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라는 이름의 꿈
[1] 서화리, 서화동(瑞和理, 瑞和冬)
<사과에게>
눈이 내렸다.
사과를 잊었다.
관측대 옥상에서 두고 온 사과는
눈밭 가운데 빈디*처럼 저 혼자 붉었다.
나는
단단해진 사과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언젠가 누군가에게
홀로 굳어간 사과의 이야기를 전해주겠노라며 약속했다.
*빈디: 힌두교 여성의 미간에 찍은 붉은 점
<등명구(燈明球)*>
포상(砲床)은 어두웠다.
고개를 북쪽으로 돌린 포구(砲口) 아래
반딧불 같은 등명구 하나가 외롭게 불을 밝혔다.
따갑도록 차가운 공기 속에서
하얗게 불어지는 입김 속에서
등명구는 위태롭게 점멸했다.
꺼질 듯 켜질 듯
깜박이는 빛을 보며, 나는 물었다.
삶은 왜 이리 캄캄한 것이며
나는 왜 이리 점멸하는 것인지
나의 삶을 소등(消燈) 한 이는 누구였는지
그날 나는 자욱한 한기(寒氣) 속에서
신열(身熱)을 내며 깊이 앓았다.
그제
입주를 앞둔 아파트의 점등식(點燈式)이 있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나의 삶은 여전히 점멸하는 것인지.
어쩌면 단 한 번도 점등하지 못한 삶은 아니었는지를.
*등명구: 야간에 사격 장치의 눈금을 읽을 수 있도록 불을 밝혀 주는 포병의 조명 장비
<수면(睡眠)의 조각>
손목에 오선지처럼 금이 그어져 있던 문 일병
손버릇이 나빠 전역 휴가를 앞두고 영창을 보내야 했던 이 병장
포신 결합 훈련에서 손가락이 잘려 나간 전 상병
새해가 시작되던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이 준위
돌부리에 걸려 풀뿌리처럼 발목 인대가 끊어진 박 중위
포연(砲煙) 같은 흐릿함 속에 또렷이 남은 수면의 조각
[2] 병영몽 극복기
가끔 군대 꿈을 꾼다. 전역은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서른을 넘어서도 그곳이 생각날 줄 그땐 몰랐다. 이제는 서른보다도 마흔이 가까운 나이다.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뒤늦은 나이에 이부자리를 더럽힌 초등학생처럼 머쓱하고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꿈속 풍경은 대체로 생생하다. 퀴퀴한 냄새와 국방색 배경은 언제까지도 잊히지 않는 기시감(旣視感)을 자랑한다. 이게 트라우마라는 건가. 나는 꿈속에서도 꿈밖에서도 그렇게 중얼거린다. 사실 이제 꿈을 꾸면서도 안다.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셀 수 없이 많이 꾸어본 덕에 현실과는 다른 묘한 위화감을 쉽게 감지한다.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안 순간, 나는 나를 불편하게 만든 녀석들의 표정 앞에서 더는 주눅 들지 않는다. 그네들의 엄포도 무섭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봤자 꿈이니까. 그건 어차피 해결될 일이니까. 그런 믿음과 경험에 근거하여 두려움을 떨쳐낸다. 그곳에서의 나는 당사자가 아닌 관찰자에 지나지 않아 태평해진다.
기억은 대체로 시간에 희석되는 편인데, 군대와 관련된 것들은 그렇지 않다. 10년이 더 지난 지금도 그곳에서의 기억은 잊히기보다는 새로운 풍미를 더한다. 희석보다 숙성에 가까운, 예외적인 현상의 이유를 알 수가 없다.
[3] 멋대로 해몽, 아니면 해명
군대 꿈을 꾸고 나면 수면(睡眠)의 수면(水面)에서 어리둥절해진다. 꿈속 세상의 생생한 기시감과 현실 세계의 생경한 미시감(未視感) 사이에서 불편을 느낀다.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빠 노릇을 하는 삶을 언제고 상상해 본 일이 있었던가. 한 번도 꿈꿔 본 적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이방인처럼 낯설고 어색해진다. 나는 다시 묻는다. 대관절 군대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현실보다 생생한 꿈으로 찾아드는 것인지.
생각해 보니 그것은 언젠가의 꿈이었다. 수면 세계에서 겪는 정신 현상으로서의 꿈이 아니라,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으로서의 꿈. 나는 단복(團服)을 입고 교정을 거닐며, 계급장을 얹은 미래를 상상했다. 복학생들의 끊임없는 폄하 속에서도 임관하여 소위가 되는 날을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꿈이 삶이 된 순간, 꿈은 나를 배반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꿈을 오판했고, 나를 오판했다. 기대와 다른 병영 생활과 그 속에서의 나를 보며 실망과 절망에 휩싸였다. 그 실망과 절망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나를 배웠다. 어쩌면 군대는 내게 엄격한 학교이자 괴팍한 선생이었다.
군대를 닮은 선생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는 폭력적 훈육자이자 강압적 독재자일 것이다. 변덕스러운 성격 파탄자에다 힘은 무식하게 센, 때로는 현명하지만 대체로 고지식한, 상식을 바탕으로 한 타협은 존재하지 않는 벽 같은 인간. 말하자면 나는 그런 인간을 통해 사회화된 셈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 독선적인 강압과 훈육이 나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곳에서의 사회화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거대한 부조리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무력함을 보았을 때, 배려가 전제되지 않은 관계 속에서 그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었을 때, 견디고 견디는 삶이 한없이 고독했을 때. 나는 나에 대해 묻고 삶에 대해 물었다. 그 어느 때보다 나와 삶에 대해 오래, 깊이 성찰했다. 그리고 생활로써 공부했다. 그 모진 가르침과 배움의 시간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그것이 여전히 군대 꿈을 꾸게 되는 까닭에 대한 어렴풋한 해명이다. 그리고 해몽이다. 그 꿈을 풀이하며 다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하나 더 깨닫고 만다. 나는 폭력적 훈육자이자 강압적 독재자였던, 국방색 청춘을 사랑하였다는 것을.
(2024.4.25.)
※ 이 글 역시 대구 글쓰기 모임 '마음씀'에서 작성한 것이었으며, 그때의 주제가 '꿈의 해석'이었음을 밝혀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