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 (기형도 「엄마 걱정」을 읽고)
[1] 유년의 윗목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엄마 걱정」
『잎 속의 검은 잎』 을 손에 든다. 「안개」로 시작하여, 「엄마 걱정」으로 마무리되는 이 시집을 읽으면 마음이 언제나 쓸쓸해진다. 아무렇게나 그린 듯한 엉성한 펜흘림 초상화와 명조(明朝)보다 낡아 보이는 서체는 수록된 시들과 묘하게 어울린다. 시집을 읽으며, 찬밥처럼 방에 담겨 시들어가는 어린 화자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린다. 세상에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뒷모습만큼 처연함을 상기하는 것도 없다.
엄마를 기다리던 방 윗목에서 느낀 소년의 공포는, 한 청년의 심실(心室)까지 전이되어 떨쳐낼 수 없는 그리움으로 나타난다. 나는 그 소년의 두려움과 청년의 그리움을 함께 떠올리며 쓸쓸해진다. 상투적이나 이것이 문학이 가진 힘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쓸쓸함을 지지대 삼아 나의 유년과 윗목을 떠올려 본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깊이 잠든 엄마의 모습이다. 아마도 교대 근무를 마친 상오(上午)이거나 혹은 하오(下午)였을 것이다. 섬유공장의 교대 근무로 잠이 부족했던 엄마의 방은, 항상 두꺼운 커튼을 쳐 놓아서 암실처럼 어두웠다. 나는 까맣게 잠든 엄마의 품에 파고들어 철없이 어리광을 부렸다.
하루는 엄마가 좋아하는 콜라를 컵에 따라 두고 이거 먹으라 하며 흔들어 깨웠다. 차마 온전히 뜨이지 않은 눈으로 안쓰럽지만 해사하게 웃어 보이던 엄마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겨우 한 살 많지만 먼저 철이 들어서 나를 만류하던 누나가 난감해하며 웃어 보이던 모습 역시 잊을 수 없다. 엄마는 이내 몸을 일으켜 나를 안고 오랫동안 놀아주었다.
나는 그때의 엄마보다도 조금 더 나이 든 지금에서야 그 풍경이 함의(含意) 하는 쓸쓸함과 애처로움을 이해한다. 또래처럼 엄마와 오랜 시간을 보내지 못한 나의 쓸쓸함보다, 그리하지 않으면 생계를 해결할 수 없던 엄마의 고달픔과 어쩔 수 없이 빨리 철이 든 누나의 안쓰러움이 더 크게 다가온다. 우리는 가난했고 그래서 셋 중 누구도 충만하거나 여유로울 수 없는 풍경이었지만. 그 가난한 쓸쓸함 속에서 우리 가족은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2] 중년의 아랫목
오랜만의 야근이었다. 초과근무 시간을 가득 채우고 집으로 가는 길이 캄캄하고 어둡다. 가방을 메고 학원으로 향하는 학생들을 보며, 별을 등지고 하교하던 20년 전 나의 모습이 얼핏 떠오른다. 여전히 학교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귀가의 형식만 하교에서 퇴근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아내는 수면등을 켜 놓은 채 책을 읽고 있다. 고생했어라며 웃음 짓는 아내가, 고맙고 고맙다. 할 말이 많지만, 오늘은 글을 쓰는 날이야라며 다시 한 번 양해를 구한다. 금요일 주간지처럼, 식탁 위에 놓이는 마음씀의 원고가 익숙하다며 아내는 나를 응원한다. 나는 그것을 탈고(脫稿)의 명으로 알고 서재로 간다.
서재로 가지만, 글을 바로 쓰지는 않는다. 구실을 만들어 딴짓을 한다. 문득 부성애가 샘솟는지, 아이의 하루가 궁금해진다. ‘키즈노트’라는 앱을 실행하고, 오늘의 알림장을 읽어 본다. 나는 하루를 요약한 문장과 함께 배달되듯 전해진 사진을 통해 아이의 하루를 가늠한다.
쌀쌀하고 흐린 날씨 속에서도 우리 사랑이들은 따뜻한 마음이 가득 찬 하루를 보냈어요.
3월 셋째 날, 오늘은 ‘꿀벌 풍선 꾸미기’ 활동을 해 보았어요. 활동 전 꿀벌 노래와 손유희 율동도 해 보고 꿀벌 관련 그림책도 읽어 보면서 봄에 꽃을 찾아오는 꿀벌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 보기도 했어요. (중략)
내일도 사랑이 듬뿍듬뿍 넘치는 사랑반에서 신나게 놀아요.
- 2025.3.6. 키즈노트* 알림장에서
아이는 오늘 ‘꿀벌 풍선 꾸미기’ 놀이를 하며 놀았다고 한다. 의도치 않게 아내가 골라 입힌, 노란색 티셔츠가 꿀벌 빛이라 풍선과도 잘 어울린다. 머리통만 한 풍선을 굴리며 웃고 웃었을 아이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사소한 놀이들도 새롭고 신기해하며 부쩍 많이 웃는 아이가 요즘 더 사랑스럽다.
아이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방으로 가 본다. 유아기의 아이 방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난다. 감기에 걸려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안쓰럽지만 평온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보며 안도한다. 나는 아이가 좋아하는 토끼 인형과 팬티를 손에 꼭 쥐여주고 이불을 덮는다. 아이가 꿈속에서 토끼 인형을 안고 친구들과 꿀벌 놀이하며 즐거웠으면 한다.
별빛을 맞으며 하교할 수 있을 때까지 아이를 키울 일은 아직 아득하지만, 아득한 세월이 너무 빨리 오지는 않았으면 한다.
아이에게는 오색찬란 찬연한 시절이 조금 더 이어지기를, 바라본다.
*키즈노트: 어린이집에서 활용하는 알림장 어플이다. 사진과 함께 아이의 일과를 기록하여 보내 주신다.
[3] 에필로그: 찬란한 시절
하루는 유치원이 파하고 다들 집으로 가는데, 나를 데리러 오는 유모가 아니 오셔서 혼자 남아서 울고 있었다.
선생님은 나를 달래느라고 색종이를 주셨다. 그 빨간빛 파란빛 초록 연두 색깔이 그렇게 화려하게 보이던 일은 그 후로 없다.
그 선생님의 얼굴이 어떻게 생기신 분인지 지금은 도무지 생각이 아니 난다.
눈물을 씻어 주느라고 내 얼굴을 만져 주던 그 손매만큼은 지금도 느낄 수 있다. (중략)
유치원 시절에는 세상이 아름답고 신기한 것으로 가득 차고, 사는 것이 참으로 기뻤다.
아깝고 찬란한 다시 못 올 시절이다.
- 피천득, 「찬란한 시절」 중에서
피천득의 회상처럼
아이의 삶에서
다시없을 형형색색 찬란한 시절이 바로 지금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아이뿐만 아니라
부모라는 이름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고달프지만
찬란, 찬연한 시절을 지탱해가는 나의 일상이
더없이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생각을 가진다.
주말에는 오늘 하지 못한 아빠 노릇을
실컷 해주어야겠다.
(202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