕망에도 솔직한 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녀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주는 자일스, 젤다에게뿐만 아니라 자신을 억압하는 리처드에게도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는다. 괴생명체를 빼돌리고 나서 직원들을 강압적으로 추궁하는 리처드에게 일라이자는 단어 음절 하나하나 또렷하게 ‘지.랄.하.지.마.세.요’라고 말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작품 속에서 주인공들은 결핍되어 있는 동시에 미성숙한 인간들이었다. 이들의 미성숙함은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닌, 아직 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 와도 같은 순진함에 가깝다. 이러한 순진성이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에서는 사라지고, 대신 성숙한 인간으로 변모한다. <판의 미로> 속 순진했던 소녀가 <세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에서는 세상을 알고 세상을 향해 자신의 말을 내뱉을 수 있게 되었는데, 바로 그 매개체가 ‘사랑’인 것이다. 성서에서 나오는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는 말처럼 사랑에 눈을 뜨고 자신을 억압했던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순간, 어린아이는 비로소 세상을 아는 어른으로 성장한다.
<셰이프 오브 러브 : 사랑의 모양>에서 여러 형태로 읽힐 수 있는 은유들이 많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지점은 존재한다. 그것은 일라이자와 괴생명체 간의 관계 형성 묘사 부분이다. 처음 일라이자는 이 괴생명체를 조우할 때, 두렵고 무서운 것으로 인식한다. 수조에 담겨 있는 불명의 것에서 어떻게 일라이자가 관심을 갖고 그 생명체에게 계란을 하나씩 갖다 주게 되는지, 그 두 존재간의 감정 묘사는 생각보다 빈약하다. 일라이자가 그 생명체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 혹은 그 생명체도 일라이자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순간 등 두 존재간의 감정 묘사가 생각보다 깊지 않아서 영화를 보면서 일라이자가 그 생명체를 위해 목숨을 걸게 되는 순간이 급작스럽고 당혹스러워진다. 물론 괴생명체가 일라이자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계기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잘 해준 인간이었기 때문이지만, 이보다 일라이자가 이 존재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순간에 대한 묘사가 더욱 중요하기에 이런 지점들이 아쉬울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은 온전하게 아름다운 영화이다. 괴생명체와 일라이자는 현실 속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일라이자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녀에게 죽음은 이 세계의 끝이지 그녀의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어릴 적 그녀의 목에 있었던 상처와 그녀가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괴생명체가 그녀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그녀의 상처를 숨 쉴 수 있는 아가미로 바꿔준 순간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못한다. 이 세계에서 그녀는 죽었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의 사랑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이세계(異世界)가 열렸다. 일라이자와 괴생명체 간의 사랑은 현실 속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고 배척당할 수밖에 없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이들의 사랑이 남들의 눈에는 이질적인 것일지언정, 담겨 있는 모습이 다른 이형(異形) 일뿐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경험하는 진실한 사랑이었다. 불완전한 나를 완전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 그것이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이러한 사랑의 본질을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감독은 아마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만이 할 수 있는 것이리라. 이 세계에 속하지 못하는 이형의 존재들은 이 세계를 떠나야지 온전한 자신으로 살 수 있다 사실이 조금은 서글펐지만.
어린아이는 이제 자신의 알에서 깨어 나와 사랑을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책임지는 것,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 어린아이였을 때 미쳐 마주하지 못했던 세상의 수많은 관문들은 이제 세상에서 ‘나’를 옭아매는 도구가 되었다. 어른으로서 세상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세상에 따르는 것, 혹은 세상을 벗어나는 것. <세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에서 일라이자는 세상을 벗어나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난 것이 세상에 굴복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 세계가 아니더라도, ‘나’라는 개인은 존재할 수 있다. 세상에 타협하지 않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녀는 이제 자기 자신을 담을 수 없는 이 세계를 떠나 자신이 온전한 모습으로 있을 수 있고, 세상의 언어로 소통할 필요도 없는 자유로운 세계로 넘어갔다. 그녀를 이세계(異世界)로 이끈 이형(異形)의 사랑은 ‘나’를 불완전한 존재가 아닌 있는 그대로 나로 존재하게 해주었다. 그것이 사랑의 진짜 모양일 것이다.
+덧 : 언제나 느끼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속에서는 언제나 신체 훼손이 클리셰처럼 등장하는데, 유난히 얼굴 훼손에 집중하는 것 같다. <판의 미로>에서 충격적인 그 장면이나 <크림슨 피크>에서처럼 이번 <셰이프 오브 러브 : 사랑의 모양>에서도 어김없이 얼굴에 구멍(?)이 뚫린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서 마치 그의 인장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의 영화에 항상 이런 장면이 등장하는 것에 대한 의미가 조금은 궁금해진다.
+덧 2 : 원래 국내로 영화 수입할 때 마치 통과의례처럼 덧입혀지는 부제를 극혐 하지만 이번 <세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에서는 나름 성공한 것 같다. 그나마 영화 제목에 가장 알맞은 부제를 붙였으니… 하지만 제발 부제를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제를 붙이면 영화가 한층 구려 보인다는 것을 왜 도대체 모르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