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피천득의 「인연」을 읽고

by 박정호

[1] 프롤로그: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 피천득 『인연』*의 서문


‘질긴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관계 앞에 붙여진 ‘질긴’이라는 형용사의 어감이 말 그대로 질기다. 여러 번 곱씹어도 해체되지 않는 화두를 두고 오랜 시간 고민했다. 나의 고민은 어떤 유튜브 영상으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출근길에 “이동진의 파이아키아*”를 들으려는데 영상의 주제가 인간관계여서 귀에 잘 들어왔다. 사람 사이의 교유라는 하나의 현상을 철학적으로 바라보면 인연이라 하고, 사회적으로 바라보면 인간관계가 아닐까 하여 영상이 내게 도움 될 듯싶었다.


이동진은 인간(人間)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여 생각의 물꼬를 텄다. 인간을 표현하려면 사람(人)으로써 충분한데, 구태여 사이(間)라는 어근은 덧붙여 인간으로 부르는 데는 어떠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관계(間)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핵심 조건이며, 관계가 결여된 자는 사람됨의 한 요소를 갖지 못했다는 관점이 단어 ‘인간’에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을 언제나 명료하게 규정하곤 했던 그의 통찰에 이번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의 인간관계론을 듣고 떠오른 책은 피천득의 『인연』이다. 인간이 관계로써 인간다움을 갖추는 존재라면, 인생은 인간의 생(生)인 동시에 인간을 만나는 생으로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는 피천득의 말은 이동진의 인간관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인연』의 서문은 책이 출간되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널리 인용된다. 그 까닭은 단출한 문장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문장이 품고 있는 통찰이 깊은 울림을 주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 우연(偶然)의 간절함


피천득은 『인연』을 통해 자신이 마주했던 다양한 인연들을 소개한다. 수많은 미문(美文)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엄마」와 「인연」이다. 수필은 청자연적이라*는 그의 문학관에 걸맞은, 아름다운 글이다. 그 가운데 「엄마」는 중년의 화자가 유년의 마음으로 엄마의 기억을 회상하는 서술이 인상적이다. 「엄마」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엄마가 나의 엄마였다는 것은 내가 타고난 영광이었다. 엄마는 우아하고 청초한 여성이었다. 그는 서화에 능하고 거문고는 도에 가까웠다고 한다. 내 기억으로는 그는 나에게나 남에게나 거짓말한 일이 없고, 거만하거나 비겁하거나 몰인정한 적이 없었다. 내게 좋은 점이 있다면 엄마한테서 받은 것이요, 내가 많은 결점을 지닌 것은 엄마를 일찍이 잃어버려 그의 사랑 속에서 자라나지 못한 때문이다.
- 피천득, 「엄마」에서


그는 같은 글에서 엄마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간절한 희망(p.102)이라고 했고, 수필집의 다른 글 「서영이」에서는 딸과 더불어 그의 엄마가 일생에 남을 두 여성이라 했다. 내가 피천득의 아내였다면 몹시도 서운했을 것이나, 엄마를 각별히 여기는 그의 마음이 오롯이 전해져 기억에 남았다. 피천득이 그 어머니의 아들로 산 일을 영광으로 삼고 다시 그 아들로 태어나기를 희망하는 까닭은 그 어머니의 훌륭한 인품에서만 비롯하지는 않았으리라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자식은 그 어떤 노력으로도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모든 자식은 부모에 의해 세상으로 피투(被投)된 존재다.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와의 인연은 반드시 우연이다. 피천득의 엄마는 그래서 그의 ‘타고난 영광’이었고, 그는 요행히 만난 영광이 내세에서도 재현되기를 간절히 희망해 보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나의 엄마를 피천득의 회상처럼 우아하고 청초한 여성으로 기억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아마도 피천득과 거의 동일한 간절함으로 내 엄마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기를 희망한다. 엄마가 누군가의 엄마로 나는 누군가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나의 엄마 그리고 엄마의 아들은 이생(此生)에서의 모습과 같았으면 한다.


「엄마」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유년의 어느 날, 그는 엄마가 정말 자신의 엄마가 아닌가 걱정스러운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루는 엄마가 자기를 버리고 달아나면 어쩌느냐고 물어본다. 그때 그의 엄마는 세 번이나 고개를 흔들며 가정을 부정한다. 그렇게 영영 가 버릴 것을 왜 세 번이나 고개를 흔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는 마지막 문장이 어린아이의 투정 같아서 여운을 준다. 그의 엄마는 요절했지만 그의 글에서 오래도록 좋은 엄마로 살아 있다.



[3] 개연(蓋然)의 아련함


서제(書題)와도 같은 제목의 「인연」은 여느 시집의 표제 시처럼 수필집 『인연』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수필 말미의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p.140)가 주는 여운이 대단하여 많은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그가 열일곱이 되던 봄, 그는 일본인 부부 내외가 사는 집에 유숙하며 그들의 딸 아사코를 만난다. 십수 년간 세 차례 아사코를 거듭 만난 소회가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피천득이 기억하는 아사코의 첫 모습은 꼬마 소녀다. 아침에 낳아 아사코(朝子)란 이름이 붙여진 꼬마 아이는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이었다. 조경이 잘 된 유숙 집의 정원에서 ‘스위트피’를 따다 준 아사코가 귀여운 꽃과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열서너 해가 지난봄, 피천득은 다시 그가 묵었던 유숙 집으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다시 마주한 아사코는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스위트피를 닮았던 어린 소녀는 이제 4월에 핀 백합처럼 성숙해 있었다.


여기까지의 추억은 아름답다. 계획하지 않고 아사코가 다니는 여학원 교정을 산책하였던 순간까지도 그의 기억은 섬세하게 살아 있다. 두 사람 모두 영문학을 전공하여서 밤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그것이 두 번째 만남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10여 년 지나 그들의 세 번째로 다시 만난다. 미국 가던 길에 동경을 경유하면서 들렀던 오래전 유숙 집이 뜻밖에 그대로 남아 있어 그들은 재회할 수 있었다. 그를 유숙객으로 받아 주었던 일본인 부부는 한국이 독립하여 잘 되었다며 축하해 주었다.


아사코는 그 사이 미군 사령부에서 만난 일본인 2세와 결혼했다. 피천득은 그녀가 전쟁미망인이 되지 않아 다행으로 여겼으나, 아사코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만다. 이번에 그가 떠올린 꽃은 시들어가는 백합이었다. 기대보다 이르게 세월의 풍파를 맞은 아사코를 보고 그는 적잖이 속상했던 모양이다. 진주군(進駐軍)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듯했다며 아사코의 남편을 묘사하는 피천득의 문장에 언짢음이 묻어 있다. 그리고 글은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는, 유명한 소회로 마무리된다.


아사코를 세 번 만난 피천득의 인연은 어떤 면에서는 우연적이나 또 어떤 면에서는 개연적(蓋然的)이다. 동경의 수많은 유숙 집 가운데 그곳에 묵게 된 일은 우연의 소산이다. 그러나 유학을 선택하였기에 이루어진 첫 번째 만남을 비롯하여, 이후 이루어진 만남들은 피천득의 욕망이나 노력이 작용했기에 개연적이다. 아사코와 그녀의 부모 내외에게 인연이 닿은 것 역시 피천득이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은 일이므로, 그들이 가진 삶의 배경이나 지향이 닮은 결이어서 이루어진 만남이 아니었을까 싶다.


「엄마」에서 모자 관계는 우연이어서 간절했고, 「인연」에서 아사코와의 관계는 개연이어서 아련한 듯싶다. 세 번이나 고개를 흔든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엄마」의 끝 문장과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는 「인연」의 끝 문장이 묘하게 포개진다. 간절함과 아련함 모두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맑은 성품에서 비롯한 정서인 까닭 때문이 아닌가 한다. 우연이든 개연이든 그의 삶과 쉽게 분리되지 않는 두 인연은 질기다.



[4] 에필로그: 어쩌면 필연(必緣)


서른셋의 남자와 서른의 여자가 사수라는 외진 동네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약속 장소에 두 시간쯤 일찍 나온 남자는 『서양미술사』에 푹 빠져 약속 시간을 잊어버린다. 둘은 겨우 연락이 닿아 예정보다 10분쯤 늦게 조우한다. 테이블 위에 놓인 벽돌 책을 보며 여자는 남자의 컨셉질이 심하다고 생각했고, 새침하게 째려보는 여자의 눈을 보며 남자는 이번에도 글렀겠구나 하며 짐짓 물러선다. 그들은 알지 못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의 손을 맞잡고 사랑을 약속하며 버진 로드를 걸어갈 미래를.


짐작을 하였겠지만 이것은 나의 이야기다. 이렇게 이루어진 오늘의 인연을 우연이나 개연으로 볼 수 있을까. 우연이라기엔 우리는 너무 희박한 확률로 동시대의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고 또 서로를 마주하지 않았나 싶다. 그것은 아무리 양보하여도 개연 아니 반드시 필연이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만남에 대한 의미 부여가 사후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그런 방식의 해석 또한 인생의 재미가 아닌가 한다.


인연은 대체로 교유 따위로 얻어지는 관계 정도의 일상적 의미로 흔히 사용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단어를 파자해 보면 그 내용이 흥미롭다. 인연은 인(因)과 연(緣)의 합성어인데, 각각 원인과 조건 정도로 해석된다. 이것은 불가(佛家)에서 일컫는 연기(緣起)의 삼법(三法)과도 관련된다. 누구와의 만남은 씨앗이 되는 인(因)과 조건이 되는 연(緣)이 만나 이루어지는 열매(果)와도 같다는 것이 불가의 가르침이다. 그렇게 본다면 모든 인연은 우연과 개연의 얼굴을 한 필연이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여기서의 필연은 운명 또는 숙명론적 차원에서의 필연과는 결이 다르다. 불가에서는 만남과 헤어짐이 수많은 조건의 얽힘 속에서 생겨난다고 본다. 그리고 연(緣)은 세상으로부터 주어지지만 인(因)은 대체로 스스로가 쌓아간다는 점에서 차이를 둔다. 이쯤하고 『인연』의 서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삶을 아름다운 빛으로 물들이기를 바란다. 그 빛은 인연의 모자이크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분명해진다. 좋은 연(緣)을 만나기 위해 쌓아갈 인(因)의 모습과 방도가 바로 그것이다.


*피천득, 『인연』, 민음사, 2018. (초간 출판은 1996년에 이루어졌고, 내가 참조한 것은 개정판이다)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해당 채널의 정확한 이름은 "B tv 이동진의 파이아키아"이다. 내가 참조한 영상의 링크를 남겨 둔다. (https://youtu.be/8MHoMv5bL0o?si=-OI8_ke3__yGiaHt)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피천득 『인연』의 「수필」에서 인용했다.


(202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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