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유성에 대한 고찰
[1] 저만치 혼자서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 김소월, 「산유화」 중에서
교무실 문을 연다. 여느 때처럼 원두를 분쇄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진한 커피 향이 풍기기 시작한다. 어서 와서 한 잔씩들 해요.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매번 교무부장 선생님의 일이다. 꽃송이를 사이에 두고 꿀벌들이 모이는 것처럼, 커피 포트를 구심점 삼아 동료들이 모여든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지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지 알 수 없지만, 교무부장들은 대체로 사람을 모으는 인력(引力)이 있다.
박정호 선생님도 한잔해요. 누군가 나를 부른다. 저는 물만 마실게요. 나는 대답한다. 그리고 대화의 궤도를 스치듯 지나간다. 기분이 상하진 않았을까 염려되지만, 대화 가운데 내 몫을 얹을 자신은 도저히 없다. 머쓱하게 웃어 보이는 것은 내향형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친교다. 인력이 있다면 척력(斥力)도 있다.
도란도란, 조용하지만 소란스러운 담소(談笑) 소리가 파티션을 넘어온다. 저만치 혼자서,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본다. 커피를 끊은 일이 그저 다행스럽다. 그것은 저곳에 합류하지 않을 좋은 명분이다. 커피를 끊는 결심을 내린 데에는 카페인의 해로움보다 티타임의 두려움이 주요했는지도 모른다. 매일 모여도 할 이야기가 저렇게 많을까.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던 날도 있다. 그러나 의아하기도 놀랍기도 했던 매일 아침의 담소 시간을, 이제는 받아들인다. 공감은 못해도 이해는 한다. 교직 생활 10년 차의 내공은 거기까지다.
그래서 오늘도, 저만치 떨어져 혼자 웃는다. 그곳에 머무르지 않을, 머쓱한 미소를 보여주고서.
[2]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조용한 곳이 좋다. 담소는 이해하지만, 음악을 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연은 이렇다. 어느 날 교무실에 클래식 동아리를 만든다더니 누군가 블루투스 스피커를 설치했다. 요즘엔 중저가형이 성능도 좋아. 교감 선생님을 필두로, 대체로 만족해하던 선생님들의 표정이 생각난다. 몰래 내내 어두웠던 나의 표정을 그들이 알았으려나. 음향 기기 발전의 명(明)과 암(暗)은 이렇게도 극명하다.
이후로 라디오 방송과 클래식이, 때로는 선생님들의 신청곡들이 아침의 평화를 깬다. 누구의 취향일까. 임영웅의 「바램」이 틀어지는 순간, 나의 표정은 뜨악해진다. 음악에 대한 편견은 인종차별만큼 나쁜 겁니다. 어떤 예능 프로그램에서 누군가 말했던가.* 그 말을 이해하지만, 클래식 동아리에 임영웅 노래는 좀 그렇잖아. 하고 생각해 본다. 국민의 세금으로 구입한 스피커가 이렇게 쓰여도 되나. 약수터처럼 변한 교무실 속에서, 나는 또 저만치 혼자가 되는 기분이다.
“사-랑-한-다-. 정말, 사랑한다는”
영웅이가 잘해. 절정으로 치달은 노랫말을 듣고 찬사가 쏟아진다. 「산유화」의 한 구절을 읽던 나의 표정은 다시 한번 뜨악해진다. 음향 기기 발전의 명과 암은 이렇게 또 극명하다. 학생이 없는 시간만큼은, 듬성듬성 봄꽃이 핀 시골 뒷산처럼 적막했으면 좋겠다.
음악을 좀 줄여 볼까요.라고 말을 건네 본다. 좀 시끄러웠죠. 줄일게요. 동료가 대답한다. 묘하게 불편한 표정이다. 내 마음은 더 불편해진다. 그런 풍경이 상상된다. 그래서, 음악을 줄여달라는 청(請)을 건네지 않는다. 나의 청은 언제나 상상 속에서 그치고 만다. 청(請) 하기보다 청(聽) 하고 만다.
그런 식으로 나는 대체로 갈등을 회피한다. 그것은 나의 유구한 단점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부탁을 건네지 못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청을 잘 거절하지 못한다. 때로는 돈을 빌려주고도 잘 받지 못한다. 스물다섯 무렵에는 안내 전화를 받고 15년 만기 저축 보험 상품을 가입한 일도 있다. 서른 즈음에, 나는 알았다. 그 모든 게 불편을 불편해하는 나의 성품에서 비롯된 일이었음을.
거절을 못 한다는 건, 직장인에게 큰 약점이다. 약점을 보인 순간 그것을 이해하기보다 이용하려는 이가 나타난다. 그들에게는 나 같은 이를 알아보는 혜안이 있다. “박 선생, 이것만 해줘.”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면서 배우는 거야.”라고 격려도 한다. 지나고 보니 그 말이 옳다. 처음에 단호하지 못하면 부탁이 늘어나고 업무가 확장되는 직장 생활의 섭리를, 그러면서 배웠으니까. 나는 직장도 나도 바꾸지 못하고, 수용으로 타협한다. 타협은 늙어가는 것일까 생각하는 찰나, 귀 끝을 스치는 「바램」의 한 구절이 위로가 된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3]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 김소월, 「산유화」 중에서
갈 봄 여름 없이 꽃 지는 뒷산처럼, 하루가 저물어간다. 교무(敎務)와 육아(育兒)를 마치고 가는 산책길에 노을이 붉다. 교무와 육아를 완전히 내려놓을 어느 날, 나는 늙어 있을지 익어 있을지 알 수 없다. 뜨악한 표정으로 들었던 「바램」을 산책길에 다시 듣는 이유도 알 수가 없다. 인생의 궤적은 언제나 예측불허다.
수화기 너머 상담원을 내치지 못해 저축 보험 상품을 가입한 일이, 14년 후 글쓰기 과제를 해결하며 떠오르는 것도 그런 이치다. 새옹지마(塞翁之馬), 전화위복(轉禍爲福). 또 뭐가 있더라. 갈등을 내치지 못하는 내향형 인간으로 살아 이렇게 좋은 점도 있다. 음향 기기의 발전처럼 사람의 성품에도 명과 암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외향형 인간이 되어 보려는, 갈등에 직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학교 때 과 대표를 해 보고,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래서 꼭 필요할 때는 그런 모습의 연기를 할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어울리는 옷은 아니라라고 늘 느낀다. 선생님들의 담소를 받아들이듯, 나의 성격도 그렇게 받아들인다. 변화보다는 이해가 관건이라는 게 나의 결론이다.
꽃이 좋아 산에 사는 작은 새처럼, 나는 내가 가진 조건과 성격을 사랑한다. 그래서 이렇게 산다. 대단하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보면 이런 성격으로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란 생각이 든다. 때로는 이런 성격이라서 세상은 살 만한 곳인 것 같기도 하다. 크지 않은 소란과 손해가 대수겠는가.
머리를 싸매며 글 쓰고, 가끔 책 읽고, 혼자 바둑을 두고, 적적하면 산책하고. 취미는 대체로 혼자서. 그러면서도 자족할 수 있는 건 내향‧갈등회피형 인간이라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 '음악에 대한 편견은 인종차별만큼 나쁜 겁니다'는 토크쇼 라디오 스타에서 부활의 리더 김태원이 한 말이다.
(2024.6.7.)
※ 대구 글쓰기 모임 '마음씀'에서 '나의 장점과 단점'을 주제로 쓴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