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성과 스타벅스
그저 꾸준하게 살아낼 수 있다면
지난밤은 독일 시간에 맞춰 마감시간이 다가오는 논문을 작성하고 있었다.
동료가 제1 저자로 실험결과를 이미 작성해 두었기 때문에,
나로선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왠지 모르게 피어오르는 압박감들을 떨쳐낼 수 없었다.
마른 입술을 깨물어 가며 가시 돋친 자판을 두드리고 있던 중,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16강 경기가 시작되었다는 중계진의 음성이 거실에서 들려왔다.
남편도 한창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잠도 깨울 겸 티브이를 튼 모양이었다, 사실 굉장한 축구팬이기도 하고!
전반전을 소리로만 가끔 들으며 작업에 집중하다 보니,
후반전으로 시간이 훌쩍 넘어갔다.
그런데 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별안간 남편의 탄식이 들려왔다.
한 골 먹은 것이다.
이때부터는 나도 소리로만 경기를 들을 수가 없어서
가끔 손을 모아 쥐고 거실로 나왔다.
축구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평소 정말 잘한다고 생각하는 조현우 골키퍼와 손흥민, 황희찬, 이강인 선수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과 위치에 늘 존재하던 조규성 선수가 신경 쓰였다.
최근의 평가대로 슛찬스를 실제 득점으로 연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조규성이 계속 뛰고 있냐고 남편에게 물으니,
그나마 선발로 나온 것이 아니라 교체 투입된 것이라고 했다.
솔직히 원망스러웠다. 왜 그 자리에, 그 선수가 있을까?
한국팀은 경기 막바지로 가면서 쉴 새 없이 슈팅을 몰아쳤다.
물론 골 문의 틈바귀 속에 역시나 조규성 선수도 있었다.
그쯤 되니 이 선수가 만약 골을 넣는다면, 그보다 더 멋진 드라마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반쯤 했다.
그리고 경기 종료 막바지.
그런데 그가 해냈다!
긴 머리나 자르라며 한창 비난받던 그 머리로!
그는 헤딩슛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그간의 부담감은 여전했던 모양인지,
연장전 수비수 노마크 찬스에서
그는 공을 측면에 있던 동료 선수에게 패스만 하고 말았다.
이윽고 이어진 승부차기.
사우디 아라비아는 지금까지 승부차기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는 중계진의 설명이 있었고,
승. 패. 승. 패의 사이좋은(?) 기록을 보여주는 한국의 역대 승부차기 전적도 화면에 나타났다.
예상대로라면 우리는 가망이 약해 보였다.
과거로 짐작한 예측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경기 전 어떤 전문가들은 이미, 우리나라와 사우디아라비아의 16강전이 승부차기까지 갈 것이라는 정확한 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해냈다.
조현우 골키퍼가 두 번의 골을 멋지게 막아냈고,
조금 전 연장전까지 자신감이 없어 보였던 조규성은 세 번째 키커로 승부차기를 성공시켰다.
비난을 들어도
자신감이 없어도
조규성은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
사우디의 두 번째 골문이 막혔을 때
자리를 박차고 들어가는 만치니 감독과 크게 비교가 되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동네 모처 스타벅스에 있다.
집을 가장 편안한 작업장소로 만들었음에도,
그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주부로써의 의무와 연구자(?)로써의 압박감을 이겨보려고
사람 많고 커피도 있는 이곳에 왔다.
남편은 정신력의 문제라고 따끔한 충고를 했지만,
정신이 안될 때는 몸이라도 움직여야겠다 싶어서
도보 20분 거리의 이곳으로,
내 역할을 지키기 위해 발을 움직인 것뿐이다.
덕분에 자신감이 없어도, 부족해도
오늘의 몫은 그저 묵묵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16강 경기는 마음에 큰 울림을 주는 값진 승리였다.
자꾸만 도망치고 싶어 하는 나의 마음을 환기시켜 주는 투지의 경기였다.
선수들은 이미 지난 승리의 기쁨을 잊어버리고 다음 경기를 위해 칼을 갈고 있을 것이다.
한국 축구 파이팅, 그리고 나도 파이팅.
추신: 바쁘고 바쁜데 왜 한가하게 글을 쓰고 있느냐고! 아는 박사님들한테 혼날 수도 있다.
그러나 논문을 써보면서,
결국은 글을 많이 써보는 것이 훈련이 되는 것 같아서
쓸 수 있는 쉬운 글을 쓴다 ㅎ
글을 많이 쓰고 쓰다 보면 논문도 생각도 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