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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Oct 21. 2018

꼭 그렇게 해야만 가슴이 후련했나요?

참을 수 없었던 <펭귄 하이웨이>에 대하여

※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영화를 관람하고 작성하였습니다.

※ 이 리뷰에는 <펭귄 하이웨이>의 스포일러 및 부정적인 의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오직 애니메이션 속에서만 가능한 판타지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많이 접할 수 있는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에서와 같이 거대한 풍선을 타고 날아가는 꿈같은 모양새일수도 있고, 흔히 재패니메이션이라 불리는 <아키라>와 같이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통해 사회에 대한 풍자를 그려내는 것일 수도 있다. 즉, 현실 속에서 벌어질 수 없는 다양한 일들을 표현의 제한 없이 마음껏 그려낼 수 있는 것이 사람들이 애니메이션에게 바라는 점이자, 애니메이션이 갖는 가장 강력한 힘일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서 애니메이션을 통해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과연 장점일까 단점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 의문은 <펭귄 하이웨이>를 보고 나서 시작되었다.



사실 이 영화는 픽사 애니메이션이나 지브리 스튜디오처럼 모든 이들이 즐겁고 편안하게 볼 수 있는 대중적인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스토리는 상당히 다양한 갈래로 해석이 가능한 영화이다. 어른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한 소년, 그 소년의 마을에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한 펭귄, 그리고 펭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성인 누나까지. <펭귄 하이웨이>는 판타지의 외양을 갖추고 있지만 스토리를 간단하게 풀어 설명한다면 이 영화는 성장담에 가깝다. 판타지적으로 풀어낸 성장담은 많이 존재하지만 이 <펭귄 하이웨이>는 그 결이 다르다. 이 영화는 사실 굉장히 불친절하다.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그 이야기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지 영화는 대중영화의 틀을 통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즉,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하지 않는다는 소리이다. 영화의 스토리텔링이 ‘불친절’하다고 해서 그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물론 수많은 ‘예술 영화’들의 스토리텔링은 상당히 불친절한 편에 속하지만 좋은 영화의 필수 조건이 ‘불친절한 스토리텔링’은 아닌 것이다.



미성숙한 소년이 어른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한 성인 여성과 함께 풀어나가며 세계를 구한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을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 영화는 어느 하나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소년이 ‘누나’라고 부르는 치과에서 근무하는 성인 여성은 물건을 던지면 펭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녀의 정체가 무엇인지 영화의 끝 부분에 이르러서 등장하지만, 그런 결론을 알려주기 전까지 영화는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아무것도 힌트를 주거나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사건만을 보여준다. 그 사건이란 마을에서 계속해서 펭귄이 나타나는 것이며, 마을 중심에 있는 정체 불명의 존재인 ‘바다’에 대해 파헤치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 시나리오에서는 보통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하면, 그 사건을 해결하기 전까지 추가적인 사건을 보여주지 않는 편이다. 실사 벌어졌다고 해도, 그 사건이 어느 정도 해소되어 가는 듯한 뉘앙스를 보인 뒤 넘어가는 것이 정석이다. 물론 이것은 정석에 불과하지만 이 정석은 영화들이 일반적으로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이 영화는 어떠한가? 마을에서 정체불명의 펭귄이 나타났다. 그 펭귄을 만들어내는 것이 자신과 친하게 지내는 ‘누나’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누나를 연구하면서 미스터리를 파헤치려 한다. 하지만 여기서 갑자기 다른 사건이 발생한다. 마을 깊은 곳 숲 속에서 정체불명의 존재 ‘바다’를 같은 반 친구가 알려준다. 펭귄에 대한 연구는 중단되고 갑자기 그 ‘바다’에 대해 친구들과 연구를 하기 시작한다. 사실 ‘바다’가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이지만, 두 가지 사건을 서로 연결지어 설명하기 위해 영화는 사건들을 관객들에게 무작정 던지고 본다. 영화가 관객들에게 던진 사건들은 궁금증과 호기심을 자극한다기보다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더욱더 의뭉스러움만 주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밝혀지는 것들은 하나도 없고, 머릿속에서는 계속 물음표만 남는다. 조금씩 단서가 보이는 의문점은 관객이 계속 이야기를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지만, 의문만 계속 이어지고 해결되는 지점이 없어질 때 관객들은 더 이상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지치게 마련이다. 딱 <펭귄 하이웨이>가 그러하다.



결정적으로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여성에 대한 대상화’이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의 가슴이 부각되지 않는 순간은 거의 없다. 조금이라도 이야기에 몰입하려고 하면 어김없이 가슴이야기가 나온다. 오프닝에서부터 나오는 누나 가슴에 대한 연구를 집중적으로 담은 공책, 엄마와 누나의 가슴은 구조적으로 다르다는 연구의 내용, 생크림 위에 딸기가 올라간 돔 모양의 케이크를 보고 가슴을 닮아서 좋다고 말하는 주인공의 대사, 누나가 밥을 먹지 않고 굶어보겠다고 하자 누나는 가슴이 작아지기 때문에 밥을 안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주인공의 대사 등 등 등. 이렇게 묘사한 부분 외에도 <펭귄 하이웨이> 속 가슴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사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여성의 가슴을 부각시키는 부분은 늘 존재해왔던 부분이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묘사가 관습적으로 등장한다고 해서 이것이 현재에도 당연하게 받아질 이유는 없다. 여성의 가슴에 대한 묘사가 불편한 이유는 첫째,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정말 순수한 어린 소년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성인 남성이 어린 소년의 눈을 빌어서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둘째,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더욱 강화시키는 장치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점들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영화 속에서 누나가 어린 소년을 부르는 호칭이다. 영화 속에서 누나는 소년을 소년의 이름인 ‘아오야마’로 부르지 않는다. 누나는 항상 “안녕, 소년”이라고 말한다. 누나가 소년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것처럼 소년도 누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아니, 영화 속에서 누나의 이름이 등장했는지 조차 의문이다. 단 한번도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는 존재는 말 그대로 대상 즉, 사물에 불과하다. 즉, 어린 소년에게 누나는 단순히 자신의 성적 욕망을 투사하는 하나의 대상에 불과한 것이다. 또 하나 어린 소년이 성인 남성의 욕망을 대리하고 있다는 점도 큰 문제가 된다. 어린 소년은 말 그대로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어린 남성이다. 어린 남성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고, 세상의 모든 이치에 대해 아직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이유로 순수성을 갖는다. 문제는 이 어린 남성의 순수성과 성인 남성의 성적 욕망이 결합하는 순간이다. 성인 남성의 성적 욕망은 어린 아이의 순수성으로 도치된다. 성인 남자의 성적 욕망이 어린 아이의 순수성의 범주에 포함되면서 어린 소년이 보여주는 모든 행동들이 ‘그 나이 때에는 그럴 수도 있지’라는 자연스러운 합리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순수성과 욕망은 서로 다르다. 특히나 성인 남성의 욕망들을 자연스럽게 어린 아이의 시선에 대입시킴으로써 욕망을 순수성에 결합시키려고 했다는 부분이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이러한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가 왜 문제가 될까? 아무리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영화는 한 사람의 무의식 속에 스며들어 그 사람의 인식에 크던 작던 영향을 미친다. 이 영화를 본 남성들에게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 그것은 소년이 성장하는 아름다운 스토리가 우선이겠지만, 그 무의식 속에는 '성인 여성=가슴'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인식이 자리잡을 지도 모른다. 이는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여성을 보는 순간 가슴을 우선적으로 인식하는 오류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 신체의 일부분을 파편화시켜서 바라보는 것은 할리우드 느와르 무비에서 팜므파탈의 첫 등장 순간 그녀를 분절화된 신체로 보여주는 것과 동일한 연장선상이다. 대사이든, 장면이든 전체 화면 내에서 하나의 존재로 온전하게 담기지 못하는데, 누가 이 ‘여성’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누나의 캐릭터가 온통 수수께끼에 싸여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누나의 정체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에 그 캐릭터에 대해 더욱 드러낼 수 없는 것이 맞지만, 왜 캐릭터의 성격을 묘사하는 것이 아닌 출렁거리는 가슴을 묘사하는 것에만 집중했을까? 영화는 그녀가 왜 펭귄을 만들어내는지, 왜 어떤 때는 펭귄을 만들어내고 왜 어떤 때는 재버워크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녀는 소년의 연구대상일 뿐이며, 하나의 캐릭터로서 살아 숨쉬는 것이 아니라 소년이 성장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이러한 지점들을 제외하면 <펭귄 하이웨이>는 괜찮은 영화였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실제로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는 나름대로 공감을 하는 편이다. 내가 받아들였던 <펭귄 하이웨이>의 메시지는 바로 “각자의 삶에는 모두 그 시간대에 맞는 속도가 있다”는 것이었다. 어린 아오야마는 스스로를 엄청나게 똑똑하다고 자처하며,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난 뒤 자신의 삶에 맞는 속도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릴 때 흔히 어른들이 이야기해주었던 것처럼 어렸을 때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나름대로 재기발랄한 상상력으로 풀어낸 것처럼 보였다. 지금 내 인생의 속도를 초조해하지 말 것. 인생에서는 그 나이 대에, 각 사람간에 맞는 속도가 있는 것. 개인적으로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주요 메시지는 바로 이 부분이라 생각했다.



과거 내가 일본 애니메이션들을 좋아했던 이유는 기괴함, 철학적인 메시지, 자유로운 표현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애니메이션 속에서 여성에 대한 묘사가 '여성'인 내가 보기에 조금은 아니다 싶었을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들이 주는 메시지들이 그런 단점을 사소한 것으로 보이게 할만큼 너무나 훌륭했기에 내게는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펭귄 하이웨이>는 다르다. 자유로운 상상력에 대한 풍부한 묘사보다 오히려 가슴에 대한 묘사에 더욱 집착하면서 작품의 메시지를 완전히 가려버린다. 원작 소설은 어떤 또 다른 내용 혹은 묘사가 포함되어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시대착오적인 표현 방식으로 결국 실패한 성장담이 되고 말았다. <펭귄 하이웨이>는 소년의 성장을 이야기하기 전에 소년이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지를 먼저 연구했어야 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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