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 플레이어 원> 현실과 가상세계로 ‘사랑’을 이야기하다.
※ 본 리뷰에는 <레디 플레이어 원>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수많은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완벽하게 대중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영화이다. 대중들에서도 여러가지 층이 있는데, 특히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대중문화를 향유했던 소위 ‘덕(Otaku)’들을 위한 완벽한 맞춤 영화이다. 이 영화를 보면 영화 제작비의 절반 이상이 저작권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라는 걱정 아닌 걱정이 들다가도 그가 만들어낸 제작물을 보면 그들이 알아서 갖다 바쳤다는 소리(?)가 왜 나왔는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정도로 매끈한 결과물에 놀라 수긍하게 된다. 특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작품이 이렇게 놀라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감독이 만들어내는 작품들 사이의 엄청난 간격들 때문이다. 이다지도 환상적으로 대중들의 코드를 잘 읽어내는 영화를 만들어내다가도 <레디 플레이어 원>의 전작이 1970년대 ‘펜타곤 페이퍼’ 사건을 다룬 <더 포스트>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의 엄청난 필모그래피에 머리를 탁 치게 된다. 그만큼 스티븐 스필버그는 <죠스>, <쥬라기 공원>부터 지금까지 아직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담아내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라는 감독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게끔 한다.
다시 <레디 플레이어 원>으로 돌아와서, <레디 플레이어 원>은 사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늘 영화 속에서 주장해오던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는 작품은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중요시 이야기해왔던 것처럼 <레디 플레이어 원>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늘 이야기하는 ‘사랑’의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랑’을 둘러싸고 있는 외피이다. 그의 작품이 언제나 놀라운 이유는 바로 이 주제를 둘러싼 외피가 늘 달라지기 때문인데,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는 현실과 가상세계를 ‘사랑’이라는 주제의 외피로 선택한다. 일반적으로 수많은 대중문화 속에서 현실과 가상세계는 늘 엄격하게 구분되어 왔다. 상투적인 이분법 속에서 현실은 늘 사람들이 벗어나고 싶어하는 공간이고, 가상세계는 이러한 현실의 괴로움을 잊도록 만들어주는 일종의 도피처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초반도 가상세계 공간의 이름이 ‘오아시스’인 것처럼, 주인공인 ‘웨이드’ 나이대의 아이들을 ‘사라진 세대’라고 부르는 것처럼 가상세계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훌륭한 도피처로 등장한다. 영화는 현실과 가상세계, 두 세계를 단순히 이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현실과 가상세계는 마치 뫼비우스의 띄처럼 이어져 있어서 하나의 우주 속에 있는 공간들처럼 현실은 가상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가상세계도 이러한 현실의 영향을 받고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 이렇게 서로 영향력을 주고 받는 두 세계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가치가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논하기 전에 먼저 현실에서 가상세계로 넘어가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두 세계가 하나처럼 연결되어 있는 만큼 현실에서 가상세계로 넘어가는 지점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모네 집에 얹혀 살면서 세탁기 위에서 잠을 청하는 주인공 웨이드. 웨이드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도피처는 바로 가상세계인 오아시스이다. 오아시스 속에서 웨이드는 자신의 이름이 아닌, ‘파시발’이라는 이름의 헌터이다. '파시발'(Percival)이라는 이름이 아서 왕 이야기에 등장하는 궁정 기사의 이름인 것처럼 그는 가상 세계 속에서는 현실의 자신을 잊어버리고 그 역할에 몰두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이 ‘웨이드’가 ‘파시발’이 되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처음 웨이드가 가상 세계로 넘어갈 때 카메라는 웨이드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서 HTC VR기기를 쓰기 직전의 눈을 비추고 그 상태에서 바로 고글 속 화면으로 넘어간다. 웨이드가 현실세계에서 가상세계로 넘어가는 순간 관객들도 가상세계로 같이 빠져든다. 단순한 컷 전환이 아닌 주인공과 관객이 같이 가상세계로 넘어가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하여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이 장면이 중요한 것은 관객들에게 가상세계에 대한 시각적인 쾌감뿐만 아니라, 현실과 가상세계 간 존재하는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것은 두 세계의 간극을 지나치게 넓히거나 두 세계의 간극을 막기 위한 봉합이 아닌 각자 다른 특징을 가진 두 세계를 인정하면서 두 세계를 안정적으로 구분하고 각 세계 속에 각자의 삶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종의 안전선인 셈이다. 현실의 웨이드가 가상세계에서는 파시발이더라도 그 본질은 웨이드라는 것이 변함없는 것처럼 현실-가상세계로의 연결, 그리고 그 사이 얼핏 보이는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 속 틈을 비추는 찰나를 통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현실과 가상세계를 하나의 선형 구조처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영화는 시종일관 화려한 시각효과로 매끈한 가상세계를 보여주지만, 그 가상세계의 화려함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관객들은 영화가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등장하는 레이싱 장면에서 넋을 잃을 것이다. 마치 게임의 한 장면처럼 관객들을 시종일관 빠져들게 만드는 화려한 시각효과는 대중영화로서 완벽한 면모를 보이지만, 곧 이러한 가상세계의 달콤함이 지나간 뒤 현실의 문제가 끼어든다. 이는 두 번째 단서를 찾기 위해 갔던 행성에서 파시발이 아르테미스에게 자신의 진짜 이름인 ‘웨이드’를 이야기할 때이다. 여기에 세 가지 열쇠를 얻기 위해 단서를 노리던 거대기업 IOI가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가상현실에 위험이 닥친다. 이 위험을 통해 가상세계 속으로 현실이 잠입하며, 현실과 가상세계가 뒤섞이면서 두 세계에 모두 위기가 닥치는 순간이 찾아온다. 가상세계로 들어온 현실의 위협은 이것이 실제(reality)가 아닌 만들어진 세계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동시에 두 세계가 언제든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작품에서 늘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랑’은 유토피아적인 환상과 같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삶 속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이지만, 사랑이란 가치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오히려 잊혀지기 쉽다. 결국 우리가 지향하면서 살아가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을 구현하기에는 너무 힘든 가치들임에도 불구하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그것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그 가치들은 단순히 한번 말하고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과 가상세계에 대한 태도를 영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냈던 것처럼 영화는 엔딩에 이르기까지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유토피아적 환상’을 드러낸다. 감독의 영화 속에서 늘 드러나왔던 것처럼 <레디 플레이어 원> 속 환상은 어느 정도 현실에 기반을 둔 환상으로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한 회피가 아닌, 비루한 현실 속에서도 얼마든지 꿈을 꿀 수 있는 희망을 가진 환상이다. 가상 세계에서 자신만의 삶을 즐기기 위해 살던 사람들이 오아시스를 자본주의의 함락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하나로 모여서 전쟁을 하는 장면은 오아시스가 단순히 삶의 도피처가 아닌 또 다른 삶의 방식임을 드러낸다. 가상세계 속 전쟁은 현실세계에서도 곧 구현된다. 웨이드 일행이 궁지에 몰려 다시 빈민가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그들을 응원하고 소렌토가 그들을 쫓아왔을때는 그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기 위해 나선다. 이는 서로 영향력을 미치던 두 세계가 하나로 합일되는 순간이다. 가상세계와 현실이 만나는 그 지점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로 겹쳐지면서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살 것인가를 되돌아 보게 만든다. 바로 이러한 지점들이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하는 모든 대중영화들을 단순한 블록버스터가 아닌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영화로 만들어준다.
첫 부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영화는 사랑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웨이드와 사만다 두 캐릭터 뿐만 아니라 할리데이, 오르젠, 헬렌 등 다양한 캐릭터들을 활용한다. (물론 그 중에서도 웨이드와 사만다의 비중이 가장 높겠지만)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연인간의 사랑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좀 더 폭넓게 이야기한다면 이는 인류애 즉, 휴머니티와 직결된다. 인간 전체에 대한 사랑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서 명확해진다. IOI의 대표 소렌토는 웨이드를 죽이기 위해 그가 게임을 플레이 하고 있는 트럭으로 쫓아간다. 이때 웨이드는 가상세계에서 할리데이가 준 골든 에그를 받고 감격스러워 하고 있는데, 그 순간은 소렌토가 웨이드를 죽이기 위해 문을 연 순간이었다. 그 트럭에서 오직 웨이드 만이 소렌토가 자신을 죽이려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때 소렌토는 그의 손에 골든 에그가 있고 그로 인해 웨이드의 손이 황금 빛으로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소렌토는 이때 얼마든지 웨이드를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지 않는다.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그를 죽이지 못했다는 것이 맞다. 이 장면은 그가 아무리 악당이라고 하더라도, 그에게 참회의 기회가 주어지는 순간이다. 그것은 그가 주인공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싹싹 비는 직접적인 의미에서 참회가 아닌, 삶의 경이로운 순간을 맞이할 수 있게 악인에게라도 한번 더 기회를 주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회이다. 이러한 '사랑의 가치'가 드러나는 순간은 현실과 가상세계가 직접적으로 조우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거의 유일하게 현실과 가상세계를 동시간대에 보여주는 장면인데, 항상 평행선처럼 일렬로 진행되던 두 세계가 비로소 하나의 선처럼 합쳐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말하는 '유토피아적 환상'이 어떤 한 세계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가 이어지는 그 순간 찰나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분법적인 의미에서 권선징악이 아닌, 가상세계와 현실이 겹쳐지는 그 틈에서 삶의 놀라운 순간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이러한 지점들은 결국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1차원적인 사랑이 아니라, 모든 인간 전체를 품는 높은 차원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표면적으로 본다면 온전히 덕들을 위한 영화일 것이다. 이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이 수많은 캐릭터들을 영화 속에서 완벽하게 녹여냄으로서 덕후들(?)의 심장도 저격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그 표면만큼이나 영화 속에 녹아 든 핵심적인 키워드인 ‘사랑’과 이를 현실과 가상세계라는 두 공간을 통해 표현하는 그의 연출 방식에 더욱 감탄했다. <쥬라기 공원>, <죠스>, <E.T>와 같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통해 이야기해오고, <터미널>, <캐치 미 이프 유 캔>, <뮌헨>과 같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설파해왔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이제 <레디 플레이어 원>에 이르러서는 가상세계와 현실을 융합시키면서 자신의 '유토피아적 환상'을 영화적으로 완벽하게 녹여냈다. 깨닫고 나면 늘 뻔한 레퍼토리이지만, 그 레퍼토리를 뻔하지 않고 매번 새롭고 놀라울 정도로 참신하게 보여주는 것. 이처럼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모든 타겟층까지 아우를 수 있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지평이 어디까지 더욱 넓혀질 수 있을지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