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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Jun 28. 2018

‘산다’와 ‘잘 산다’ 그 중간에 들어갈 형용사

마음 속 짐을 대처하는 청춘의 자세, <변산>

※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영화를 관람하고 작성하였습니다.

※ 이 리뷰는 영화 <변산>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늘 그러하듯 영화를 보는 '재미'가 있는 작품들이었다. 익살스러움 속에서도 항상 휴머니즘이 빛이 났다. 이번 <변산>에서도 어떤 것을 보여줄 것인지 궁금함도 들었지만, <박열>이 생각보다 내 취향에 맞는 영화는 아니었기에 살짝 걱정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궁금함 반, 약간의 걱정 반 섞인 마음으로 <변산>을 보았다. 영화를 보기 전 생각했던 모든 걱정과 우려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변산>은 내가 상반기 봤던 영화 중 베스트로 꼽은 최고의 영화가 되었다. <박열>에서 느꼈던 세련되지 못한 것 같은 지나친 강직함 혹은 우직함이 사라지고 조금 더 어깨에 힘을 풀린 느낌이었다. 마치 옛 친구에게 편하게 이야기하듯 덤덤하게 털어놓지만, 그 속에서도 따뜻한 위로와 위로 뒤에 묵직한 진리를 전해준달까. 최근 극장에서 봤던 영화 중 가장 마음이 따뜻해진 채 극장을 떠날 수 있었던 영화, <변산>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변산>에서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던 점은 다른 이의 비극을 전시시키지도, 지나치게 동조하지도 않고 중립을 잘 지켰다는 점이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수 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여러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마음을 힘들게 하는 사람은 본인 마음의 짐을 방패로 삼아 자신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자신만 아니라 주변인들까지 비극으로 마음을 옭아매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래, 솔직히 고백한다면 이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의 이야기이다. 내가 살아왔던 시간들 중에서 나에게 비극이 닥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나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겼고, 남들도 나를 계속해서 불쌍하게 봐주고 나를 돌봐주기를 원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비극에 대한 나의 태도는 내 스스로를 옭아매 나를 불쌍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고, 주변인들조차 지쳐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그것들을 통해서 나에 대한 내 삶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고, 나는 최선을 다 해 나를 비극적으로 만드는 것을 경계하게 되었다. <변산>에서 학수는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변산>을 보는 동안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과거의 내 자신이었는데, 자신의 과거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학수를 보면서 나는 내 자신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되돌아 보게 되었다.



사실 <변산>의 스토리는 크게 특별한 것은 아니다. 특별할 것 없는 주인공,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 그럼에도 <변산>이 최근 들어서 봤던 영화들 중 가장 빛나보였던 이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이야기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영화의 시놉시스처럼 학수는 쇼미더머니에 6년째 참가하고 있는 래퍼지만 단 한번도 제대로 본선이 진출하지 못했던 흔히들 이야기하는 ‘루저’에 가까운 남자였다. 주차 알바와 편의점 알바를 하고, 고시촌을 전진하며 근근히 삶을 이어가는 남자. 스스로를 서울 출신이라 이야기하는 학수는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면서 눈 앞에 평생 잡히지 않을 꿈을 향해 힘겹게 쫓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아버지의 병 소식이 들려온다. 계속 자신을 서울 출신이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고향을 부정해왔던 그에게 본질을 직면하게 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아버지의 병을 알리는 한 통의 전화 때문에 학수는 결국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변산으로 되돌아온다. 영화에서 변산은 단순히 지명적인 위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학수는 그곳에서 여러 사람들을 재회한다. 서울에서 다시 만났던 자신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짝사랑 상대, 자신의 시를 가로채갔던 교생 선생님, 자신이 어린 시절 괴롭혔던 초등학생 동창 그리고 자신이 평생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자신의 아버지까지. ‘변산’은 말 그대로 학수가 그 동안 자신이 제대로 직면하지 않았던 과거를 조우하는 장소이자 잊어버렸던 자신의 본질을 되찾는 향수의 공간이다.  



우연한 기회에 고향에 돌아와서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날 수 없게 된 학수는 그곳에서 과거와 달라진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자신보다 더 강한 힘을 갖게 된 초등학교 동창, 자신을 짝사랑하는 못난이라 생각했는데 문학소녀가 아닌 자신의 꿈을 이뤄 작가가 된 고등학교 친구, 자신의 시를 훔쳐가 공모전에서 당선까지 되었으면서 권력욕만 앞서는 기자가 된 교생 선생님, 여러 남자를 상대로 끼부리는 여우가 된 아름다운 첫사랑 상대 등등등. 추억으로 가득한 변산이 학수에게 잊고 싶은 공간이 된 것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사람들이 변한 것처럼 학수도 변해 있었다. 그렇지만 학수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기 보다는 살아남기 위한 그만의 생존방식에 가까웠을 것이다.



학수는 왜 그렇게 변하고, 변산에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인가?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한 것이었다. 홀로 학수를 키워내며 어렵게 삶을 살아왔던 어머니 마저 돌아가신 뒤, 학수는 고향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사람이 의지하던 것이 사라진 순간의 느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다. 이 세상에 어떤 것도 내 편이 아닌 느낌, 나 혼자 이 세상에 버려져 있는 느낌. 이러한 종류의 느낌들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만들며, 그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고 싶어지게 만든다. 그것이 벗어날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기에 학수는 자신의 고향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서울로 올라갔을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나 어디로든 가고 싶었기에. 하지만 인생이 그러하듯 도망친 곳에서 안식은 찾을 수 없다. 고통은 언제고 다시금 얼굴을 내밀며 삶을 계속해서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학수가 계속해서 쇼미더머니를 도전했던 이유는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었기에 도전을 포기할 수 없던 것이었다. 학수는 그렇게 마음 속으로는 깊숙히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의 괴로움 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도망치고 방어하기에만 급급했다.



이런 학수에게 고향에서 마주해야하는 가장 큰 산은 바로 아버지였다. 자신의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자신과 어머니를 방치했던 아버지. 어머니가 아플 때도 그저 돈만 쥐어줄 뿐이었고, 어머니의 장례식 장에도 오지 않았던 아버지. 사실 학수에게 내재되어있던 모든 분노들은 다른 이들이 아닌 아버지를 향한 것이었다. 자신이 세상에 버려졌다는 느낌을 강력하게 심어주었던 아버지의 부재는 학수 안에서 쌓이고 쌓여 랩을 통해 폭발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학수 안에서 소화가 제대로 되지 못했기에 그 모든 감정들은 랩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학수 안에서 침잠되고 말았다. 그가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던 것도 그의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이런 감정들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다루는 장면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는데, 그것은 학수의 아버지가 병실로 들어오는 순간 연출된 화면이다. 학수의 아버지가 입원한 병실 건너편에서 누군가 죽음을 맞이하고 들것에 실려가는데, 가까운 가족인 할머니가 오열하고 옆에 있던 어린 꼬마애는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다. 병실 문 앞에서 오열하는 할머니, 옆에 서 있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보이고 그 옆으로 학수의 아버지가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이 장면은 묘한 환기를 불러 일으키는데, 멍한 채 지켜보는 어린 아이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제대로 돌봄 받지 못했던 학수의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이며, 어떤 이가 맞이한 죽음이 곧 아버지에게도 닥칠 수 있는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부터 학수뿐만 아니라 관객들은 아버지의 병이 나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님을 직감한다.


또한 학수와 아버지의 관계에서 중요한 다른 장면은 서로에 대한 감정이 극에 달한 채 학수가 아버지를 향해 주먹을 날리는 장면이다. 자신도 마찬가지로 주먹을 쓰는 깡패였지만, 자신의 아들만큼은 그런 식으로 살기를 바라지 않았던 아버지는 학수에게 건달이 되지 말라고 말하고, 아버지에게만큼은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학수는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르며 싸우다가 결국 감정에 북받쳐 아버지를 향해 주먹을 날린다. 이 장면은 있는 그대로 본다면 자식이 아버지를 향해 주먹을 날리는 패륜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학수가 아버지에게 주먹을 날리는 것은 자신이 그동안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감정을 정리하는 순간이다. 아버지에게 학수가 느끼는 감정은 서운함, 분노 등 여러 감정이 있었지만 학수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그 감정을 온전히 표현하지 않고 비꼬는 방식으로만 드러냈다. 아버지에게 소극적인 공격밖에 할 줄 몰랐던 학수는 드디어 주저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주먹을 날린다. 자신이 그동안 마주하지 못했던 과거를 똑바로 마주치고 정리하는 순간인 것이다. 결국 학수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자기가 평생 살면서 부정해왔던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이며, 그런 아버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고통과 상처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학수의 주먹을 맞고 나서도 “그래 주먹은 그 정도면 되었어”하는 것도 아버지가 이제 아들에게 품고 있었던 마음의 짐을 놓는 것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와의 감정 채무를 정리한 뒤, 학수는 아버지에게서 진정으로 독립해 이제 현실의 자신을 마주하러 간다. 자신의 초등학교 동창에게 잘못 걸려(?) 변산 내에서 동창의 운전기사를 자처하는 초라한 그의 모습. 자신을 포기한 채 힘의 권력에 굴복해왔던 학수는 그것을 극복하러 간다. 자신이 잘못했던 과거는 진정으로 사과하고, 자신이 잘못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 학수는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겪는다. 자신을 괴롭혔던 고통을 더 이상 고통이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오히려 발판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삶. 학수는 이제 고통의 수면 아래 머무르지 않고 빠져나와 고통을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는다.



그렇기에 그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바른 길을 알려주었던 친구 선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녀에게서 자신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소중한 노트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 '내 고향은 폐항,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 밖에 없네'라고 말하며 노을의 아름다움을 알려주었던 과거의 학수처럼 현재의 선미는 학수에게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는 자신의 본질을 다시금 되찾게 해준다. 물론 옆에서 바른 이야기를 해주는 그녀도 평탄한 길만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학수를 짝사랑했지만 항상 학수에게 찬밥 신세를 받기 일쑤였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무원이지만 제대로 거동조차 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며 병수발을 해야만 했다. 그녀는 결코 자신의 고통을 마음의 짐으로 여기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으며, 결국 그 꿈을 이뤄내고 만다. 그녀가 학수에게 말하는 것처럼 "값지게 살지는 못해도 후지게 살지는 말어!"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마음 속의 무거운 짐 하나가 있었기 때문에 난 떠내려가지 않을 수 있었어.



언제 어디에서인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고아로 태어나 모진 세상 속에서 힘든 일만 겪고 살아야만 했던 사람이 남긴 글이었는데, “그래도 나는 마음의 짐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을 수 있었다”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글이었지만 나는 그 사람의 문장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사람은 고통을 마음의 짐이라 표현했지만 그에게 있어 그것은 짐이 아니라 하나의 추와도 같았다. 사람의 인생에서는 언제나 고통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체화시키느냐는 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그 사람은 남들이 생각할 수 없는 모든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 고통에 잠식되지 않고 고통을 마음의 추로 삼아 자신의 인생을 잘 살아나가고 있다. 산다와 잘 산다의 차이는 바로 이런 것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하게 산다고 해도 그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어떻게 고통마저 자신의 것으로 삼아낼 것인가가 바로 잘 사는 것이다. <변산>에서 이준익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도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더 인생을 많이 살아온 어른이라고 해서 ‘나도 이렇게 힘들게 살았는데 너네는 왜 그렇게 못해!’하고 다그치는 꼰대가 아니라 이준익 감독은 이 시대의 청년들이 갖고 있는 고통에 대해 깊이 공감을 하면서도 그 고통을 어떻게 처리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정말 어른답게 알려준다.



<변산>을 홍보할 때 쓰는 워딩들 중 하나가 ‘청춘 3부작’인 것처럼 이준익 감독의 작품들 속에서는 늘 청춘이 있었다. <동주>에서는 그 청춘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박열>에서는 그 의문을 직접 행동에 옮겼다면, <변산>에서는 ‘청춘’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고통을 자양분으로 삼아 개화한다. 흔히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고통 없이는 사람이 클 수 없다고. 고통을 겪지 않는 이들에게 이 문장은 정말 단순하고 평범한 문장이지만 고통을 겪어본 이들이라면 이 문장이 얼마나 비수가 되는지 잘 알 것이다. 가끔 너무 힘이 들어서 마치 고통이 나를 삼켜 질식사 시키려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고통을 고통으로 여겨 도망치지 말고 그 모든 고통 속에 내가 있고, 본질인 나는 그 고통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게 된다. 고통은 내 삶의 추가 되어 내가 앞으로 살아가는데 더 이상 세상에 휩쓸리지 않게 무게를 잡아준다. 이는 앞으로 내가 살면서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라는 달콤한 말이 아니다. 고통은 언제금 또 다시 나를 향해 비밀스럽게 다가오다 갑작스럽게 덮쳐올 것이다. 그럴 때 고통에 잠식 당해 좌절하지 말기를. 나에게 일어난 어떤 일도 부정하고 않고 온전하게 받아들이며 고통을 똑바로 마주하고 우악스럽게 삼켜버리자. 고통이 내 안에서 소화가 되면 나는 더 이상의 어제의 내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살아갈 또 다른 내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학수처럼 ‘금의환향 콤플렉스’를 벗어버리고 완전한 ‘나’로 개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바로 ‘청춘’이라 이야기하며 청춘 3부작을 완벽하게 마무리해준 이준익 감독에게 Ch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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