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보폭을 맞춰 걷는 존재에 대하여
[1] 하오(下午)의 볕
기나긴 오후였다. 방 문 옆에 짐을 내려놓으며 의대 증원 이슈의 여파를 체험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커튼을 걷는다. 절반이 지난 하오(下午)의 볕이, 지루하게 길었던 진료 대기열처럼 비스듬히 늘어진다. 따사롭게 닿은 햇살 뒤로 발끝을 물리며, 세상은 따사롭지 않은 곳이라며 중얼거린다. 가슴을 묶었던 붕대를 푼다. 조직 검사를 위해 떼어낸 몸의 빈자리가 허하게 드러난다. 허한 자리에 닿는 공기가 화하고 따갑다. 그녀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만다.
종양입니다.
의사의 말이 생각난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떼어낸 몸의 조각은 죽음의 일부였다. 그리고 아직 떼지 못한 더 큰 일부가 가슴에 남아 있다. 그녀는 같은 진단을 여러 병원에서 거듭하여 들었다. 더는 오진이었기를 희망하지 않았지만, 또 더는 종양이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초진부터 오늘까지 기대를 배반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어디까지 잘못된 건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그녀는 울음의 이유도 알지 못한다. 눈물은 어디까지나 증상일 뿐이라고 사실은 인생이라는 질환을 앓는 거라고 그녀는 중얼거린다.
젖은 눈으로 달력을 본다. 빼곡한 날짜 속에 미루어야 할 직장의 일들이 눈에 밟힌다. 그리고 실소(失笑)한다. 아마도 문제는 거기서부터였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기껏 떠오르는 것이 그런 일들 뿐이었고, 기껏 그런 일들로만 가득했던 삶이었다. 그녀는 이제 통곡한다. 커튼을 걷었을 때 쏟아지던 햇살처럼, 붕대를 풀었을 때 쏟아지던 가슴처럼, 제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그 모습을 본 그녀의 엄마도 같이 운다. 목석처럼 묵묵하게 병원을 오가던 딸이 그렇게 서러웠는지 엄마는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와 엄마가 목놓아 울었던 며칠이 지나, 나는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나의 누나였다.
[2] 마음의 강
“암(癌)입니다.”
어떤 진단은 선고와도 같다. 암을 진단받은 누나의 마음이 그랬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감깁니다."와는 결이 다른, 부당하고 엄중한 선고다. 내가 아는 한, 누나는 가족력이 없다. 말하자면 나의 직계와 방계 안에서 누나는 최초의 유방암 환자다. 내가 아는 한, 누나는 병의 원인이 될 만한 습관이 없다. 금주하고 금연한 누나는 지나치게 근면했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지나친 근면이 원인이라면 그것은 지나치게 억울한 처사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병이라거나 삶이라는 게 그렇다. 나는 근면이 종양이 되어 근면한 인간의 생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그 대상이 나의 누나임에도 위로할 수 있는 말을 떠올리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 무력함을 느낀다. 나는 누나를 위로하고 싶지만
내가 아는 한,
나는 암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나는 암을 앓는 이의 슬픔과 그 슬픔을 위로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부끄럽게도, 그 모든 것들보다도 나의 누나에 대해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그 점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 나는 나의 딸만큼이나 유전적으로 닮은 누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나와 누나 사이에는 넓고 깊은, 무지(無知)의 강이 놓여 있다. 그렇게 느낀다. 나와 누나 사이의 강폭과 수심이 우리가 갖는 심리적 거리다. 우리 남매는 깊이와 넓이를 더해가는 침식 작용을 외면함으로써 그 거리가 보태지는 사태를 묵인해 왔다. 나는 누나에 대한 악감정이 있지 않은데, 이제는 아득해진 그 폭과 깊이를 감당하지 못한다. 누나에게 말을 건네는 법을 잊어버렸다.
우리 둘 사이에 놓인 강의 발원지는 어디일까. 발원에 대한 추적은 기억에 의존하므로 정확할 수 없을 것이다. 불현듯 떠오르는 유년기의, 사춘기의 풍경들이 얼마 남지 않은 단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잘잘못을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알고 싶은 것이고, 그리하여 누나를 위로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야만 누나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야겠다.
유년기부터 어느 시점까지 아버지는 우리와 분가(分家)했다. 외가 친척들에 의하면 아버지가 우리 가족에게 특히 엄마에게 어떤 '잘못'을 했던 까닭이라고는 하나, 나는 그 '잘못'의 구체적인 실체를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존재였고, 젊은 엄마는 섬유 공장 교대 근무로 우리 집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했다. 아마도 우리 집의 경제 사정은 넉넉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나는 주변으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엄마나 친척들로부터 무한히 사랑받았다. 아들이라거나 장손이라는 혹은 동생이라는 이유로 그랬다.
누나는 그렇지 않았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내게 준 사랑은, 누나에게는 골고루 돌아가지 않았다. 누나에 의하면, 엄마는 나의 운동회를 챙기지 않은 적이 없지만, 누나의 운동회는 거의 챙긴 적이 없었다. 나의 졸업식에는 엄마를 비롯한 가족 모두가, 누나의 졸업식에는 외할머니나 외숙모가 동행했다. 나는 암 선고를 받은 후 눈물짓던 하오의 표정처럼, 언젠가 엄마 앞에서 그 모든 서러움을 털어놓으며 같은 모습으로 통곡하던 누나의 얼굴을 기억한다. 누나의 유년기는 무척이나 고독했을 것이다.
누나가 사춘기를 맞이했을 때,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던 아버지가 다시 합가(合家)했다. 몇 년 간은 다정한 부녀였지만, 또 몇 년 간은 심각하게 대립하는 부녀였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날마다 오가던 고성(高聲)과 종종 부서지던 누나 방의 문고리가 생각난다. 그런 날들이 거듭되면서 아버지는 엄마와도 자주 다투었고, 어느 무렵에는 또 다른 '잘못'을 했었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가세(家勢)가 기울고 이사를 가던 즈음에 아버지는 다시 분가를 했다. 그리고 누나는 아버지와 다시는 말을 섞지 않았다. 나와의 대화가 서먹하던 시점도 그때 즈음이었다.
몇 년을 지나, 아버지가 다시 합가했다. 그때는 누나가 분가했다. 아버지와 달리, 누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로 나까지 누나와 말을 섞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화'라는 느낌의 말을 나눈 기억은 없다. 누나와 나는 엄마를 매개로 만나거나, 명절 때 먼 친척처럼 드문드문 조우했다. 취직하라거나 결혼하라는 덕담을 주고받진 않았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배려인 동시에 서먹함의 발로(發露)였다. 누나와 나는 그렇게 멀어졌다.
아마도 그랬던 것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기억에 의존한 추적이므로 정확한 이해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부실한 추적으로도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느낀다. 누나는 유년기에도, 사춘기에도, 그 이후에도, 가족이란 공동체 안에서 내내 고독하고 쓸쓸했을 것이다. 누나의 앓음은 어쩌면 유서 깊은 고통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다.
[3] 건너가기
“고모, 호”
딸아이가 '호'하며 누나의 살결에 바람을 분다. 누나가 웃는다.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두 살배기 딸이 한다. 누나의 그런 웃음을 본 일이 언제였던가. 조카의 어리광에 속수무책인 누나를 보며 마음이 놓인다. 누나는 좋은 고모다. 누나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졌다면 아마도 좋은 엄마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조카를 대하는 누나의 모습에서 내가 잊었던 누나의 너그러움과 모성을 닮은 포용을 발견한다. 누나는 두 팔로, 마음으로 나의 딸을 따뜻하게 보듬는 고모다.
누나는 좋은 고모일 뿐만 아니라, 좋은 시누이다. 누나는 아내와 엄마가 심각하게 부딪쳤을 때, 아내의 편에 서서 갈등을 중재했다. 남편인 내가 하지 못한 역할을 누나는 시누이로서 했다. 그뿐 아니라 누나는 결혼 생활 속에서 아내가 겪는 모든 어려움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 역시 남편이 충분히 하지 못했던 역할을 누나가 대신한 것이었다. 아내는 어떤 면에서 시누이인 누나에게 의지하고, 친구처럼 교유한다. 나는 다른 친구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은 일이 없다. 그러므로 누나와 아내의 관계는 내 결혼 생활 속에서 내세울 수 있는 큰 자랑이다.
누나는 좋은 누나다. 누나는 엄마와 외할머니 다음으로 나를 많이 보살펴 준 사람이었다. 조카를 보듬는 누나의 모습을, 나는 오래전 본 일이 있다. 그때 누나가 보듬은 아이는 다름 아닌 나였다. 나보다 20개월 빨리 태어났을 뿐인 누나는 꼬맹이 시절부터 내내 나를 보살폈다. 엄마가 교대 근무로 있지 않은 밤, 자신의 결핍은 미루어 두고 동생을 보듬어 준 의연한 소녀였다. 그 시절 누나는 나의 작은, 엄마였다.
누나는 좋은 사람이다. 그런 누나가 아픈 것이 마음이 아프다. 누나는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도 오래 아팠다는 것을 이 글을 적어 내리며 나는 깨닫는다. 누나는 가부장제 사회의 피해자다. 좋게 말하면 아버지와 엄마, 동생이 처음이어서 그랬던 일이었지만, 좋게 말하여 면죄하기에는 누나의 아픔이 너무 크다. 나는 누나라는 우산 속에서 숱한 폭력으로부터 피폭되지 않을 수 있었는데, 아무런 위로를 주지 못한 동생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미안하다. 미안하고 고마웠다는 말을 그래서 전하고 싶다.
나는 누나가 아파서 아픈 것에 보태어 아픈 누나를 위로하지 못해 아프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그런 생각으로 시작한 반성문이다. 나는 의사처럼 누나의 종양을 떼어줄 수 없고, 조카처럼 살결을 불며 웃음 짓게 해 줄 수도 없다. 그러나 지난 세월 그래왔듯이 무지의 강을 깊이거나 넓히지는 않을 것이다. 어색할지 모르나 안부를 묻고, 딸을 매개로 혹은 아내를 매개로 누나를 자주 찾을 것이다. 그리하여 무지의 강둑을 허물 것이다.
나는 나의 누나가 어서 건강을 되찾으면 좋겠다.
가깝지 못해도 너무 멀지 않은 누나의 '곁'으로 내가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 누나가 내게 한 만큼은 되지 못하더라도, 누나가 기댈 수 있는 어떤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2024.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