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를 주제로 한 짧은 고찰
미니씀 공지: 첫 문장은 ‘나는 용서한다’입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카톡을 읽는다. 용서라는, 내가 알지 못하는 두 음절 단어를 두고 머리를 굴려 본다. 내가 용서한 일들과 용서받은 일은 무엇이 있었을까. 애써 떠올리려 하지만 쉽게 기억나질 않는다. 용서했거나 용서받은 모든 일들은, 어쩌면 용서를 통해 완결된 사건이었으므로 기억의 한편으로 밀려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용서는 과오를 받아들이고 원망을 내려놓는 행위이므로 영혼을 맑게 하는 효용이 있다.
그러나 용서는 쉽지 않다. 용서는 이성적 사고로 선택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종교가 실리를 준다 하여 신앙을 가질 수 없고, 또 신앙이 실리와 배반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여 신(神)을 불신(不信)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용서는 노력에 의해 시도될 수 있지만 믿음의 영역처럼 마음이 움직여야만 종착지에 다다를 수 있는 고행이자 구도(求道)다.
용서를 받는 일은 더욱 어렵다. 용서를 구하는 일은 가해자의 책무이자 도리이지만, 권리일 수는 없다. 용서의 권리는 전적으로 피해자에게 있다. 아니 있어야만 한다. 누군가 피해자로부터 용서의 권리를 박탈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가해다. 이청준은 소설 「벌레 이야기」에서, 이창동은 해당 소설을 각색한 영화 「밀양」에서 용서의 가능 영역과 권리 주체에 대해 물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신앙을 통해 범인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을 때 그 용서는 가능한 것인가. 용서를 위한 대면의 순간, 용서를 마음먹게 한 신으로부터 범인이 먼저 구원받았음을 깨달았을 때 그 절망의 깊이는 어떠한 것인가. 신은 인간을 대리하여 용서할 수 있는가. 인간은 신이 대리한 용서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가. 나는 이 깊고 무거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한다.
한편 모든 용서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나’에 대한 용서다. 스스로가 용서의 대상이 되었을 때, 주체와 대상이 일치하는 용서 행위에 있어서 나는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다. 이 경우 나는 용서의 권리를 갖고 있지만 동시에 용서의 권리를 갖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나에게 용서를 구할 수 없지만, 나로부터 용서받아야 하는 난관에 처한다. 별난 해석일 수 있겠으나, 윤종빈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승영’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해서(혹은 나로부터 용서받지 못해서)가 아닐까 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용서한다’는 문장으로부터 시작한 최초의 사유는 ‘(단독하여 기술된)이 문장은 비문이다’라는 것을 밝혀 둔다. '용서하다'는 목적어를 필요로 하는 두 자리 서술어이므로 '나는 용서한다'라는 문장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지 못한다. 그것은 비단 말의 법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며, 용서라는 행위의 본질과도 관련된다. 대상을 필요로 하는 용서의 행위 구조가 말의 법이 정해지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나는 용서한다’는 문장의 미결성을 검토하면서, 비문으로써 주제를 던진 민진 님의 의도를 비로소 이해한다. 용서한다의 목적어는 글을 쓰는 이만이 정할 수 있는 문제다.
내가 글로써 쓴 용서에 관한 모든 사유는 공허한 당위이거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글이 공허한 이유는 용서는 사유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써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정의감을 갖고 병영 부조리에 저항하던 ‘승영’은 자신의 후임 ‘지훈’을 보호한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부조리에 적응하고 순응한 ‘승영’은 ‘지훈’을 죽음으로 내몰게 되고, 그 죄책감을 떨치지 못해 죽음을 선택한다.
(2025.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