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코파이보다 다정한 인간이고 싶다

다정함이라는 가치에 대하여

by 박정호

[1] 多情: 情情情情情情情情情情


다정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군(軍)에서 보았던 초코파이 더미를 떠올려 본다.


정(情)이란 확실히 물질을 기반으로 하는

마음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화수를 길어두는 마음으로 기도하기보다,

"오다 주웠다."라는 멋쩍은 농담과 함께 빼빼로를 내밀었을 때,

아이들은 더욱 해사하게 웃지 않았던가.


다정(多情)하게 쌓인 초코파이 더미 앞에서

신을 믿지 않는 내가 기도할 수 있었고

신앙보다 정이 뚜렷한 시절이 있었다.


情情

情情情

情情情情


어느 날에는 생일을 축하하는 케이크였고

어느 날에는 성탄을 기념하는 트리였으며

어느 날에는 또 다른 무엇이 될 수 있었던

말 그대로 다정-한 초코파이 산을 떠올리며


그럼에도 나는 누군가에게,

높이 쌓아 올린 초코파이보다는 다정해 보이는 인간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아내와 나의 신혼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영화를 본 일이 있다. KBS 인간극장에 출현한 강계열 할머니와 조병만 할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한 독립영화였는데, 76년을 신혼처럼 살아가는 두 분의 이야기가 부부 관계에 대한 깨우침을 주어서 오래 기억에 남았다.


지금도 기억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는 이런 것이다. 어두운 밤,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것이 무서운 할머니를 위해, 할아버지는 딸아이를 배웅하듯 할머니의 손을 잡고 화장실까지 동행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아내를 안심시키고자 노래까지 불러주었다. 일흔여섯 해의 매일 밤 그렇게 손잡아 아내를 화장실로 배웅하고 노래를 불러주는 남편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데 자신 있게 그럴 거라고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 그리되도록 노력하겠다는 겸연쩍은 다짐이 최선이었다. 살아온 만큼 더 살고, 그만큼을 더 살아도 닿지 않는 미래의 이야기는 아득하고 무연했다.


76년쯤 다정함을 간직한다는 건, 아름답지만 은은한 촛불을 오랜 시간 꺼뜨리지 않는 일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다정이란 정서는 화려하고 열정적인 사랑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다정과 주파수가 다른 애정이다. 다정이란 주파수는 소박하지만 초라하지 않으며, 뜨겁지 않지만 그렇다고 온기는 잃지 않은, 소소하지만 따뜻한 배려로 드러난다. 그런 마음이 언행으로 드러날 때, 다정함은 자연스럽게 상대에게 전해진다.


먼 길을 왕래하는 여행길에서 아내의 조수석에 슬리퍼를 놓아두는 일, 무심코 먹고 싶다 했던 슈크림 붕어빵을 산책길에 사서 가슴에 품고 오는 일. 귀찮은 내색 없이 상대를 위해 기꺼이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마음, 섬세하게 통찰한 상대의 욕구를 들어주려는 태도, 그런 것들이 묻어나는 말과 행동들. 다정함은 그런 것이다.




[3] 귀가


마음씀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은 기분이 대체로 기분이 좋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글을 읽는 것만큼 보람되는 일은 많지 않다. 기상과 건강이 허락하는 날에는, 한 시간 남짓 걸어서 집으로 가는 사치도 좋다. 귀가가 늦어지면 수면이 줄어들지만, 글에 대한 대화를 곱씹으며 스스로 깊어가는 시간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귀가했을 때 느끼는 아내의 배려이다. 귀가하면 식탁 위에 가지런히 속옷, 세면용품, 드라이기, 로션들이 놓여 있다. 때로는 처방전처럼 메모해 둔 당부들도 함께. 나는 그 소소한 다정함이 매번 좋다. 그리고 매번 같은 생각을 한다.


마음씀 하길 잘했어. 결혼하길 잘했어.



[4] 에필로그: 소감


글 쓰는 일이 때로 마음에 우물을 파고 생각을 길어내는 과정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 우물의 깊이와 물맛은 글을 직접 써 봐야 안다.


허무라는 우물은 허허로울 것 같으면서도 충만했고,

치열이라는 우물은 뜨거울 것 같으면서도 냉소적인 면이 있었던가 하면,


다정이라는 우물에서는 그다지 많은 것들을 길어낼 수 없었다.


정량적으로 측정되는 문자의 수가 생각의 깊이와 항상 비례하지는 않겠지만, 다정 감수성이 부족한 게 아닌가 반성해 본다.


(2024.2.15.)

작가의 이전글허무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