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가까워온다. 색온도가 높아가는 하늘을 보며 허기(虛氣)를 느낀다. 무엇을 했다고 배가 이리 고플까 싶은 하루였지만, 허기의 크기는 노동의 성과와 비례하지 않는 거라고 위로해 본다. 오늘은 뭘 먹을까요. 누군가 물어 온다. 특근매식비*로 결제할 수 있는 식당은 네 곳인데, 다양하지 않은 사지선다 문제 앞에서 나는 언제나처럼 막막해진다. 그리고 선지에도 있지 않은 아무거나요를 시전한다. 갑자기, 퇴근을 하고 싶다.
식당이란 안건을 두고 회의처럼 짧게 의견이 오간다. 황사가 심한 오후이므로 선지의 식당들 가운데 가장 가까운 기사식당으로 행선지를 정한다. 돼지찌개 4인분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는다. 아차, 나는 막내니까 반찬을 챙겨 온다. 셀프라는 안내문 아래 바(Bar)라고 부르기에는 뭣한, 허름한 반찬대에서 음식을 담아 온다. 앞접시에 쌓아 올린 반찬의 양이 참아온 허기에 비례하여 푸짐하다. 밑반찬만으로 푸짐해진 상이 매캐했던 하루의 보상처럼 느껴진다.
찌개가 나온다. 때마침 하늘도, 적당히 붉은 찌개 빛으로 익어간다. 나는 눈으로 벌써 찌개를 음미한다. 붉은 것은 맵고 짠데, 돼지찌개는 겉보기로 기대되는 맛을 배반하지 않는다. 나는 찌개가 가진 대중성과 범용성을 높이 평가한다. 미슐랭 3스타 요리처럼 품격을 논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실망감도 주지 않는다. 찌개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투명한 사람 같기도, 직장에서 신임 받는 듬직한 사원 같기도 하다.
찌개는 비싸지 않다. 만들어보면 어렵지도 않다. 자취를 하던 시절에 가장 먼저 익힌 요리도 그래서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김치찌개였다. 찌개를 만들기 전까지 요리는 기술이나 예술의 영역에 존재했는데, 찌개를 만들어 먹음으로써 요리를 생활의 영역으로 들여놓을 수 있었다. 대단하진 않았지만 의외로 먹을 만했던 첫 번째 김치찌개의 맛을 잊지 못한다. 대단치 않은 찌개가 시발점이 되어 아내에게 딸에게 미역국 정도는 끓일 수 있게 됐다.
대부분의 요리들은 정확한 레시피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대개 유튜브를 켜 놓고 조리한다. 가장 많이 보던 것은 백종원 씨의 채널이었는데, 이제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한때는 선인 혹은 성인(聖人)처럼 칭송받던 그의 행적들이 구설수에 오르내린다. 나는 그의 행적과 과오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구설수 가운데는 타당하고 마땅한 비판과 비난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파묘*’하듯 한 사람의 행적을 파헤치고 소비하는 대중들의 태도에는 거부감을 느낀다. 비난하는 재미를 위해 비난에 비난을 보태는 일과 그 속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악의(惡意)에 두려움을 느낀다. 악의에서 비롯된 비난 속에서 때로는 무고하게, 때로는 과오에 비해 과도하게 화를 입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비난 속에서 재미를 추구하는 담화의 풍경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나는 찌개를 두고 모인 언젠가의 식사를 떠올리며 기시감을 느낀다. 구설에 오른 X에게 빌미가 없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구설의 크기는 빌미나 과오의 정도를 아득하게 넘어선다. 구설을 주도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면 당사자가 아닌 이들도 뜻하지 않게 말을 보탠다. 부끄럽지만 나도 그랬다. 나 역시 암묵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구설에 동조하여 눈덩이를 굴리듯 말을 키웠다. 나는 직접 경험하지 않은 구설 앞에서 해야 할 마땅한 처신을 알지 못해 당혹했고, 당혹하여 불편한 식사 속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삼켰다. 맵고 짠 찌개의 맛이 그런 날이면 조금 더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야근하러 가는 길, 황사가 짙어 흐려진 하늘이 갑갑하게 느껴진다. 참아지지 않는 기침이 따갑고 텁텁하다. 먼지와 찌개로 맵싸해진 입안을 어서 헹궈야겠다.
*파묘: 본뜻은 이장을 위해 무덤을 파내는 일이나, 누리꾼들이 특정인을 비판하기 위해 행적을 파헤치고 논평하는 일을 일컫는 은어로도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