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의미 (나희덕 「당신과 은행」을 읽고)
[1] 시인과 은행
시인은 은행에 가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자주 가야 한다
은행빚을 갚아온 삼십 년 동안
대출 담당자 앞에 앉을 때마다 느껴야 했던 감정들,
끝없이 비워내야 했던 생각들,
빚을 갚기 위해 거리에 쏟아부은 시간들,
열차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종종거리던 날들,
은행 금고에는
저당잡힌 감정과 생각과 시간 들로 가득할 것이다
물론 미래의 시간도 거기 갇혀 있을 것이다
(중략)
시인은 천천히 걷고 있다
터진 은행알을 밟지 않으려 애쓰면서
은행에 저당잡힌 감정과 생각과 시간을 떠올리면서
그러나 정작 은행에 대해서는
시 한 편 쓰지 못했다고 중얼거리면서
- 나희덕, 「시인과 은행」
*시는 전문을 읽어야 더욱 아름다운데, 출간한 지 일 년이 지나지 않은 시를 그대로 인용하기에는 죄송스러워 부득이 일부를 발췌했다.
[2] 당신에게
하루가 지나면 우리 아이의 생일입니다. 우리가 결혼한 날 뒤로, 꼭 하루가 모자란 한 해가 지나 찾아온 아이이지요. 세 돌이 다 되어가는 아이의 케이크를 미리 잘라먹으며 새삼스러운 감회에 젖어드는 저녁입니다. 아이가 자라기까지 퍽이나 많은 시간을 지나왔다는 생각, 그러나 아직 퍽이나 많은 시간이 남았다는 생각을 동시에 가져 봅니다. 아이는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내일 하루는 아이에게 특별한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란 것이겠지요.
그리고 모레는 우리의 네 번째 결혼기념일입니다. 공교롭게도 나를 위함 씀에세이 모임이 있는 날이지요. “하루쯤은 모임을 빠져도 필친들이 이해할 거야. 금요일은 가지 않을게.”라며 불참의 뜻을 밝혔지만, 당신은 소중한 일상을 포기하지 말라며 저를 배려해 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아마도, 야심한 밤에 적어 내리는 오늘의 편지를 모레 저녁에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글은 4주년 결혼을 기념하는 편지이자, 돈에 대한 에세이 과제인 샘입니다.*
두 해 전 가을, 우리 아이가 아직 걸음마를 떼지도 못했을 때 이곳 나를 위함에서 돈을 주제로 글을 썼던 기억이 납니다. 「프란츠카프카와 정반합」이라는 제목이었지요. 10여 년 치의 현금 출납 기록을 살펴보면서, 돈의 흐름만큼 저의 생활과 욕망을 뚜렷하게 증빙하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당신과 주고받던 편지와 사진, 태동을 느끼며 태담을 전하던 저녁, 나신의 아이가 세상에 내어지던 순간의 기쁨, 고요를 가르며 복도를 울리던 아이의 첫 울음소리 같은 것들은 현금의 출납으로는 증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저는 돈이 행복의 필요조건은 될 수 있어도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로부터 2년의 시간이 흘러, 저는 다시 돈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돈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그때의 마음은 변치 않았지만, 행복의 요건이 되는 돈의 액수는 2년 전 가늠했던 그것보다 훨씬 커졌다는 것을 요즘 느낍니다. 아마도 저의 욕망이 나이보다 훌쩍 더 자란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쓰레드(Threads)는 제게 대구 부동산의 이야기를 실어 나릅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다그침을 보며 조바심을 누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보다 저의 욕망을 더 투명하게 통찰하고 있는 알고리즘의 지혜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아닌 듯 시치미를 떼며 외면하고 살았지만 저는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갖겠다는 통속적인 욕심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얼마 전부터 우리 밥상머리의 화두는 이사가 되었습니다. 아이 교육을 위해선 수성구로 가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죠. 우리의 경제 능력이 허락하는 한 가장 좋은 동네는 어디일까. 부동산과 지도 앱을 펼쳐 놓으며 이런저런 고민을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의 집에 이사 오기 전, 그리고 이사 온 직후 느꼈던 충만한 만족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계좌에 남은 부채처럼 저의 마음도 부채로 가득 찬 기분이 들었습니다. 지금의 빚으로도 턱없이 모자라구나. 모자란 빚을 빚으로 채우며 빚을 지고 살아야 할 미래가 잠시 동안 아득하게 느껴졌습니다.
「시인과 은행」에서 화자는 은행 가는 일을 달갑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은행을 향한 발길을 끊을 수 없었습니다. 시적 진술에 담긴 진솔하고도 엄격한 시인의 자기반성으로부터 위로와 공감을 얻습니다. 저 역시 어쩔 수 없이 오는 겨울부터는 다시 은행과 부동산을 자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가지 못한다면 앱으로나마 잔고와 거래 내역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관리라는 이름으로 계좌와 대출을 살피고 궁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숙명인 듯싶습니다. 당이나 혈압 수치를 조절하듯이 대출과 이자를 적정한 수준으로 관리해나가는 것은 생존의 조건처럼 느껴집니다. 어쩌면 대출이란, 새로운 종류의 현대병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대출이란 현대병을 잘 조절한다면, 우리 아이가 ‘좋은 평판’을 얻은 학원과 학교를 다닐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대가로 우리는 얼마간 감정과 생각과 시간들을 은행 금고에 저당 잡히고 말겠지만요. 그리함으로써 아이에게 어떤 미래를 선물할 수 있다면, 그것이 보편의 삶이라면 그리해야 하지 않겠냐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저는 아이의 삶을 두고 다른 도전을 해 볼 만큼의 용기를 갖지 못한 아빠입니다. 그 점이 미안하고 서글프고 부끄럽습니다. 아이에게나 당신에게나 스스로에게나 그렇습니다.
그렇게 아이가 졸업할 무렵, 우리 가족은 어떤 모습으로 자라고 늙어 있을까요. 시인조차도 외면하지 못한 저당의 굴레로부터 그때는 자유로워질 수 있으려나요. 금고에 저당 잡힌 감정과 생각과 시간들을 인출할 미래는 언제일는지 저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너무 늙거나 늦지 않은 시간에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바랄 뿐입니다.
[3] 무소유와 평균인, 그리고 당신
법정 스님은 『무소유』에서 많이 가질수록 많이 얽혀 있는 것이므로 적게 가진 자가 더 많은 인생의 자유를 누린다 하였습니다. 그가 종교인으로서 청빈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문형배 판사는 『호의에 대하여』에서 행복은 내 재산이 많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가난한 사람이 없어야 생기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는 좋은 판사가 되기 위해 경제적으로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신념을 갖고 살았고,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에서 그 검소함이 화제가 된 바가 있었습니다.
나희덕 시인은 그들과는 다른 시선에서 「시인과 은행」을 통해 물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어떤 경제생활을 누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겸손과 반성을 내려놓지 않은 그녀의 시작(詩作) 활동으로부터 세속적 욕망을 잘 통제하고 규율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짐작해 봅니다. 저의 삶과 저의 정신은 그들의 청빈과 검소에 비추어 볼 때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요. 그들과의 비교에서뿐만 아니라 2년 전 「프란츠카프카와 정반합」을 쓴 저 자신과의 비교에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런 저의 고민을 듣고 있을 당신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어쩌면 내일 전할 이 편지가 저의 물음이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혼을 기념하는 편지라기엔 목적을 잃었다는 생각이지만 그럼에도 편지를 놓지 않는 까닭은 이런 저조차도 따뜻하게 위로할 만큼 당신은 좋은 아내라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민을 하는 것도 대단한 거야, 라거나 평범한 생활을 하는 우리로서는 당연한 고민이라는 게 당신의 대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고 혹여 따끔한 충고라 할지라도, 저는 새겨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2년 전의 글 「프란츠카프카와 정반합」에 비추어 한 걸음도 성숙하거나 나아가지 못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저는 한 가닥 희망을 가져 봅니다. 제 곁에 있는 우리의 아이 그리도 당신이 저의 희망입니다. 보잘것없는 결혼기념일 꽃 다발에도 함박웃음 짓던 당신, 크지 않은 생일 케이크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 마지않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려 봅니다. 그 웃음을 위해 얼마간의 용돈과 생활비를 써야 했지만, 그리하여 얻은 우리 가족의 기쁨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경험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저의 주변에서 기능하는 커다란 사회의 욕망으로부터 온전히 초연하고 자유로울 자신이 아직은 없습니다. 법정 스님이나 문형배 재판관처럼 청빈하기도, 나희덕 시인처럼 엄격하게 성찰하며 경계하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욕망의 흐름에 저의 삶의 모든 것을 맡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가장이 되겠습니다. 어제, 오늘 그랬듯 현금 출납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소하지만 눈부신 행복들을 외면하지 않고 살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욕망으로부터 비껴 서서 고유한 가치로 스스로를 빛낼 수 있는 인간이 되겠습니다. 그런 남편, 아빠가 되겠습니다. 언젠가 다음 기회에 ‘돈’을 주제로 글을 쓸 수 있다면, 그때는 조금 더 나아간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저의 이런 다짐은 당신이 존재하므로 가능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어떤 물질적 가치도 초월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진 모든 물질을 내어 놓아야 할 순간이 오더라도 당신을 잃을 수 없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곤히 잠든 당신을 몰래 안으며 당신의 체온이 주는 따스함으로부터 제가 가진 그 어떤 것보다 큰 위로를 받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그에 필적할 만큼 소중한 우리를 꼭 닮은 딸까지 세상에 내어 놓지 않았습니까.
내일 읽기에 조금 부끄럽겠습니다만, 오늘의 씀에세이 글은 이렇게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내일 모임에서 이 글을 어떻게 읽고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감당할 그 시간의 부끄러움에 앞서, 내일 아침 식탁 위에 올려진 이 글을 보며 미소를 지을 당신의 얼굴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어 보겠습니다.
결혼을 기념하는 편지로 이런 글을 쓰는 저를 이해해 주는 당신, 정말로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이번 주 씀에세이 과제는 ‘돈’입니다.
*편지는 9월 10일부터 11일까지 이틀에 걸쳐 작성했습니다.
- 2025년 9월 11일 남편, 정호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