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의 풍경

허무의 의미에 대한 고찰

by 박정호

[1] 허무의 풍경


2024년 두 번째 글쓰기 과제는 ‘허무(虛無)’다. 비고 없다는 한자어 어근을 갖는 이 단어의 속뜻은 여러 가진데,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매우 허전하고 쓸쓸함’이란 표준국어대사전의 두 번째 풀이가 가장 그럴듯하다. 살다 보면 종종 해 온 것들이 혹은 해 나갈 것들이 부질없다 생각되며 쓸쓸해지지 않던가. 그런 관점에서 허무는 인간의 보편 감정이다.


그러나 허무의 질감이나 깊이는 하나로 수렴하지 않는다. 모처럼 구입한 복권이 모두 ‘꽝’이었을 때 느끼는 사소한 허무에서부터, 이별이나 사별 혹은 그 이상의 상실에서 비롯하여 삶을 송두리째 위협하는 심각한 허무까지, 허무를 환기하는 삶의 경험은 여러 가지다.


그리하여 나는 내 삶에서 바라본 몇 가지 허무의 풍경을 소개하기로 한다.



[2] 시험의 불협화음(21년 5월의 일기를 각색하여)


하늘은 맑았다. 두서없이 증축하여 볕이 잘 들지 않는 뒤편 교사의 복도는 병원처럼 차가웠지만, 너머의 창으로는 어김없이 여름빛으로 녹음이 짙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시험이었다. 복도감독관으로 배정된 나는 아무도 감독하지 않는 감독 요원이 되어, 되려 시험을 꾸짖는 낙서를 끄적이고 있었다.


정답을 만든 이는 누구이며

정답을 채점하는 이는 누구인가.

나는 나의 삶의 정답을 알지 못한 채

삶에서 물어야 할 것은 묻지 못한 채

살아가는 기분이다.


구름을 가로지르는 새 그림자 너머로, 모음을 잃은 자음처럼 비틀거리는 크레인들이 철골을 얹고 있었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웅웅대는 크레인의 모터 소리는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이었다. 나는 둘 사이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그것은 아마 그로부터 며칠 전, ‘샤넬 달리기’를 위하여 고급 캠핑 장비에 불을 피우고 신세계 백화점 외벽을 수놓던 상인들의 표정과, 동대구역 처마를 지붕 삼고 그 아래 누더기 이불을 덮은 채 웅크려 앉은 노숙인들의 표정 속에서 느낀 위화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니 세상은 온통 불협화음이었고, 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을 떼어 놓은 채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알아야 할 것도 배워야 할 것도 없는 수업은 아니었을까 허탈해지며, 나는 한 동안 나의 수업을 회의했다.



[3] 이별의 재구성


영원히를 말한다, 너는

나는 미래를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는 겨울 해변에서 같이 낙조를 보았던 사이가 되어가며


나는 붉게 어두워지는 일을 말하고 너는 영원을 속삭여서

서로의 입술을 덮어주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해변의 겨울에서 누군가의 기억 속 풍경이 되어가면서


다시 한번 너는 영원히라는 말을 하얗게 풀어놓고

나는 해변을 걷고 걷는다


- 이현호, 「명화극장」 중에서


‘나는 미래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문장에 눈이 멎는다. 이별이란 미래를 기억하는 사랑은 어떤 것일까. 그 곁에서 영원을 믿는, 천진한 연인의 눈을 바라보는 쓸쓸함은 또 어떤 것일까.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사랑의 결말을 회의한다. 그리고 끝끝내 이별한다. 이별한 채, 그러나 너를 온전히 떠나보내지 못하고 기억의 언저리를 배회한다. 내면이란 걸 영화처럼 영사할 수 있다면 떨쳐내지 못한 이별의 풍경만큼 을씨년스러운 장면도 없을 것이다.


다시 「명화극장」의 한 장면을 상상해 본다. 붉어 가던 낙조가 먹빛으로 어두워가는 겨울 해변을 거닌다. 나는 언제나 이별을 예감했고, 그 곁에서 너는 영원을 믿었다. 네가 풀어놓은 영원히라는 말이 발끝에서 포말처럼 부서진다. 나는 해변을 걷지만, 걸었던 발자국은 들리지 않는 너의 말에 덮이며 하얗게 지워진다. 그리하여 나는, 너와 같이 걸을 수 없는, 그저 걸었던 사이라는 명징한 사실을 실감한다.


누구나 한 번쯤, 이별의 해변을 거닐게 되는 시기가 있다. 생의 전부라 믿었던 당신을 놓아 보내며. 영원히 영원을 기약할 수 없다는 차가운 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겁게 흐르는 눈물 앞에 한없이 무너져 내리면서. 다시는 기약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헛되이 기약하면서.



[4] 대견해도 좋을


피곤했다. 마감을 넘긴, 두 시쯤이었을 것이다. 돌부리에 좌초된 난파선처럼 한 문장도 나아가지 않는 새벽이었다. 더 이상은 쓸 수 없겠다는 생각에 자리를 털고 일어서면서, 오늘의 창작은 흉작이었어 라며 한숨 같은 한탄을 중얼거렸다.


먹빛으로 어두워가는 수평선처럼 아내의 방은, 그리고 밤은 어둡고 캄캄했다. 어둠 속에서 사뭇 아내의 품이 따뜻했다. 나는 아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나의 손을 그리고 귀를 아내의 배에 올려 보았다. 문득 아이의 태동이 한창이던 때, 아이의 기척을 느끼기 위해 한껏 몸을 가까이 대보곤 했던 어느 날의 일상이 떠올랐다.


아이의 초음파 사진을 처음 보던 날, 아기집을 짓고 사는 우리 아이는 사진 속에서 하나의 점이었다. 우리도 엄마의 뱃속에서 하나의 점이었어. 그땐 엄마의 자궁이 나의 우주가 아니었을까.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곳을 나와 하나의 인격체가 된, 그리하여 또 다른 우주를 잉태하고 내어 놓은 아내를, 그리고 서로를 대견하게 생각했던 밤이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허무에 대해 온종일 심각해하며 고민하던 일들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삶이란 이처럼 뚜렷한 것이었고, 또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충만해함이 마땅했다.


인생에는 허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때로는 허무의 깊이를 가늠하고 의미를 파해치는 행위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러나 인생이 허무 그 자체라며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허무에 천착하여 삶을 회의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우주적 시간 속에서 하나의 점, 찰나의 순간을 살아가지만, 살아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생의 의미는 충분하니까.



[5] 에필로그: 후기


지난주에 쓴 말처럼 글 쓰는 일이 매번 어렵다. 그럼에도 허무라는 주제는 지금껏 다룬 것들 가운데 가장 무거워서 더 힘들었다.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을 사서 읽어 보았지만 현학과 추상으로 지어진 문장 앞에서 생각은 오히려 갈피를 잃어버렸다. 마감에 임박해서 벽돌을 얹듯 힘겹게 문장을 쌓아 올리는데, 올바른 설계도가 없으니 지은 글이 영 마음이 들지 않았다.


속상했다. 썩 내키지 않는 글에 한 번, 더 열심히 쓰지 못한 나에게 한 번. 그러나 내가 쓴 글이 곧 나라는 지난주 쓴 글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나의 부족함을 겸허히 인정해야만 다음 글로 나아갈 수 있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생각하는 방법뿐이다.

(202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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