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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한 지리멸렬의 삶

삶을 색다른 방식으로 조망하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 대하여

by 송희운

※ 본 리뷰에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내가 크게 관심을 갖고 있던 영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영화를 꼭 봐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위에 나온 영화의 포스터와 페이스북에서 본 '올해 최고의 영화'라는 평 때문이었다. 아직 어떤 영화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연히 포스터를 봤을 때, 빈티지한 색감으로 알록달록한 내용으로 가득 찬 영화라는 인식이 들었다. 또한 페이스북에서 봤던 '올해 최고의 영화'라는 멘트는 으레 영화 홍보를 할 때 쓰는 식상한 멘트 중 하나였지만, 이름조차 생소한 영화에 대해 그런 평이 붙었기에 나는 이 영화가 더욱 궁금해졌다.





드디어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개봉했고, 기대되는 마음으로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훨씬 더 우울하고 암울했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과 대조적으로 모텔에서 한달 씩 방을 옮기며 살아가는 어른들의 현실은 참으로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이러한 괴로움은 온전히 보는 사람의 몫이었다는게 더욱 컸다. 이들의 삶이 왜 이렇게 비참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을까? 그것은 어른들의 곤비한 현실을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괴리감 때문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속 어른들의 현실은 참으로 비극적이다. 무니가 사는 '매직 캐슬'이라는 모텔은 홈리스와 다름 없는 이들이 사는 곳이다. 이들의 삶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아야만 하는 피곤한 삶이다. 이들의 삶에서 낙이란 흔적을 지운 것처럼 보이고, 이들에게는 내일 먹고 살 돈을 어떻게 버는지가 더욱 중요한 관심사이고, 그것은 이제 생존의 문제와 연결된다.



특히 이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사는 것은 무니의 엄마 핼리이다. 핼리는 홀로 돈을 버는 미혼모이다. 그녀의 절친한 친구 애슐리는 정기적으로 갈 수 있는 직장이 있지만, 핼리에게는 그마저도 없다. 핼리는 그녀의 유일한 거주 공간인 모텔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한다. 도매샵에서 향수를 싸게 구매하여 리조트 앞에서 불법으로 향수를 판매하고 그 돈으로 겨우 방값을 낸다. 하지만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사라지자 그녀는 최후의 수단으로 성매매를 선택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현실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너무 거리가 있어서 나와는 상관없는 먼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것 또한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살고 있는 세계의 한 쪽에서 일어나는 동등한 ‘현실’이다. 이들의 삶을 보고 난 뒤 문득 떠오른 단어는 ‘지리멸렬’이란 단어였다. ‘지리멸렬’(支離滅裂)이란 이리저리 흩어져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을 뜻한다. 이들의 삶은 이미 찢겨지고 분산되어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범주에 속한다. 명확한 직장조차 없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도 못한다. 그들은 플로리다 디즈니랜드 건너편에 살고 있지만, 이들에게는 심적으로 너무나 먼 곳이고 이들이 한번도 가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그야말로 신기루 같은 환상의 공간이다. 이들에게 집이란 공간은 있지만, 그들의 삶을 안정적으로 지탱해주는 공간은 절대 아니며, 돈이 없다면 언제든지 떠날 수 밖에 없는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삶을 대변하는 곳이다.



이러한 어른들의 현실은 아이들의 시선이라는 필터를 통해 보일 때 더욱 큰 괴리감을 낳는다. 어린 무니에게 비치는 삶이란 그저 하루 하루가 즐거움으로 가득 찬 놀이동산이다. 영화의 오프닝은 마치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모험을 떠날 거라는 기대감마저 갖게 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놀이터가 디즈니랜드가 아닌, 모텔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쉽고 빠르게 드러나고, 이 영화가 쉬운 영화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이 영화가 제일 비극적인 지점은 이 부분이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이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것,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도 아이들은 너무 천진난만하고 순수하다는 것. 자신들이 사는 곳 옆에 있는 모텔에 새로운 차가 들어가자 우르르 몰려들어서 그 차에 침을 뱉기도 하고, 모텔 관리인인 바비가 그렇게 들어가지 말라고 하는 공간에 몰래 들어가서 모텔 전체에 불이 나가게 하기도 하고,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적선 받아 아이스크림을 사먹기도 하고 순수한 아이들이 있는 공간 자체는 그 하나의 즐거운 놀이터가 된다. 아이들은 그 곳에서 어떠한 제약이나 간섭도 받지 않고 정말 있는 그대로 마음껏 논다. 아이들이 있는 곳 어딜가나 즐거운 놀이터가 될 수 있지만 이는 동시에 아이들이 자신들의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도 의미한다.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쉽게 위험에 노출된다. 소아성애자의 타겟이 되기도 하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해서는 안되는 것과 해도 괜찮은 도덕과 윤리 개념을 갖추지 못하고 위험한 행동을 저지르기도 한다. 아이들이 아무리 순수해도 그들이 연약하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은 여전히 변함없다.



아이들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삶이란 어떨까. 아이들이 아무리 순수하다고 해도, 아이들은 어른들이 살고 있는 현실을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은 자신이 왜 학교에 가지 못하는지, 왜 부모님들이 자신을 두고 나가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니는 “나는 어른들이 울려고 하면 바로 안다”고 말한다. 어른들이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 알고 있기에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떼쓰거나 매달리지 않는다. 아이들은 아이들만의 방식으로 세상에서 살아남는다. 천식이 있어서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한다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더라도 어떻게든 돈을 받아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디즈니랜드에는 들어갈 수 없더라도 소들이 돌아다니는 곳을 보며 동물원이라고 이야기하고, 히치하이킹까지 해서 차를 얻어 타고 먼 곳으로 나가 다른 행사장에서 터지는 폭죽을 보며 친구에게 생일 축하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은 이 영화를 지탱하면서도 사랑스럽게 만드는 유일한 힘이기도 하다. 비록 어른들의 삶이 비극적으로 최악으로 향할지라도 아이들은 그 안에서 너무나도 반짝 반짝 빛난다. 이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들은 바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이들을 보면 웃음이 나면서도 마음 한켠이 씁쓸해진다는 것을.



아이들의 시선과 어른들의 삶 간에 더욱 큰 괴리감을 만드는 것은 영화의 색감이다. 영화의 주 무대인 ‘매직 캐슬’은 그 이름에 걸맞게 파스텔톤의 색감으로 가득 차 있다. 연보라 색의 ‘매직 캐슬’과 플로리다의 따사로운 햇빛 그리고 영화 여러 곳곳에서 보이는 알록달록한 색감 등등등. 특히 ‘매직 캐슬’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나오는 핑크빛 호텔을 연상시킨다. 그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두 영화가 극명하게 다르지만. 영화의 알록달록한 색감과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져 아이들이 있는 공간은 어떤 곳이든 활기찬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어딜가든 아이들과 함께라면 꿈동산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에도 어쩔 수 없이 현실이 침범하는 순간이 존재한다. 그때는 바로 무니가 엄마 핼리와 이별해야 하는 순간이다. 무니는 자신이 엄마와 떨어져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대로 도망쳐서 자신의 절친한 친구 젠시에게 달려간다. 젠시에게 자신이 엄마와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해도 무니는 차마 그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 감정이 너무나 슬프고 무거워서 말할 수 조차 없는 그런 현실의 무게가 무니에게도 다가온 것이다. 무니가 펑펑 눈물을 흘리면서 말할 때 영화 속에서 내내 상충되던 아이들의 천진난만함과 어른들의 현실은 드디어 조우한다. 가장 비극적인 순간 담담하게 아이들과 어른들의 현실을 교차시키던 영화는 유일하게 환상을 보여준다. 아이들에게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가까이 갈 수 조차도 없었던 환상의 나라 디즈니랜드로 데려다 주는 것이다. 무니가 울먹거리며 아무런 말도 못하자 젠시는 무니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달려간다. 빠른 템포로 돌아가는 화면은 아이들을 현실에서는 한번도 부모님과 와볼 수 없었던 디즈니랜드로 데려다주며 끝을 맺는다. 비록 아이들이 직접 와볼 수 없었지만 영화는 나름의 위로를 전하는 것이다. “내가 왜 이 나무를 좋아하는지 알아? 쓰러졌는데도 자라나서”라고 무니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러한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아이들은 희망을 본다.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아이들에게는 희망이있다. 아직 자라나지 않은 아이들의 미래에는 무수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현실이 아무리 비참하고 처참한 것일지라도 자그마한 희망이 들어갈 여유가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영화가 현실을 보여주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최대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다큐멘터리, 만들어낸 이야기이지만 최대한 가공을 줄이면서 보여주는 극사실주의 영화, 실제의 스토리를 다루면서도 최대한 극적으로 만들어낸 드라마 등등등. 현실은 영화 속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저마다 다른 결을 드러낸다. 영화가 현실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선 여러 입장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영화가 현실을 다룰 때 특히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란 삶을 현미경처럼 들여다 보면서도 그 위에 나름의 색을 더하는 것이다. 너무 현실을 현실 그대로 담아내지도, 그렇다고 그 현실을 너무 가공해서 현실의 진실을 못 알아보게 만들지도 않는 중도가 필요하다. 영화가 어떤 현실을 다룰 때 삶을 항상 있는 그대로 보여줄 필요는 없다. 암울한 삶을 암울한 삶으로 보여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안일한 생각일 수도 있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삶을 바라보는 방식도 모두 다르다. 그런 다양성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고 깊은 사색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을 괴롭고 아프게 만들지만 참으로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천편일률적인 삶이 아닌, 내가 지금 사는 곳과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주고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가진 힘이고, 영화가 가진 진짜 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냥 슬퍼보였던 영화 속 어른들과 아이들이 언젠가는 이 삶 속에서 숨어있는 무지개를 만날 수 있으리라 희망을 갖게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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