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편지로부터

청춘이 보낸 전언(傳言)

by 박정호

[1] 프롤로그: 어떤 편지


생일 축하드립니다! 대망의 31번째-! (만 서른이시군요ㅎ)

이제 빼박 서른이십니다! 정말 진심을 다해, 온 열과 성의를 다해 축하드려요. 참 본인 생일날에 열심히 남 생일 편지를 쓰고 선물을 챙기는 저도 서럽지만 이제 정말로, 만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서른”, 즉 앞자리에 3자를 다신 선생님께선 얼마나 고뇌가 깊으시고 심적 부담과 만 가지 감정이 교차하실까요.

- 2017.1.13. 전○○ 학생이 쓴 편지에서



[2] 블로그를 열다


블로그를 연다. 정확히 말하면 다시 연다. 7년 만인가. 조회도 방문도 없는 블로그를 살피며 나는 중얼거린다. 7년 쯤 방치해 둔 집이 있다면 이런 모양새가 아닐까 싶다. 우선은 카테고리를 정리한다. 계통 없이 적었던 7년 전의 글과 새롭게 쓰고 있는 근래의 글들을 모으기 위해서다. 예전의 글이 지금의 글과 닮은 듯 달라서 감회가 새롭다. 대견하고 안쓰러웠던, 시절의 기억들이 드문드문 떠오른다. ‘쓰는 사람: Cyworld’ 카테고리에 넣어두기로 한다.


모든 글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체로 흑역사다. 이건 사람들에게 공개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며 혼자 중얼거린다. 물론 거의 아무도 읽지 않으리란 것을 잘 알지만, 마음이 쓰인다. 그렇다고 시원하게 삭제할 만큼 모질지도 못하다. 폐물(廢物)들을 수납장에 감추어 놓듯, ‘삭제’라는 이름의 비공개 게시판을 만들어 보관한다. 마음이 놓인다. 각색과 정리는 미래의 나에게 맡겨 둔다. 나머지는 ‘쓰는 사람:마음씀’과 ‘쓰는 사람:씀에세이’에 차례차례 싣기로 한다. 이 정도면 번듯하다 싶다. 숙원 사업을 이룬 기분이라 뿌듯해진다.


의외로, 소수이지만 나의 블로그에 사람들이 방문한다. 뜻밖에 ‘공감’이란 표시의 하트(♥)를 받고, 띄엄띄엄 댓글이 달리기도 한다. 누구세요. 싶은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반응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감사한다. 장사를 시작하는 소상공인의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그들의 블로그에 방문하여 공감을 누르고 댓글을 쓴다. ‘블로그를 통해 1년에 20억을 번 평범한 직장인’의 이야기를 그래서 읽어 본다. 블로그를 하는 일이 평범한 직장인의 삶만큼이나 쉽지 않게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가장 어려운 점은 글에 들인 공(工)과 공감, 조회의 수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5분만에 쓴 맛집 리뷰가, 15일에 걸쳐 쓴 나름 정성 글보다도 널리 읽힌다. 전업(專業)을 목적으로 한 일이었다면, 전업(轉業)을 했어야 할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7년 만의 개업(開業)이 금새 폐업(閉業)으로 이어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블로그를 이어간다.



[3] 어떤 전언(傳言)


박정호 선생님. 저 18년도 대구여고 졸업생 전○○이에요. 선생님 블로그 글 갑자기 올라온거 보고 생각나서 연락드렸어요!! 잘 지내시고 계신가요? 저는 학부 졸업하고 지금은 대구 내려와서 대학원 다니고 있어요. 저도 비공개 블로그지만 이래저래 시도 쓰고 가벼운 글도 쓰고 있어서 선생님 글을 보고 기분이 참 이상했어요. 꽤 오랜 시간의 간극이 있음에도 여전히 글 쓰시고 사진 찍으시는 걸 좋아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은 그대로셔서 그런가봐요. (후략)

- ○○여고 졸업생 전○○으로부터 수신한 카카오톡 메시지에서


8년 만에, 예전 학생으로부터 전해진 카톡을 읽는다. ‘시간의 간극’이라는 말에 눈이 멎는다. 누구보다도 먼저 나의 생일을 축하해 준 십칠 세의 소녀는, 이제 스물다섯을 넘은 법학도가 되었다. 그녀는 법학전문대학원에 다닌다고 한다. 그녀의 블로그에서 그런 글들을 읽는다. 법을 공부하기까지의 과정과 법을 공부하여 느끼는 어려움이 글로써 전해진다. 나는 그녀의 글에서 청춘을 읽는다. 그렇다. 아마도,


내가 그녀의 글에서 청춘을 읽듯이,

그녀는 나의 글에서 청춘을 읽었을 것이다.


그녀가 바라보았던 나의 청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분명 지금보다 조금은 더 학생을 사랑했었고, 서른의 나보다는 서른하나의 내가 더 나은 인간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던 나였다. 늘 부족했지만, 늘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인간이었다. 그녀가 서른여덟 나의 글에서 나의 서른을 보았다면, 그러니까 내게 남은 청춘의 흔적을 보았다면, 아마도 그것은 내가 여전히 모자라고 부족한 인간이어서 그럴 것이다. 청춘의 조건은 다름 아닌 ‘결핍’과 ‘열망’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마음씀에선 아래와 같은 글을 썼다.


영원히 부족하지만 그러므로 영원히 깨달아가는,

거짓되지 않아서 쭉정이처럼 흩날려가는 삶이나 문장은 아닌,

그리하여 스스로는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

- 2024년 12월, 마음씀에서


영원히 부족하지만 영원히 깨달아 가며 글을 쓰겠다는 다짐은, 나이가 들어도 청춘을 살겠다는 마음에서 비롯한 문장이 아닌가 싶다. 풀이 돋아나듯 싱그러운 육신이 아니더라도 ‘결핍’과 ‘열망’을 잃지 않는 인간이라면, 늙어서도 글을 쓸 수 있고 또 청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본인의 생일에 나의 생일을 챙긴 마음에 고마움을 느낀 날처럼, 청춘을 일깨워준 그녀로부터 오늘도 뜻하지 않은 고마움을 느낀다.


전○○과 나는 필친을 맺었다. 8년의 간극을 넘어 이제 서로의 글로 교유할 것이다. 우리의 교유가 이번에는 끊기지 않고 오래 이어졌으면 한다. 그리고 그녀는 법으로, 나는 글으로 오래도록 세상과 소통하는 인간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긴 시간 청춘을 살았으면 한다.



[4] 에필로그 1: 다른 전언


[재원]

필친님들 모두 잘 지내고 계신가요? (중략)

원래 목표보단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브런치 작가에 도전해서 합격을 했답니다. (중략)

정호 님, 보림 님도 얼른 합류하셔요!

- 2024년 마음씀 겨울 시즌의 단체 채팅방에서


짧은 전언을 받았다.

브런치에서 작가로 인정 받았다는 필친의 말이었다.


멋있고 축하한다는 답장을 보냈지만,

개운하게 기쁘지마는 않은 기분이었다.


그 개운하지 않은 기시감은,

교원 임용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내가

합격한 친구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던 때의

그 속물적인 부끄러움과 닮은 것이 아니었을까


“(취미, 희망사항) 내 글을 모은 블로그를 열고, 브런치 작가가 된다”

라고 쓴, 2025년 열 번째 새해 목표를 다시 읽는다.


브런치는 조금 남았지만,

블로그는 쓸 수 있지 않겠나.


그리하여 며칠 전부터 블로그를 쓴다.



[5] 에필로그 2:「서시」,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후략)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라는,

한강 작가의 시집을 읽는다.


시집의 말미(末尾)에 수록된 「서시」가

눈을 붙든다.


운명이 찾아와 그와 대면하는

문학적 상상력에 감탄하지만,


그보다 더

자신이 마음에 들었냐는 운명의 말에

그를 조용이 끌어 안고 오래 머물겠다는 시인의 다짐이

인상깊다


누구보다 말을 잘 부려 쓰는 그녀이기에

묵언(默言)의 전언이

혹은 무언(無言)한 끌어안음이

말로 감당할 수 없는 소회에 대한 적확한 표현이라 여긴 것일까


나는 “운명”의 자리에

오늘의 제재가 되는 “청춘”이라는 단어를 갈음해 본다.


청춘이 내게

나의 청춘이 마음에 들었냐고 물어보거든

나도 나의 청춘을 말없이 오래 끌어 안으리.


어느 날 청춘에게

삶의 끝 지점에서의 내 모습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을 수 있다면,

선뜻 나의 청춘도 그때의 나를 묵언(默言)의 전언으로 끌어안아 주기를

소망해 본다.


(2025.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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