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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Dec 26. 2018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진짜 우정이 시작된다

가이드북이 필요 없는 진정한 우정을 말하는 <그린 북>

※ 이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영화를 관람하고 작성하였습니다.

※ 이 리뷰는 <그린 북>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수많은 경계들이 존재한다. 그 경계들이란 사회 속에서 섞일 수 없는 이들을 갈라놓기 위한 경계일 수도 있고, 내가 나와 다른 이들을 구분하여 안전한 공간에 머무르기 위해 만들어놓은 경계일 수도 있다. 이 경계는 나와 타인에 대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자 동시에 나와 다른 이들이 사는 곳의 선을 넘지 않겠다는 불가침의 약속이기도 하다. 경계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암묵적으로 수용하기도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경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경계 안이 언제까지고 안전하다고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린 북>은 바로 이 '경계'를 다루는 영화이다. <그린 북>의 두 주인공인 토니 발레롱가와 돈 셜리도 서로의 경계가 완고한 사람들이었다. 사실 두 사람은 살면서 전혀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이고, 서로의 경계를 넘겠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에 오직 자신의 주먹 하나만 믿는 ‘토니’와 교양과 우아함으로 가득한 피아니스트 ‘셜리’.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단순히 성격이나 살아온 환경의 차이뿐만 아니라, 백인과 흑인이라는 인종의 차이로 인해 더욱 특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 속 배경은 인종차별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던 시절인 1962년 미국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차이는 이 둘이 처음 만나는 장면부터 명확하게 드러난다. 맨 처음 전화를 받고 면접을 보러 갔을 때, 관객들은 너무도 극명하게 드러나는 두 사람의 차이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게 될 것이다. 독특한 것들이 가득한 응접실에서 화려한 의상을 입고 화려한 의자에 앉아 한 단계 높은 곳에서 토니를 내려다보는 셜리 박사와 그보다 한 단계 낮은 곳에서 평범한 의자에 앉아 셜리 박사를 올려다보는 토니. 처음부터 “우리는 서로 이렇게 달라”라고 보여주는 장면은 이들이 얼마나 다른 경계에서 살아온 인물들인지 단적으로 드러낸다. 영화는 두 사람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면서 이렇게나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지 궁금증을 자극한다. 두 사람의 차이가 드러나는 또 다른 예는 바로 ‘언어’이다. ‘흑인’이지만 박사 학위를 받아 우아하고 품위 있는 영어를 쓰는 셜리와 거칠고 이태리식 억양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토니의 언어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는 셜리 박사가 토니에게 하는 대사에서도 드러나는데, 주로 사교 모임을 다니며 피아노를 연주해온 셜리 박사는 자기 자신을 위해 토니에게도 우아한 영어 쓰라고 하고, 심지어 미국인들이 그의 이름을 발음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토니 발레’로 소개하기를 강요한다. 이들의 차이는 이들이 얼마나 다른 경계에 존재하는 인물들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며 과연 이렇게나 다른 인물들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을지 궁금증을 자극한다. 



한편으로 이 차이는 '흑인'이 받아야 했던 차별을 보여주며 그 당시 흑인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보여준다. 매장에 걸려있는 옷을 입어볼 수도 없었고, 목욕탕에서는 다른 백인과 함께 샤워를 해서는 안되고 더더군다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술을 마실 수 없는 거리. 백인들을 위한 ‘자유’는 존재했지만, 흑인들의 삶 속에서는 자유란 없었다. 그것은 흑인이 어떠한 계층에 속했냐의 문제가 아닌, 온전히 '외양'의 문제였다. 두 사람이 계속 연주를 하면서 여행을 하던 도중 자동차에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차가 멈춰 섰을 때, 셜리 박사가 잠시 내려서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끝도 보이지 않는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셜리 박사가 내리자마자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그의 모습을 빤히 쳐다본다. 그도 그럴 것이, 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흑인이었고, 셜리 박사는 특이하게도 백인 운전수를 데리고 다니는 흑인이었다. 흑인들의 삶에서 ‘경계’란 그들의 원해서 내린 경계가 아닌, 백인 사회가 기득권을 유지하게 위해 자신의 사회와 그들의 사회를 안전하게 구분 짓고자 내린 경계였다. 애초부터 그들에게 경계를 그을 ‘자유’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는 이러한 경계를 통해 인종 문제를 다루면서 두 사람의 차이도 보여주고 있지만, 이를 너무 심각하게 다루거나 단순히 영화 속에서 이들이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지 궁금증을 자극하는 도구로만 쓰지 않는다. 이들의 차이는 영화 속에서 소소한(?) 유머로 녹아들어 극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극장에서 가장 웃음이 터졌던 장면 중 하나는 바로 켄터키 치킨의 맛을 새롭게 알게 된 셜리 박사가 뼈다귀는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장면이다. 토니가 뼈다귀는 도로에 버리면 된다면서 시원하게 도로로 날려버리자 셜리 박사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짓는다. 다 먹은 콜라컵도 토니가 시원하게 던져버리지만, 결벽증이 있는 셜리 박사는 그 모습을 용납하지 않는다. 도로에 버려진 콜라컵을 줍기 위해 토니가 후진하는 장면이 바로 이어지면서 이들의 차이는 단순히 서로의 경계를 강화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녹아들 수도 있는 유머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두 캐릭터가 서로 갖고 있는 ‘차이’를 온전하게 다름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서로 너무나 다른 경계에 있던 사람들이었기에 서로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 토니는 셜리가 흑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소울을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흑인 가수들의 이름을 왜 모르냐고 하면서 ‘당신네들’과 같은 단어로 흑인을 단 하나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이는 셜리 박사로 마찬가지이다. 매일매일 아내에게 편지를 쓰는 토니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맞춤법을 지적하고, 그의 편지를 일일이 고쳐준다.(덕분에 토니는 아내에게 시적인 편지를 보낼 수 있었지만) 영화 거의 끝 부분에서도 서로 진한 우정을 나누게 되었음에도 셜리는 토니가 아직도 감성적인 내용의 편지를 쓰지 못할 것이라 제멋대로 판단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경계에 있던 사람들이 편견과 차별 없이 그 사람만을 온전히 바라보는 것이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오히려 진솔하다. 여전히 서로 다른 환경을 살아왔기 때문에 서로에게 편견과 차별이 있어도 그 본질은 같은 ‘사람’이기에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공식적인 무대에서 단 한 번도 클래식을 쳐보지 못했던 셜리 박사가 오렌지 클럽에서 쇼팽의 에튀드 25번을 치면서 자신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모두 내려놓고 사람들과 자유롭게 어울리며 즐겁게 시간을 보낸 것처럼 그들은 서로의 경계를 넘어 영혼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된다. 



이러한 수많은 좋은 점들에 불구하고 이 영화에는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 그것은 이 영화가 오직 토니 발레롱가의 시점으로만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셜리 박사 유족의 동의를 받지 않고 제작한 이 영화는 아무리 영화의 마지막에 실존했던 두 사람의 사진을 보여주고 그 합당함을 증명하고자 애를 써도, 제작 시기부터 잘못 시작되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셜리 박사 유족이 이의를 제기한 것처럼 이 영화를 어떻게 포장할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 아닌, 어떻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영화적으로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를 먼저 고민했었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존재를 침범하지 않고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면서 경계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두 ‘사람’의 우정을 다룬 <그린 북>은 빛나는 영화이다. 실화와는 별개로 영화 속 캐릭터로서 토니와 셜리가 보여준 매력적인 모습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가두고 있던 경계를 넘어설 때, 우리의 삶은 더욱 자유롭고 풍부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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