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의미에 대한 성찰 (오규원의 「프란츠카프카」를 읽고)
[1] 프롤로그: 「프란츠 카프카」, 오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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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슐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2] 정(正): 돈, 당신의 능력은 도덕책..?
모든 문학 작품은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통찰을 담은 문답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자본주의 세상에 대한 시인과 세인(世人)들의 물음과 대답이다. 시로써 시인은 “돈으로 무엇까지 살 수 있을지”를 묻는다. 사람들은 대답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건 없어요.”라고. 정말이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없는 세상이다. 돈으로는 정신 활동조차도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다. 오히려 정신 활동은 돈이 되지 않는 헐값의 노동이다. 프란츠 카프카(맞다, 그 유명한 「변신」을 쓴 작가다) 정도 되는 대문호도 단돈 800원이다. 사실 돈으로는 문학과 철학을 살 수 있는데, 문학이나 철학으로는 돈을 벌 수 없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믿지 않지만 그가 말한 유물론은 그럴듯하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살아 숨 쉬는 모든 활동이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는 듯한 불쾌한 기분을 도무지 떨쳐낼 수 없는데, 그 납득되지 않는 ‘불쾌함’에 기대어 생각을 이어가 보기로 한다. 불쾌함의 근원을 찾아가다 보면 오로지 유물론이 전부라는 주장만큼은 반박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오규원 시인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거라고 짐작해 본다.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마주 앉은 그는, 시를 통해 제자가 아니라 세인들을 꾸짖고 싶었던 거다. 시를 공부하겠다는 기특한 제자가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느냐고.
[3] 반(反): 영수증이라는 이름의 일기장
한 장의 영수증에는 한 인간의 소우주가 담겨 있다.
취향이라는 이름의 정제된 일상.
흡연처럼 고치지 못한 악습들.
다이어트를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삼십 대 도시인의 정체성까지
그날 밤 그는 일기를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에겐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답이 있다.
육하원칙에 의한 선명한 일상.
그리고 연말정산이라는 이름의 집단적인 자기반성.
- 백영옥, 「아주 보통의 연애」 중에서
한 장의 영수증이 한 인간의 소우주를 담는다는 표현이 인상 깊다. 「아주 보통의 연애」는 「프란츠 카프카」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자본주의 세상을 통찰한다. 영수증만큼 우리의 삶을 투명하게 반영하는 것이 없다는 작가의 말이 설득력 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내가 사는(買) 것이 곧 내가 사는(活) 것이 아니던가. 영수증으로 증빙되는 모든 소비 습관 속에 나의 모든 생활이 담겨 있다.
「아주 보통의 연애」의 첫 단락을 읽고, 돈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몇 년치의 카드 명세서와 통장 출납 기록을 열람했다. 소설가의 말처럼 카드 명세서와 통장 출납부는 내가 살아온 자취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일기장에도 써 놓지 못한 첫 월급 1,367,130원과 퇴직금 3,768,120원을 출납 기록이 아니라면 어떻게 떠올릴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내가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빙할 수 있었을까. 아니 돈이 아니라면 그 시간, 그 자리에 내가 있었을까.
나란 인간이 살아온 궤적이 돈의 흐름으로 명확하게 요약된다. ‘얼마만큼 벌었고 얼마만큼 썼다’만큼 군더더기 없이 삶을 요약할 수 있을까. 오규원처럼 멋지게 “돈이 전부는 아니에요.”라고 일갈하고 싶은데, 출납 기록을 보며 오히려 돈이 전부라고 반박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어쩌면 좋을까. 마르크스는 현자였나.
[4] 합(合): 출납부에는 기록되지 않는 것들
2010.3.10. 중앙경리단: 1,367,130원
...
2012.7.10. 재정관리단: 3,768,120원
통장 출납에 관한 이야기를 쓰면서, 출납부의 기록이 반영하지 않는 삶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삶에는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경험과 가치, 인식이 있다.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은 경제적 가치로도 환산되지 않는다. ‘중앙경리단 1,367,130’과 ‘재정관리단 3,768,120’을 보고서 모포를 털고 눈길을 쓸며 삶을 자조했던 병영 생활의 그림자와 그럼에도 드문드문 찬란했던 청춘의 광휘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시공을 공유했던 나의 동기들도 그만큼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 녀석들의 어둠과 광휘를 온전히 가늠하지 못했으니까.
숫자는 그 시간 속 희로애락을 알려주지 않는다. 숫자는 숫자이고 돈은 돈일지어니.
출납하거나 영수하지 않은 자리에서도 삶은 존재한다. 때로는 비경제적 활동이 돈이라는 이름으로 둘러진 테두리 밖에서 삶을 더욱 풍요롭고 행복하게 한다. 늦은 밤 졸음을 쫓기 위해 허벅지를 찔러가며 쓴 아내를 향한 연애편지나, 스승의 날 학생들로부터 받은 감사장과 롤링페이퍼는 출납 서류나 영수증을 발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출납하거나 영수하지 않은 일들이기 때문에 편지와 감사장이 더 소중하고 가치 있게 느껴진다.
[5] 에필로그: 돈은 빵이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문장을 자주 판서했다. 말 뜻을 새기려고 한 일은 아니었고 환유라는 문학 개념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판서를 하면서 빵은 원래 먹거리의 일종이지만 여기선 물질적 가치를 나타낸다고 부연했다. 그럴 때마다 이해되지 않는 표정으로 갸우뚱하던 아이들의 얼굴이 생각난다. 아이들은 판서된 문장의 환유도 함의도 이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문장의 함의는 무엇일까. 인간의 삶에는 빵이 필요하다. 먹지 않고 사는 인간은 없다. 그러나 먹는 것만으로 사는 인간도 없다. 배고픈 현자보다는 배부른 짐승이 낫지 않을까 고뇌하는 게 인간이지만, 배부른 인간이 되고 보면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또 인간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경제 활동을 외면하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경제 활동이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행위이다. 그러나 경제 활동에 매몰된 삶은 결코 가치롭거나 행복할 수 없다. 돈벌이에만 몰두한 삶은 역설적으로 경제적 성공도 보장하지 못하며, 설령 많은 부를 획득 하더라도 고독과 허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돈은 행복한 삶을 위한 필요조건은 될 수 있어도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경제 조건을 넘어선 순간, 우리는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사랑, 가족, 건강, 친구, 직업 같은 것들은 좋은 삶을 위해 충족해야 할 여러 가지 필요조건이다. 물론 이러한 조건들은 경제 활동과 온전히 분리되지 않아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느슨하게 혹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런 관점에서도 돈은 필요하지만 전부일 순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나를 위함’에 모인 이곳 작가님들도 「프란츠 카프카」의 미친 제자처럼 돈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시를 공부하겠다는 마음과 글을 쓰겠다는 마음은 무용한 문학 행위를 통해 유용한 삶의 진리를 궁구 하겠다는 당찬 포부라는 점에서 닮았다. 삶의 진리를 구하는 것이 거창한 일은 아니다. 나만의 정답이나 방향성을 찾기 위한 성찰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삼만 원 남짓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시간과 그 속에서 주고받을 대화가 기대된다. 돈에 대한 다른 분들의 생각도 듣고 싶다.
(2023.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