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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Oct 27. 2018

역사가 사람을 지울 때, 사랑은 사람을 어루만진다.

사려 깊게 상처를 매만지는 <폴란드로 간 아이들>

※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영화를 관람하고 작성하였습니다.

※ 이 리뷰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맨 처음 <폴란드로 간 아이들> 시사회를 신청했을 당시, 난 영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어떠한 편견 없이 글을 써보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이기도 했고, 영화에 대한 편견이 없을 때 내 글이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한 마음이 드는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폴란드로 간 아이들>의 감독이 배우 추상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조금 놀라웠다. 부산국제영화제 등 다양한 영화제에서 꾸준히 단편을 출품해온 추상미 감독이 첫 장편 영화를 내다니. 단편 영화와 달리 긴 호흡을 가진 장편 영화 속에서 과연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지점은 바로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이다. 추상미 감독은 북한이 과거 감당할 수 없는 전쟁고아로 인해 이들을 사회주의 국가로 보내는 이야기를 전할 때, 동정심을 유발하거나 불쌍한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이들이 낯선 땅에서 어떠한 생활을 보냈는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들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폴란드 선생님을 보여주면서 최대한 담담하게 아이들이 뛰어놀았을 고아원의 풍경을 보여준다. 이는 목숨을 걸고 북한 땅에서 우리나라로 넘어온 탈북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배역에 응모하기 위해 오디션을 보는 이들의 모습을 평범하게 그려내면서 이들이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를 진솔하게 보여준다. 낯선 땅에 있지만, 수업을 열심히 듣는 과거 속 아이들과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 나가는 현재 아이들의 모습은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남한 아이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영화는 이러한 평범한 아이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역사에 내던져졌는지를 상세히 다룬다. 국가적으로 감당이 안돼 여러 나라 곳곳으로 보내졌던 전쟁고아들은 다시 국가의 부름을 받는다. 폴란드에서 생김새는 다르지만 누구보다도 다정했던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던 아이들은 다시 북한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국가의 명령에 따라 아무것도 모르고 폴란드로 왔다가 다시 강제로 북한으로 되돌아갔던 아이들. 아이들은 북한에서 폴란드로 되돌아가고 싶어 했지만,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는 ‘꽃제비’로 불렸던 탈북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살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넘어왔다. 자신이 있던 곳을 두려워했던 아이들은 겨우 남한으로 넘어왔지만, 이곳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고 수많은 차별을 받은 뒤에는 자신의 속내를 내비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시간의 격차가 벌어져있지만, '대의'라는 이름 하에 어린아이들은 모두 강제로 희생당하고 이리저리 휩쓸려야만 했었다. 이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왜 추상미 감독은 폴란드로 넘어갔던 전쟁고아들에 대해 취재하면서 탈북소녀 송이와 함께 갔을까? 탈북 아이들과 폴란드에 강제로 보내졌던 전쟁고아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역사 속 희생당한 영혼들이다. 항상 타의에 의해 움직이며 상처 받을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 이것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모든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이들이었다. 이렇게 끝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역사 속에서 상처 입은 아이들을 치유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어른들’이다. 이 어른들에는 전제조건이 붙는데, 바로 자신의 상처를 사랑으로 바꿀 줄 아는 어른들이다. 폴란드인들은 서로 말도 통하지 않는 어린아이들을 정성스럽게 돌보았다. 그들은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준다는 심정으로 한 명 한 명 사랑으로 품었다. 이들이 이렇게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 내면에 있던 전쟁에 대한 상처 때문이었다. 프와코비체 양육원 교사들 중 상당수는 아우슈비츠 전쟁의 공포를 간직하고 있는 전쟁고아들이었다. 그들은 아시아 아이들에게서 자신들의 상처를 보았고, 그 상처를 감싸 안으며 사랑으로 돌보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쟁고아들은 현재 남한에서 자신들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탈북 아이들로 겹쳐지며, 폴란드인들과 전쟁고아들의 관계는 정확히 현재의 우리들과 탈북 아이들로 연결된다. 마치 평행선처럼 이어진 이러한 구조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아이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여기서 추상미 감독은 결국에는 이들에 대한 ‘사랑’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결국에는 사랑’이라고 말하는 해결책은 우리가 머리로는 너무나 중요한 것을 알고 있지만, 오랫동안 이야기해왔던 것들이기에 낯간지러우면서도 진부한 이야기일 것이다. 추상미 감독은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가 아닌, 함께 여행하는 송이를 그저 있는 그대로의 한 인간으로 존중해준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북한에서 있었던 일들은 이야기하지만, 중국에서 있었던 일은 말하는 것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송이를 보면서 추상미 감독은 작품을 위해서가 아닌, 어떻게 하면 이 아이가 자신의 상처를 잘 회복할 수 있을까를 먼저 고민한다. 이러한 인간적인 머뭇거림은 상대에 대한 배려이고, 상대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일어날 수 없는 것들이다. 추상미 감독이 얼마나 이 아이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는지는 아이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의 속내를 내비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던 송이가 모든 여정이 끝난 뒤, 바닷가에서 북한에 두고 온 동생을 향해 울부짖고, 추상미 감독은 눈물을 흘리는 송이를 안아준다. 사상이나 이념, 그리고 편견을 모두 버리고 같은 위치에 서서 서로를 안아주고 함께 슬퍼해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일 것이다. 역사는 개인의 흔적과 고통을 끊임없이 묵살시키고 지우지만, 이를 계속해서 보듬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상처를 주는 것도 ‘사람’이지만, 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사람’인 것처럼.  



다큐멘터리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아무런 허구나 과장 없이 보여주는 것만은 아니다. ‘내가 어떠한 사실을 보여주고자 할 때, 나는 그것을 통해 무엇을 더 드러내 보일 수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진정한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한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에서 때때로 연출한 것 같은 화면들이 등장한다. 이 화면들은 우리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고, 전쟁고아들에 대한 사실이 하나씩 밝혀질 때 진실들과 함께 쌓여가며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 진가를 드러낸다. 상처가 되었던 과거의 역사가 드러났을 때 이를 피하지 않고, 서로의 다름으로 너와 나의 경계를 만들지 않고 맞잡은 두 손으로 ‘우리’가 되는 것. 카메라가 점점 뒤로 물러나면서 모든 풍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엔딩에서 추상미 감독은 자신이 던졌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상처를 주고 그들의 흔적조차 지워버린 사람의 역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다시 꺼내어 회복시키는 것은 ‘사랑’이라는 뻔하지만 묵직한 진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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