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한 맥박을 감당하기까지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by 박정호

[1] 프롤로그: 한강의 추억


한강의 문장을 처음으로 읽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20년이 조금 덜 지난 2006년 봄, 「몽고반점」을 통해서였다.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였던 나는 소설을 연구하는 동아리에 가입하여 그 작품을 읽었다. 그때만 해도 하늘같이 느껴지던 선배가 추천한 데다, 이상문학상 제29회 대상작이었던 만큼 「몽고반점」의 작품성에 대한 의심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외설스러움을 넘어 기괴함마저 느껴지던 그날의 혼란스러운 독서 감각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문단의 찬사를 받은 작품으로부터 나는 그 어떤 감동이나 깨달음도 얻어갈 수 없었다.

몇 년 뒤 「몽고반점」을 포함한 연작 단편집 『채식주의자』를 읽었을 때도, 그 책이 맨부커상을 받고 주목받은 일을 계기로 다시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섬세하게 벼려진 하나하나의 문장은 분명히 아름답게 느껴졌지만, 한 편의 글 또는 한 권의 책이 가져다주는 의미와 감동은 조금도 와닿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한강 읽기’를 포기하였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작품들도 내 삶에서 멀어졌다. 다시 세월이 지나 몇 년 후의 봄이 오기 전까지 한강 작가와의 거리두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사를 준비하던 어느 오후였다. 채식을 하여 변색된 얼굴처럼, 햇빛을 받고 책장 구석에 낡아 있는 『채식주의자』가 눈의 띄었다. 독서 토론을 나누던 새내기 대학 시절과 맨부커상 수상으로 떠들썩했던 매체의 보도가 생각났다. 시절의 기억을 뒤로하고 나는 새집으로는 그 책을 챙겨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작가에 대한 폄하의 의도가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것은 한강의 문장을 아마도 죽을 때까지 감당할 수 없을 거라는 아둔한 확신에서 비롯한 행동이었다. BTS 노래의 대중성과 음악성을 폄하할 순 없지만, 그들의 음악을 즐기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그녀의 강렬한 시적 문장을 기리기 위함
-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동기에서


그해 가을, 한강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한국 작가로서 그리고 아시아 여성 작가로서는 최초였던, 전인미답의 성과였다. 상훈 위원회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한 시적 문장을 기린다’며 수상 동기를 밝혔고, 여러 매체에서 맨부커상을 받았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성과를 기렸다. 나는 세간의 소란 속에서 옛 아파트의 폐지함에 두고간 『채식주의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부끄러움을 떨치기 위해서였을까. 나는 한강의 작품을 다시 마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손에 든 책이 『소년이 온다』였다. 『소년이 온다』는 상훈 위원회의 수상 동기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었고, 『채식주의자』와는 달리 작품이 환기하는 의미와 감동을 이번에는 온전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소년이 온다』를 오래 기억하기 위해 서가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책을 꽂아두었고, 그것은 비단 물리적인 책장뿐만 아니라 마음의 서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강의 수상이 이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겨울날, 그녀가 맞서고자 했던 역사적 트라우마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나의 눈앞에 현현했다. 나는 한강 작가가 그러했듯 용감하게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설 수 없었다. 여전히 부족한 독력(讀力)으로는 「몽고반점」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용기를 갖지 못한 부끄러움과 문장을 감당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반복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년이 온다』로부터 얻은 작은 깨달음을 서평으로 남기고자 한다.



[2] 인간, 그리고 폭력성이란


내가 몰래 그 책을 펼친 것은, 어른들이 언제나처럼 부엌에 모여 앉아 아홉시 뉴스를 보고 있던 밤이었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겨, 총검으로 깊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에서 (p.199.)


작가는 5.18 민주 항쟁 기록을 처음 접하던 순간을 위와 같이 회상한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고작 열두 살이었다. 그날의 장면을 상상해 본다. 어른들이 언제나처럼 아홉시 뉴스를 보고 있던 밤, 한 소녀가 금기를 넘어선 것처럼 두려움을 안고 사진첩을 펼친다. 그리고 참혹이란 말로도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한 죽음들을 목격한다. 소녀는 자각하지 못했던 내면 깊숙한 일부분이 파열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 파열이란 아마도, 인간에 대해 갖고 있던 무의식적이고도 순수한 긍정과 신뢰가 아니었을까.


작가는 어떤 인터뷰에서 그날의 사진첩에서 보았던 다른 장면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시신(尸身)이 된 육신(育身)에 새겨진 참혹한 폭력의 흔적, 그와 나란히 그들을 살리기 위해 늘어선 헌혈 대기열이나 그들과 함께 저항했던 항쟁의 기록들이 사진첩에 남아 있었다고 했다. 참혹한 폭력과 숭고한 의지로 대비되는 그날의 사진들은 모두 인간의 모습일진대.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무엇인지, 작가는 긴 시간이 지나도록 답을 구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소년이 온다』를 5.18의 기록으로 남겨진 폭력과 상처, 그리고 숭고를 재구함으로써 인간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이해하려는 작가의 노력으로 받아들인다.


『소년이 온다』에서 모든 폭력과 상처들은 희생자의 입장에서 서술된다. 다시 말해서 폭력의 감각과 가해 행위의 의미에 대한 판단은 모두 희생자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진다. 아래는 작품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중략)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 「검은 숨」에서 (p.57.)


각진 각목이 어깻죽지와 등허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곧은 물성대로 활짝 펴지며 내 몸을 비틀 때,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헐떡이는 일초와 일초 사이, 손톱과 발톱 속으로 그들이 송곳을 꽂아 넣을 때, (중략) 다시 비명, 몸이 사라져주기를, 지금 제발, 지금 내 몸이 지워지기를,
- 「쇠와 피」에서 (p.121.)


「검은 숨」은 ‘정대’라는 망자(亡子)의 령(靈)을 통해, 「쇠와 피」는 항쟁에 참여했던 피해자의 입을 통해 죽음과 고문의 고통을 재구한다. 그들의 고통은 죽음이나 고문의 순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었고, 방사능 피폭처럼(p.207) 생존자들의 몸에 남아 오랜 기간 치명적으로 심신을 망가뜨렸다. 생존자들은 습자지처럼 얇은 수면(p.161)과 불면의 사이에서 시달리거나, 더는 누구에게도(심지어 스스로에게도) 연민 받지 못한 채 항쟁의 트라우마를 반추하며 살아간다. 작가는 이 작품을 쓰는 과정이 모든 자신이 감당한 모든 창작 중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하는데, 피폭처럼 깊이 새겨진 고통을 글로써 형상화하는 일도 그 까닭 중 하나였을 거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내면 깊숙한 곳까지 묘사되는 희생자들의 고통과 달리, 가해의 입장에 선 군인과 요원들의 행위는 오로지 행위로만 그려진다. 모든 진술과 재구가 희생자의 입장에서만 서술되기 때문이다. 그 서술은 「일곱개의 뺨」에서처럼 추상적인 물음으로 물어지거나, 「쇠와 피」에서처럼 추측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녀는 회벽에 붙은 대통령 사진을 올려다본다.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 「일곱개의 뺨」에서 (p.77.)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걸, 우리가 증명해 주겠다.
- 「쇠와 피」에서 (p.121.)


감히 누구도 우리에게 내재한, 해결되지 않는 폭력성의 근원과 까닭을 명확하게 밝힐 수는 없을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악의(惡意)와 악의에서 비롯한 폭력은 떨쳐낼 수 없는 인간성의 일부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으로서 스스로에게 닿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이해라고 나는 생각한다.


[3] 숭고한 맥박


『소년이 온다』는 5.18의 희생자들을 피해자나 수동적 주체로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한강은 그들을 숭고한 열의를 갖고 불의에 저항한 주체적 행위자로 그려냈다. 그 행위의 동기와 가치를 신파가 아닌, 설득력 있는 서술로 형상화했다. 다음은 다시 「쇠와 피」에서 인용한 문장이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 「쇠와 피」에서 (p.114.)


비록 무참하게 좌절되었지만, 그들이 품고 있었던 거룩한 의지를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게 한 문장이었다. 나는 숭고한 심장의 맥박, 그 일부가 되었다 느꼈을 때 찾아드는 고양감에 대해 생각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악의처럼, 숭고를 추구하는 정의감과 그때의 고양감 역시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했다. 한강은 「밤의 눈동자」와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에서 각각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은 안다. 그해 봄과 같은 순간이 다시 닥쳐온다면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초등학교 때 피구 시합에서, 날쌔게 피하기만 하다 결국 혼자 남으면 맞서서 공을 받아안아야 하는 순간이 왔던 것처럼. 버스에서 터져 나오는 여자애들의 쨍쨍한 노래에 이끌려 광장으로, 총으로 든 군대가 지키는 광장으로 걸었던 것처럼.
- 「밤의 눈동자」에서 (p.175.)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에서 (p.213.)


선의(善意)를 품고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아니 평범한 생활 감정을 갖고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의 인간이라면. 대단한 결심이나 사리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숭고라는 이름의 맥박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한강은 소설로써 보여주었다.

역사적 트라우마로 기록된 폭력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베트남에서,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듯 동일한 잔인성으로(p.135). 그 참상과 참사 속에서 어떤 이들은 숭고한 심장의 일부가 되어 그에 맞섰고, 또 어떤 이들은 그 심장을 겨누는 총신(銃身)이 되어 거악(巨惡)에 힘을 보탰다. 그 모든 것이 인간이라는 점을, 그리고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그러므로 우리가 지켜야 할 무엇이 있다는 점을 나는 깨닫는다.


나는 용기와 결단을 요하는 문제들 앞에서 움츠러들었던 나의 지난 날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러한 외면 속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긋고 부끄러워한 나의 모습을 반성한다. 『소년이 온다』는 내게 나도 모르는 내면 어딘가에 존재할 선의와 숭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위안을 건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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