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가을이라 많이 듣는 건 아니긴 하지만
필자는 가을을 좋아한다. '계절'이라는 단어가 요즘은 굉장히 남용되어서 ‘계절’을 글에 사용하는 빈도가 낮다. 그럼에도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 환절기에는 항상 묘하게 심리가 바뀌긴한다. 그래서 오늘은 계절에 관한 글을 써보도록 하겠다.
봄에는 주로 우울함을 느낀다. 지나간 한 해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여름엔 주로 분주함을 느낀다. 어떤 회사든, 학교든, 팀이든 여름에 가장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겨울엔 주로 따뜻함을 느낀다. 연말 모임 등에서 부대끼며 서로의 체온을 공유하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가을은 '우수'함을 가장 느끼기 좋은 계절이다.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처럼 이유없는 가벼운 우울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 우울감은 마냥 싫지만은 않다. 바쁘게 지나갔던 시기를 보내고 삶을 음미하는 시간들은 그 깊이가 얕고 오래 지속되지 않더라도 나를 하루 정도는 다른 사람처럼 보내게 해준다.
아무튼 당신을 데일리 양조위로 만들어 줄 '우수'한 앨범 혹은 싱글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한국에서 가장 남성적인 밴드는 단언코 이스턴 사이드킥이다. 이스턴 사이드킥의 음악은 고달프고, 고립되어있고, 고고하다. 여러분들은 노을이 질 때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간 적이 있는가? 그리고 불을 키지 않은 방 안에 어설프게 들어온 석양 빛을 발견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서 누군가 나를 찾길 바랐던 적이 있는가? 그 일상적이면서도 하찮은 외로움, 고독함을 무심하게 달래주는 앨범이다. 여담으로 이스턴 사이드킥의 기타리스트이자 지금은 로우하이로우의 기타리스트인 고한결씨를 공연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모습처럼 조용하고, 고독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아직도 저녁과 주말에 혼자 있을 때 나에게 담배 한 대 태우자고 하는 동네 형처럼 쓸쓸한 위로를 남겨주는 좋은 앨범.
추천 트랙 : 다소 낮음, 쉬는 날 방안
가을엔 왠지 없던 가오도 부리고 싶을 때가 있다. 괜히 주머니에 손을 넣고 시니컬하게 도시를 걸어다니고 싶다. 반항적이진 않지만 염세적이고 냉소적인 나의 내면 어딘가의 모습이 강해질 때가 있다. 이 앨범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늑대'같다. 쌀쌀한 날씨, 마음만큼이라도 데인 드한이나 강동원 같은 퇴폐 미남이 되고 싶다면 인터폴을 듣자. TMI지만 90년대의 얼터너티브 열풍과 브릿팝 열풍을 이은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열풍의 근본 앨범 중 하나이다.
추천 트랙 : obstacle 1, Roalnd
김일두만큼 한국적인 포크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의 음악은 왜인지 우리나라의 조직 폭력배 영화를 보는 듯하다. 한국적인 구수한 감성이 담겨져 있지만, 고독한 느와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수록곡 <문제 없어요>는 황정민 주연의 영화 <너는 내 운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일두의 음악에서는 디스 플러스 냄새, 방안을 뒤덮은 쉰 메주 냄새, 화장실의 나프탈렌 냄새가 난다. 그의 다듬어지지 않은 곡들은 투박하다. 하지만 나는 투박함을 믿는 사람이다. 투박함이야 말로 가장 진심에 가까운 표현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추천 트랙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문제 없어요, No job No truth
김일두가 한국적이었다면 김사월은 어딘가 서구적인 포크를 지향하는 듯하다. 그의 음악은 이소라만큼 처절하고 최백호만큼 마음을 파고든다. 치밀하게 계산된 듯한 트랙들간의 유기성들은 다음곡을 기대하게 해주며, 다 듣고 나면 도대체 '그가 사랑한 사람은 누구였을까?'하는 의문을 갖게한다. 이 앨범은 자신을 모두 내려놓은 사랑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자신을 내려 놓았던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앨범과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그 사람과 잠시라도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추천 트랙 : 접속, 수잔, 악취
발매 당시 뿐 아니라, 지금도 굉장히 국내에서 인지도가 없는 밴드 duster 이다. 하지만 1998년 발매 당시 피치포크에서 My Bloody Valentine와 Sonic Youth만큼 중요하다고 언급한 앨범이다. 작금의 인디 음악 씬에서 유행하는 소위 '베드팝'의 근본으로도 볼 수 있는 앨범이다. 필자는 이 앨범을 가을보단 겨울에 듣긴 한다. 하지만 적절하게 우울한 이 앨범은 요즘 날씨에도 굉장히 적합하다. 필자는 이 앨범을 아버지의 폐암 발병 소식을 들었을 즈음에 많이 들었다. 때론 토할 것 같이 우울한 작품이 내게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이 앨범이 내겐 그렇다.
추천 트랙 : inside out, gold dust
검정치마를 좋아하는가? 검정치마가 유일하게 사운드 클라우드에서 '좋아요'를 누른 곡이 있다. 바로 양치기라는 이름 모를 가수의 '일산 저 멀리'이다. 나는 왜인진 모르겠는데, 일산에 사는 여성들과 인연이 꽤 있었다. 그래서 가끔은 그녀들을 보기 위해 일산으로 향했던 적이 꽤 있었다. 이제는 누군가를 보기 위해서 어디든 갈 수 있는 마음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아무것도 몰랐던 20대 초반을 회고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부끄러운 시절이라고 해도, 돌아보며 웃음 짓게 해줄 수 있는 투박하고 진실한 데모.
사실 클래식에 대한 지식은 무지에 가깝지만, 요즘은 공부하듯 듣고 있다. 혹시 어릴 때 디지몬을 본 적이 있는가? 이 곡은 디지몬 극장판에 삽입된 곡이다. 디지몬을 관통하는 감정선은 '몽환'이다. 현실이 아닌 세계에서 탐험을 진행하는 아이들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리와 성장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라벨 볼레로는 그 아이들의 심리를 대변하듯 몽환적이면서도 평화롭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한 심리 또한 담고 있다. 복잡한 감정선을 담고 있지만 가을이 딱 그런 계절이 아닐까? 시원해진 날씨에 기분이 좋아지다가도, 한해를 마무리 짓는 불안감이 공존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재즈, 펑크, 알앤비 등등 여러 장르가 있지만 가을과 가장 어울리는 음악은 블루스 아닐까 싶다. 또 우리나라에서 블루스를 록에 잘 접목시킨 밴드 중 구남만한 밴드도 없다. 고로 가을과 가장 잘 어울리는 밴드 중 하나는 구남이다. 구남의 음악은 젊은작가상에 등단한 소설가들의 작품을 읽는 것 같다. 사랑의 찌질하고 더럽고,회피하고 싶은 면들을 따뜻하게 그려내는 재주는 오직 조웅과 구남만이 갖고 있다. 사랑을 아무리 지속해도 가끔은 메울 수 없는 구멍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그 찰나의 감정에 집중한 앨범이다.
추천 트랙 : 장단
한국에서 비치 파슬스 류의 로우파이 인디록 느낌을 가장 잘 내는 뮤지션은 baewonlee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비치 파슬스보다 baewonlee의 음악이 더 좋다. 그의 음악에는 지독한 외로움이 묻어 있다. 한동안 그의 음악을 너무 좋게 들어, 그가 주최하는 파티에 갔던 적이 있다. 그는 음악과는 달리 굉장히 밝은 사람이었지만, 지나가는 단어들 속에서 그의 쓸쓸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도 매년 가을만 되면 찾아 듣는 곡이다.
예전에 합정 어디 빈티지샵에서 이 곡이 흘러 나왔던 적이 있다. 필자는 무섭게 생긴 여성분들에게 절대 먼저 말을 못 거는 찐따인데, 이 곡에 압도되어 그런 것들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곡 이름을 물어보았던 적이 있다. 그만큼 이 곡이 좋았다. 이 음악은 00년대 후반의 노스텔지어를 느끼게 해준다. 동생과 함께 닌텐도를 하며 집에서 부모님이 오길 기다렸던 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리 긍정적인 기억이라고 한들,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쓸쓸함을 남긴다. 나는 항상 '과거가 좋았어'라는 오류에 빠지곤 한다. 이 곡은 나를 더 오류 투성이로 만들게 하는 원인 중 하나이다.