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머리는 없지만

이발에 대한 단상

by 박정호

유클리드 기하학의 점, 선, 면처럼 세상에는 실존으로는 확인할 수 없고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내게 꼭 어울리는 [인생 머리]도 적어도 서른여덟 해 동안은 실존을 확인하지 못한 상상의 개념이다. 그것이 미용사의 잘못은 아니라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나는 그저 사회 생활을 하기에 위화감이 들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이발한다. 주문도 단순하다. 그냥 숯만 쳐 주세요라든가, 지난 번보다는 조금 짧게요라는 식. 생각해보니 그런 식의 주문은 꽤나 까다로웠을 것 같아서 미용사들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거울 앞에 앉는다. 나의 민낯을 오래 대면하는 일은 낯설다.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 새삼 외모에 대한 성찰을 하는가 하면, 전에 없던 주름이 지고 피부가 쳐지는 걸 보니 좀 늙었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가위질로 잘려나가는 머리가 흩날리는 세월 같아서 서글퍼진다. 그런 생각이 들면 정말 늙은건데 싶다가도 어쩔 수 없는 일인 듯 싶어 그저 단념한다. 그래서 그런가. 요즘은 머리카락이 좀 천천히 자랐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바리깡이 지나간다. 나는 사설 업체에 산소(山所) 벌초를 맡긴 후손이 된 기분으로 미용사의 손길을 지켜본다. 어련히 잘 해주시지 않을까. 가끔은 너무 짧거나 길지 않은가 싶은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도 미용사의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숯만]이라든가, [지난 번보다 조금 더]라는 식의 요청에 응대하는 그의 고충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잘 안다. 그에 대한 신뢰는 적립 포인트 8260점처럼 돈독하게 쌓여 있다. 참고로 본 미용실의 적립률은 결제분의 1%다. 어림잡아 그곳에서 50번은 이발을 한 샘이다.


안녕히 계세요. 하고 미용실을 나선다. 그리고 보고용 자료를 수집하듯 셀카를 찍는다. 갤러리에 저장하고 아내에게 카톡으로 보여준다. 돌아오는 [ㅋ]의 개수로 미용의 결과를 가늠한다. 영화의 별점과 달리 [ㅋ]의 개수가 많을수록 머리는 망작이다. 머리의 완성도와 아내의 즐거움은 반비례하므로 망작이어도 크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ㅋ]의 개수가 많더라도 미용사의 탓은 하지 않는다.


욕망이 없으면 인생이 재미 없다고 했던가. 미용에 대한 욕망이 없어 이발도, 이발에 대한 글도 재미가 떨어지지 않았나 반성해 본다. 가끔은 욕심을 부리고, 미용사 탓도 하면 실존하지 않지만 상상으로 존재하던 [인생 머리]에 가까운 어떤 형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다음 번에는 파마든 뭐든 기교를 부려 보아야겠다. 잘 되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아내에게 [ㅋ]이라도 많이 받을 수 있을 테니까.


(202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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