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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Nov 06. 2018

일상 속에 침잠한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다

<시>에서 '고통'을 다루는 방식에 대하여

※ 이 리뷰에는 <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버닝>으로 엇갈리는 반응을 받았지만, 이창동 감독은 분명 한국영화사 속에서 늘 중요하게 언급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항상 엄격한 내러티브를 준수하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정해진 서사적 패턴이 있으며,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어긋남 없이 스토리가 전개되는 편이다. 그 고전적인 서사 내에서 항상 이창동 감독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삶을 살면서 한 번쯤은 느꼈을지도 모르는 ‘고통’이다. 허문영 평론가의 책에서 이창동 감독은 "고통을 다루는 게 즐거움을 다루는 것보다 덜 불편해서"라고 말하며 자신이 왜 계속해서 고통을 다루는지 말한다. 사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이 ‘허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보는 순간 동안은 그것이 진실인양 믿으면서도 극장 밖을 나가는 순간에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가 이러한 성질을 갖고 있지만,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다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극장에 나가서도 잊어버릴 수가 없는데, 그것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 속에서 어딘가 모르게 우리와 닮은 사람들이 나와 우리가 살면서 한번쯤은 느꼈을지도 모르는 고통을 그대로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창동 감독의 짧은 필모그래피 속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강렬했던 <시>가 그 고통에 대해서 가장 잘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 이 <시>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시>의 오프닝 장면은 이창동 감독의 다른 어떤 영화보다 특별하다. 이창동 감독은 영화에서 보통 초반에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으로 시작하다가 그 표면 아래 감춰진 다른 것들을 들춰내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와 달리 <시>는 초반부터 일상적인 삶의 표면 아래에 있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 한 평화로운 시골의 강가에서 여러 명의 소년들이 놀고 있다. 그중 한 소년이 강에서 무언가가 떠내려오는 것을 발견한다. 소년은 강가로 가까이 다가가고, 강물에 따라 소녀의 시체가 떠내려온다. 그 시체 옆으로 타이틀 <시>가 떠오른다. 시체와 타이틀 '시'의 대비는 끔찍할 정도로 냉정해 보인다. 소녀의 시체는 영화 후반부에 드러나는 미자의 ‘시’와 연결된다. 소녀의 죽은 몸은 그 자체로 소녀가 세상을 향해 보내는 하나의 ‘언어’이다.  그렇지만 이 소녀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영화는 첫 시작에서는 어떠한 정보도 제공해주지 않는다.  이 현실의 끔찍함을 여과 없이 보여주면서 영화는 우리가 진정으로 마주해야 할 고통의 민낯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자는 문학 강의를 듣고 나서 자신 주변에 있는 사물을 다시 보기 시작한다. 그녀는 바깥에 나와 앉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풍경을 본다. 바람에 흔들리는 햇빛 비치는 나뭇잎과, 바닥에 떨어져 있는 살구와, 음식점 마당에 심어진 맨드라미를 본다. 시를 배우기 시작한 순간부터 미자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워 보인다. 자신이 먹으려고 내놓은 사과와 집안에 쌓여 있는 설거지를 본다. 미자가 사물들을 보면서 적은 시상은 영화 속에서 텍스트가 되어 드러난다. '새들의 노랫소리 무엇을 노래 하나.', '시간이 흐르고 꽃도 시들고', '살구는 스스로 땅에 몸을 던진다. 깨어지고 밟힌다. 다음 생을 위하여.' 이같이 미자가 계속해서 무언가를 적어 내려 가지만, 이 시상들은 모두 하나의 시로 수렴되지 못하고 흩어진다. 미자는 단순한 사물을 볼 때는 쉽사리 시상을 적어내지만, 희진과 연관된 것에 대해서는 쉽사리 시상을 쓰지 못한다. 미자가 희진의 사건을 처음 접하게 된 장면은 미자가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나와 걸어갈 때이다. 구급차 옆의 들것에는 물이 뚝뚝 떨어져 있고, 그 옆에는 넋이 나간 듯 한 희진의 어머니가 횡설수설하며 돌아다니고 있다. 희진의 어린 동생은 어머니의 신발을 두 손에 꼭 쥐고 어머니의 옆을 따라다니고 있다. 딸과의 통화를 하다가 이 이상한 광경을 보고 멈춰 선 미자는 한참을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돌아선다. 미자는 이 장면에서 단지 궁금해서 두 모자를 바라볼 뿐이다. 이때 미자의 시선은 단순히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이다. 나와 연관된 것이 아닌 그저 내 눈 앞에 놓인 사람을 ‘대상’으로만 보는 감정 없는 시선. 이 감정 없는 시선 속에서 타인의 고통은 그저 나와 분리된 것일 뿐이다. 미자는 희진이 자살했던 강가로 찾아가 그 강가의 돌에 앉아 시상을 적어보려고 한다. 이때 갑자기 미자가 펼친 노트 위로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다른 사물들에 대해 쉽게 시상을 적을 수 있었던 것과 달리 미자는 희진의 사건에 대해서는 한 줄도 제대로 적지 못한다. 생명체 아닌 대상을 바라볼 때 사람은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미자가 사물들을 통해 시를 쓸 때 큰 어려움이 없이 시를 쓸 수 있었던 것도 거기에는 어떤 감정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 ‘시’라는 텍스트로 수렴되지 못하고 떠도는 ‘잉여’들은 내러티브 속에서 축적되다가 미자가 제대로 사건을 보게 되었을 때, 마지막 미자의 ‘시’를 통해 제대로 드러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대부분 ‘고통’을 표현하는 동시에 고통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고통을 재현한다는 것이 가능할지. 그리고 이 질문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묻는다. 이에 대한 질문은 <시>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창동 감독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시키려고 애쓰기보다는 타인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한다. 그만큼 <시>에서 ‘본다’는 행위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영화 속에서 미자는 시상을 얻기 위해 여러 사물들과 생명체를 바라보는 동시에, 오프닝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희진의 사건을 제대로 바라본다. 여기는 ‘본다’는 의미는 단순히 시각적인 정보를 얻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제대로 알고 직면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도 연결된다. 엄밀히 말한다면, 영화 속에서 캐릭터들이 겪는 고통은 스크린 밖에 있는 나와는 분리되어 안전하게 차단되어 있다. 그렇지만 <시>를 보고 있는 동안 캐릭터들의 고통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 되어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사건을 바라보며 제삼자의 입장에 서 있다가 가해자의 입장에 서게 된 미자처럼 타인의 고통은 영화 모든 과정을 참여하고 내러티브를 따라가던 관객 안으로 깊숙이 스며들게 된다.     



<시>는 다른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그러하듯 우리가 살면서 한 번쯤 마주칠지도 모르는 인물들을 영화에 전반적으로 내세운다. 이렇게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인물들은 모두 평범함을 위장하고 있는데 이창동 감독은 이들의 내면에 감춰져 있던 섬뜩함을 드러내 보인다. 특히 다른 영화들과 달리 <시>는 초반에서부터 섬뜩함을 드러내는데, 이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갖는 섬뜩함이 아닌, 현실의 민낯에서 오는 섬뜩함이다. 이런 현실의 섬뜩함은 종종 미자의 표정과도 겹쳐진다. <시>에서 미자의 얼굴을 보여줄 때 주로 클로즈업에 가까운 바스트 샷이다. 노래방에서 기범이 아버지와의 대화가 끝난 뒤 미자의 얼굴이나, 손자가 저지른 짓을 알게 된 뒤 파출부로 일하는 집의 화장실 거울 속 미자의 얼굴에서는 모두 서늘함이 느껴진다. 미자의 서늘함 뒤에는 모두 현실의 섬뜩함이 가려져 있다. 미자는 자신의 현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하지만, 현실의 섬뜩함은 미자의 뒤편에서 새어 나와 그녀의 얼굴을 서늘함으로 뒤덮어버린다. 미자의 얼굴 뒤편에 있던 현실의 섬뜩함이 극에 달했을 때는 ‘슬픔’이라는 감정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미자가 희진의 미사에 찾아갔을 때, 미자가 강노인과 관계를 맺을 때 이러한 미자의 슬픔이 드러나는데, 미자가 섬뜩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현실과 마주할 때 억압되었던 감정이 터져 나온다. 서늘함-슬픔으로 연결되던 감정의 연결선은 마지막에는 죽음에 다다른다. 미자의 얼굴 표정에서 죽음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종욱에게 피자를 사 주는 장면이다. 미자는 종욱에게 집에 가서 몸도 깨끗이 씻으라고 말한다. 이 대사를 말할 때 미자의 얼굴은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이다. 이 장면은 마치 미자가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손자에게 온정을 베푸는 것 같이 묘사되어 있다. 미자의 죽음은 영화 속에서 드러내 놓고 묘사되지 않지만, 미자의 시는 마치 미자의 죽음으로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미자는 희진이 자살한 장소에 찾아가서 강가를 내려다보다가 자신의 모자를 강에 빠뜨리고 만다. 검은 강가에 둥둥 떠내려가는 미자의 하얀 모자는 마치 미자가 이 세상을 떠나려고 하는 것처럼 맥없이 흘러간다.     



이창동 감독의 전작 <밀양>이 ‘자신에게 닥친 고통을 온전히 수렴하기 위한 한 개인의 몸부림’이었다면, <시>는 여기서 더 나아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라고 윤리적 태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윤리는 도덕과 같이 사회적 틀 내에서 지켜야 할 틀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이다. <밀양>에서 피해자였던 주인공은 <시>에서 역전되어 가해자가 되었다. 그것은 영화 속 캐릭터에게도 해당되는 말이고, 영화 밖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우리는 <시>를 통해 모두 가해자가 된다. 하지만 관객들은 쉽게 가해자의 자리에 서지 못한다. <시>에서 모든 카메라는 캐릭터에 이입하는 것이 아닌, 캐릭터 옆에 한 걸음 물러나 있다. <시>에서는 미자의 시선으로 보이는 화면이 거의 없다. <시>에서는 어떤 캐릭터를 불문하고 쉽사리 감정 이입할 수 있는 모든 시선이 배제된다. 단 한 장면에서 주관적인 시선이 드러나는데, 그것이 바로 <시>의 마지막 장면이다.


미자는 '아네스의 노래'란 시만을 남겨두고 어딘가로 사라진다. 미자는 시를 쓰고 나서 완전히 희진과 동화된다. 이 '시'에서 화자인 희진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살고 있던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과 수줍어 돌아앉은 들국화까지도' 너무나 사랑했다고 말한다. 이창동 감독은 이 시를 통해 단순히 고통이 벌어진 현실을 끌어안으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현실을 끌어안기에는 그 현실이 너무 크고, 어둡고 섬뜩하다. 대신 이창동 감독은 이 '시'를 통해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강물로 뛰어들기 전 어린 소녀의 얼굴은 우리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외면해왔던 현실의 민낯이다. 이 뒤로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었던 강물이 다시 보이며, 카메라가 어두운 강속으로 점점 내려가며 마치 강물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보인다. 물 흐르는 소리가 계속 들리고, 이내 화면은 점점 어두워진다. 영화가 끝나고, 현실로 돌아가는 순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 소녀를 잊어버리겠지만, 그 소녀의 얼굴과 미자의 시만은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이 얼마나 크고 괴로운지 고통의 포르노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피해자가 받은 고통을 ‘가해자’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가해자의 위치에서 서서 그 모든 행동에 책임을 지고 고통을 받아들임으로써 이전과는 또 다른 나로 성찰하는 것. 영화는 이렇게 몸소 캐릭터를 통해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전달한다.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영화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희진의 시점 샷이 보인다. 미자의 목소리로 읽던 시는 어느 순간 희진의 목소리로 바뀐다. 미자가 사는 아파트 앞, 희진이 학교를 가던 골목길과 버스정류장, 버스를 향해 뛰어가면서 따라잡으려고 하는 남자아이, 자연스러운 일상의 풍경은 어느새 과거의 사건이 된 희진의 죽음과 상충하며 묘한 이질감을 자아낸다. 이창동 감독은 이 <시>를 통해 일상 속에 감춰져 있었던 현실의 민낯을 드러내며 죽음에 가장 근접하게 다가선다. 그 죽음은 단순히 인간의 육신에서 영혼이 빠져나와 이 세상을 떠남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희생된 한 생명이 잊히는 것이 바로 죽음임을 드러낸다. 이창동 감독은 깊은 영화적 텍스트를 통해 이런 희생자의 고통을 담아내고, 그것을 우리가 보게 만든다. 가해자가 도망가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사건을 제대로 바라보았던 것처럼, 우리가 평범한 일상을 위장한 채 가려왔던 현실의 맨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게 만든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100% 이해할 수 없다. 그렇지만 현실에 아무것도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수면 아래에 침잠해 있던 고통들을 불러내어 각자의 위치에서 제대로 보게 하는 것. 그것이 이창동 감독이 고통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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