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을 대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두 부정적인 시선

- <터널>과 <서울역> 속 묘사되는 한국사회에 대하여 -

by 송희운

**두 영화의 스포일러 뿐만 아니라 <터널> 원작 소설의 스포일러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개봉했던 <터널>과 <서울역>은 언뜻 보기에는 전혀 닮은 점이 없어보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듯이 <터널>은 하정우라는 스타 배우를 앞세운 실사 영화이고, <서울역>은 좀비를 다룬 보기 드문 국산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은 두 영화의 간극을 좀처럼 좁힐 수 없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두 영화를 다루고 묶어서 다루고 싶은 이유는 두 영화가 한국 사회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두 영화 모두 한국 사회의 부정적인 일면을 다루고 있지만, 그 시각은 미묘하게 다르다. 부정적인 것을 어떻게 서로 바라보느냐의 차원에서 두 영화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movie_image 2.jpg 영화 <터널> 속 장면


<터널>은 많은 이들이 언급한 것처럼 세월호 사건과 너무나 많이 닮아있다. 영화는 어떤 거대한 재앙이 벌어진 순간, 우리 사회는 그 재앙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질문하기도 전부터 우리는 모두 그 대답을 알고 있다. ‘세월호 사건을 대하는 정부의 방식과 사람들의 태도는 <터널>과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이 닮아있었다. 서로의 책임을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넘기기에 바쁜 정부, 시간이 지날수록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에 염증을 느껴가는 사람들. <터널>은 상업영화의 외양을 쓰고 있지만 한국 사회를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마치 다큐멘터리와도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상황에서는 우리가 시선을 돌리고 귀를 막으면 그 모든 현실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있다는 착각에라도 빠질 수 있지만, <터널>을 보고 있는 동안은 우리는 그 실재같은 현실에 집중할 수 밖에 없다는 차원에서 더욱더 강압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터널> 속 한국사회는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것보다는 외부의 이익과 서로의 체면을 살리는 것에 급급했고, 그것은 우리가 그동안 여러번 겪어왔던 익숙하고 낯익은 얼굴이었다.


movie_image 5.jpg 영화 <서울역> 속 장면


연상호 감독의 <서울역> 속 한국사회는 좀 더 암울하고 비극적이다. 좀비라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재앙이 닥친 한국 사회는 서로의 목숨을 부지하기에만 바쁜 사회였고, 국가는 국민들을 보호해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재앙을 덮고 무마시키려는데 급급했다.(그리고 그들도 이 재앙을 어떻게 타개해나가야 할지 모른다.) <부산행>에서 연상호 감독이 보여주고자 했던 인간들의 이기주의와 탐욕은 <서울역>에서는 훨씬 더 암울하게 뒤틀려서 드러난다. 한 사람의 불행에 대해 사람들은 소름끼치도록 무관심했고, 자기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없이 총을 들이밀고 이빨을 드러냈다.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좀비는 공평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좀비들은 사람들을 외양이나 계급에 따라 차별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공격하기 때문이다.


movie_image 3.jpg 영화 <터널> 속 장면
movie_image 10.jpg 영화 <서울역> 속 장면


<터널> 속 한국 사회와 <서울역> 속 한국 사회는 암울하고 불쾌하다. 이 불쾌함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에게 이입해서 느껴지는 감정이 아닌, 우리가 여태까지 살아오면 직면하고 싶지 않았던 '헬조선'의 현실을 그대로 들여다본다는 것에서 느껴지는 불쾌함이다. 하지만 두 영화가 한국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그리고 있다고 해도, 두 영화에는 엄연히 느껴지는 차이점이 있다. 하나는 어떻게든 그 속에서 희망을 보고 싶어하는 <터널>과 어디에도 희망은 없고 오직 절망만이 있다고 소리치는 <서울역>이다.


movie_image.jpg 영화 <터널> 속 장면


영화 <터널>의 엔딩과 원작소설의 엔딩은 정반대에 위치해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절대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대경 덕분에 정수 극적으로 구조된다. 이와 달리 소설 속에서 정수는 구조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스스로 차에 불을 붙여 목숨을 끊는다. <터널> 에서 내내 묘사되던 부정적인 한국 사회의 모습이라면 원작 소설의 엔딩이 더욱 현실에 합당할 것이다. 한 사람의 생명보다 누군가의 체면과 누군가의 이익이 더 우선시 되는 사회.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런 엔딩을 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그리고 더욱 많은 관객들이 보기를 원하는 배급사로 인해) 설령 현실과 다를바가 없다고 해도, 현실 속 우리는 아직 희망을 보고 싶어하고 또한 그런 희망이 존재하기를 바란다. 마치 애를 써서 우리가 사는 현실이 그렇게 부정적이지만은 않다고 소리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극적으로 구조되어 자신을 외면하고 멸시하던 세상을 향해 정수가 다 꺼지라고 이 개새끼들아!”라고 외치는 순간부터 어쩌면 영화는 우리가 원하는 환상을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동안 뉴스를 보면서 마음 속에 꾹꾹 눌러 담았지만 한번도 꺼내지 못했던 말을 대신 외친 정수는 그전까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평범한 소시민에서 하나의 판타지 속 영웅으로 거듭난다. 아무도 꺼내지 못했던 말을 영화 속에서나마 실현하는 대리인이 되는 것이다.


movie_image 7.jpg 영화 <서울역> 속 장면


<서울역>의 엔딩은 <터널> 원작의 엔딩보다 훨씬 더 비참하다. 남자친구인 기웅이 돈을 벌기 위해 혜선을 원조교제 사이트에 올린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좀비에 쫓기는 사람들을 총으로 잔인하게 쏘아 죽이는 정부, 그리고 혜선을 애타게 찾아 헤매던 것이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 그녀가 떼어간 돈을 찾기 위해 온 포주였다는 것. <서울역>은 한국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보여주면서 이 곳에는 우리가 원하는 꿈과 희망 그러한 것들이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고 외친다. 영화 속에서도 순간적으로 사람들이 서로를 도울 때가 존재하기는 한다. 혜선과 노숙자 노인 간의 관계이다. 혜선이 죽을 뻔한 위기에서 구해준 노인과 그 노인을 쫓아다니며 돕던 혜선. 이러한 인간애도 잠시 뿐이다. 돌아갈 곳 없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비극적인 죽음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울역>을 보면서는 그렇게 크게 좌절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언젠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아닌, 나와는 엄연히 구분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그것이 설령 우리 사회와 너무나 닮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도), 또 이러한 괴리감을 더욱 가중시키는 이유가 애니메이션이라는 외피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울역>을 보고난 뒤 조금은 찝찝하지만 그래도 이 영화에 대해서 잊고 자신의 안락한 으로 돌아갈 수 있다.


무제-1 복사 2.jpg (좌) <터널> 티저 포스터 / (우) <서울역> 메인 포스터


사실 두 영화 모두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그려낸 상업 영화(<서울역>은 그 경계가 미묘할지도 모르지만)라는 점에서 충분한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한 매체가 동시대의 사회를 그려낸다는 것, 그것만큼 문화의 중요한 역할이 어디있을까. 물론 사람들은 극장을 나오면서 나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는 영화만을 보고 싶을 것이다. 뉴스에서 매일 매일 우리의 헬조선을 다루고 있는 한, 우리는 이 영화들을 한번이라도 마주할 필요성이 있다. ‘헬조선의 민낯을 똑바로 보고 무엇이 잘못되있는지를 정확하게 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헬조선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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